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인 베냐민은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의 어머니 라헬이 남긴 유일한 요청은 아이를 “베노니”“슬픔의 아들”이라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이름을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개명했다(창 35:16~18). (344.1)
 어머니 없이 자란 아이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은 그의 형들이 애굽으로 갈 때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창 42:38). 베냐민이 애굽으로