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4 부 안식일 신앙의 한 작은 주장 제 11 장  제칠일 안식일로 기념되는 창조와 해방과 부활
 창조와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재림의 문맥
 하나님의 계획에서 창조와 해방과 구원의 질서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도 창조와 해방과 구속은 같은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와 해방과 구원의 질서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성경에서 제칠일 안식일은 일차적으로 창조와 해방의 기념일이다. 출애굽기 20장 8-11절에서는 안식일 계명이 창조의 기념일이며, 신명기 5장 12-15절에서는 안식일 계명이 애굽 종살이에서 해방된 구속의 기념일이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아버지와 자녀가 되며 남편과 아내가 되는 언약의 날이다(렘 2:2; 사 54:4-8; 호 2:18-28).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종살이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며, 또한 하나님의 신부이고 자녀이다. (526.1)
 이리하여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과 구속의 능력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제칠일 안식일 계명은 인간의 도덕적 삶을 규정하는 십계명의 하나로 거룩하게 높이 구별되었다. 제칠일 안식일 계명은 영원불변의 계명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계명으로 인류에게 계시한 계명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친 계명이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하여 도덕적 영혼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는 데에 필수적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526.2)
 교황의 교서 『Dies Domini』는 이 사실을 인정하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계명[넷째 계명]을 재발견 해야한다”(제13항)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 교서의 제14항에서 곧바로 “일요일은 하나님께서 복주사 거룩하게 하신 날이고 주의 날로 삼으신 날”이라 하여 제칠일 안식일의 영광을 뺏어서 일요일을 입히고 있는 사실은 실로 경악할 일이다. 이러한 자세는 참으로 “안식일 계명을 재발견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교황교서는 제17항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융합시켜주는 신학적 비전 안에 “주의 날”[일요일]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창조의 기념일인 제칠일 안식일로 출애굽의 구속 사건까지 기념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교 세계에서 오랫동안 태양의 날로 불려온 일요일을 택하여 두 사건의 기념일로 삼으라 하시지 않았다. (527.1)
 창조와 출애굽은 같은 문맥에 있다. 출애굽은 노아의 홍수처럼 제2의 창조사건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구속의 사건도 창조와 출애굽으로 이어지는 문맥의 연장이다. 그리고 이 문맥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건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문맥은 그 완성에 이를 것이다. (527.2)
 그런데 우리는 동일한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사의 낱낱의 사건들을 개별적으로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와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사건을 따로 따로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속사의 모든 사건들을 통합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 창조와 출애굽 해방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하나의 통합적 사건으로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와 출애굽과 구속뿐만 아니라 재림까지 통합적으로 기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구속사의 네 사건을 통합적으로 기념했다. 한날로 기념하고 찬양케 하였다. 제칠일 안식일이 그 통합적 기념일이다. 절대로 그날이 일요일이 아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는 제칠일을 창조의 기념일로 삼았다. 그리고 출애굽의 도상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반포할 때에도 이 정신은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에는 제칠일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일로 확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출애굽을 완성하는 단계에서 출애굽의 해방 사건을 기념하는 책임도 제칠일 안식일에 맡기었다. 신명기 5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까지 기억하고 기념해야 되는 하나의 문맥이 형성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도 십계명의 하나인 제칠일 안식일 계명으로 기억하고 기념하여야 하는 문맥이 형성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사건도 제칠일 안식일을 통하여 기억하고 기념해야 하는 문맥이 형성된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할 문맥이 형성된 것이다. 일요일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527.3)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별도로 첫째 날을 새롭게 안식일로 제정할 필요가 없고 첫째 날을 안식일로 제정하여 제칠일 안식일을 폐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첫째 날은 창세기와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이 아니다. 첫째 날은 다른 5일과 마찬가지로 “좋은” 날들의 하나일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의 날이 아니다. (528.1)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창조와 출애굽 해방과 부활의 문맥
 성경에서 창조와 해방과 부활은 같은 문맥의 사건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출애굽의 해방은 제2의 창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로 출애굽 해방을 기념하게 하였다. 당연한 조치였다. 그런데 부활은 제2의 창조요 제2의 출애굽이다. 따라서 창조와 출애굽의 기념일인 안식일로 부활을 기념하는 것 또한 너무나 당연하다. (529.1)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창조와 해방과 부활이 어떻게 하나의 문맥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529.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 . .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 . .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 .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을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23, 24). (529.3)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리스도의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출애굽 해방 행위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큰 소리로 만물을 “혼돈하고 흑암이 깊은 공허”로부터 불러 나오게 하신 창조 행위 그 자체였다. 하나님이 “큰 소리로 빛이 나오라” 하신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듯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셨다. 그리고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듯 빛이 “깊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부터 나왔다. “빛이 있었다”(창 1:3). 빛만이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니다. 땅이 그렇게 나왔고 하늘이 그렇게 나왔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있으라”하여 나왔고 “큰 소리로 나오라 부르시니” 나왔다. 이처럼 창조의 행위와 부활의 행위가 같았다. 안식일로 기념되는 창조가 곧 부활이었다. 부활이 제2의 창조였고 창조가 제1의 부활이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제칠일 안식일로 기념되었듯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도 마땅히 제칠일 안식일로 기념되어야 한다. (529.4)
 그런데 나사로의 부활은 무덤에서 나오고 동굴에서 나오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창조가 빛이 나오고 땅이 나오고 사람이 나오는 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듯이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의 부활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큰 소리로 불러” 창조하신 사람이 잡히고 묶인 채로 살아간다면, 자유를 잃고 노예의 신세로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 창조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오라 불러, 무덤에서 살아 나온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고 그 얼굴이 수건에 쌓인 채” 나온다면 나사로의 부활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고, 다 하고, 다 이루므로” 하나님이 안식하고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제칠일 안식일(창 2:1-3)로 기념할 수 있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려면, 하나님의 창조를 제칠일 안식일로 온전히 기념되게 하려면 제2의 창조인 인간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정한 부활이 마치고 다 이루어지려면 나사로에게 해방의 출애굽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로운 해방으로 나와야 참으로 “나오는 것”이다. “바벨론에서 나와야”(계 18:4) 참으로 나온 것이다. 애굽에서 출애굽 해야 참으로 창조된 것이오, 바벨론에서 나와야 참으로 부활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해야 예수님이 나사로의 부활을 다 이루는 것이요 나사로의 재창조를 다 이루는 것이다. (530.1)
 그렇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큰 소리로 불러 나오라” 하시고 그래서 나온 창조의 사건만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진실로 제칠일 안식일은 나옴의 완성으로서 “풀어놓아 다니게 한” 해방 사건의 기념일이다.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어 이르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한 사건의 기념이다. 하나님의 크신 권세로 말미암아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출 12:31)한 사건의 기념이다. 바로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풀어놓아 자유롭게 한” 사건의 기념이다. 예수께서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자를 병에서 놓이게” 하신 날이며(눅 13:10-12) 예수께서 잡히고 갇힌 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신 사건들의 기념일이다. 안식일은 이런 날이다. 진정으로 해방이 사람과 만물에게 이루어지는 날이며 이러한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창조의 완성인 해방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창조의 날이고 해방의 날이고 부활의 날이다. 주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눅 4:18) 날이다. 죽음에서 놓임이 놓임의 완성이고 해방의 완성이다. (531.1)
 그렇다. 창조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날이고, 출애굽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날이다. 그리고 진정한 창조의 사건이며, 진정한 해방의 사건인 부활의 날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날이다. 창조와 출애굽 해방과, 부활은 같은 성격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의 사건이다. 하나님에게 속한 사건이다. 창조 안에 출애굽 해방이 있고 부활이 있다. 출애굽 해방 안에 창조와 부활이 있다. 마찬가지로 부활 안에 창조와 출애굽 해방이 있다. 그래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 안에 하나님의 창세기 창조 묘사와 출애굽의 묘사가 들어있다. 부활 안에 창조가 있고 출애굽 해방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가 부활이다. 출애굽이 부활이다. 진정한 창조가 부활이요, 진정한 해방이 부활이다. 하나님의 창조가 제칠일 안식일로 기념되고, 출애굽이 제칠일 안식일로 기념되듯이 부활도 마땅히 제칠일로 기념되어야 한다. 부활 사건에서 보듯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라 불러” 나사로를 부활케 하고 베로 묶인 체 있는 그 수족과 수건에 쌓인 그 얼굴을 “풀어놓아 다니게” 함으로 나사로의 부활을 완성케 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라사대가 모든 안식일의 가라사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행하시는 가라사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우리에게 끼치시는 능력이 바로 이 가라사대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이야말로 창조의 날이며 출애굽 해방의 날일뿐만 아니라 부활의 날이기 때문이다. (531.2)
 무엇이 일요일 신학의 문제인가
 『Dies Domini』에서는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그리스도인의 선택을 바꾼 중요한 이유로 안식일의 영적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었기 때문이라 한다(제18항). 물론 안식일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미래의 소망의 날이다. 안식일은 가나안 땅 같은 날이다. 가나안과 천국의 소망을 간직한 날이다. 뿐만 아니라 재림의 소망을 간직한 날이다. 그러나 재림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도 다 성취하지 못한 “남아있는” 약속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다 성취된 것은 아니다. (532.1)
 그런데 안식일의 영적 기능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재림으로도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제칠일 안식일은 과거의 기억이고, 과거의 기념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창조와 출애굽과 부활의 기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이같은 영적 의미는 출애굽으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도 심지어 예수님의 재림으로도 완전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사 66:23). 창조와 출애굽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재림이 새 하늘에서도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야”(계 15:3) 하기 때문이다. 창조의 감격과 해방의 감격과 부활의 감격을 노래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과 부활의 능력을 찬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영원토록 남는 것이다. (533.1)
 『Dies Domini』는 제칠일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꾼 두 번째 이유로 일요일은 매주일의 부활절이라 하였다. 성 바질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모든 다른 날들의 첫 열매인 거룩한 일요일이 주님의 부활에 의해 존중되었다”(19항)고 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날들이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날들 가운데 일요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했던 때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는 때”였다(막 16:2). 또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의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신” 날도 같은 날이었다(눅 24:13, 27). 그러나 첫째 날에 국한하여 차별적으로 첫째 날에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모인 곳에 나타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평강과 성령의 선물을 내려주신 때는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였다(요 20:19). 창세기 식으로 계산하면 안식 후 “둘째 날이 시작되는 저녁 때”였다. (533.2)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일요일에 부활했으므로 일요일을 주의 날로 지켜야한다는 주장을 논의할 때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또 있다. 주님의 부활과 부활한 주님의 첫 활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의 현현과 그의 첫 활동을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자신을 처음으로 나타내고 창조주로서 자신의 창조 활동을 시작한 사건은 주님이 부활하고 부활의 주로서 활동을 시작한 사건에 못지 않게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현이 어느 날에 이루어졌는가. 창조의 첫째 날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첫째 날을 어떻게 존중하셨는가. 하나님이 첫째 날을 특별한 날로 삼으셨는가. 하나님이 창조의 첫째 날을 안식일로 삼으셨는가. 하나님의 창조의 첫째 날을 주의 날로 삼으셨는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에 그때에 그렇게 하셨다면 제칠일은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고, 안식일이 될 수도 없었다. 일요일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5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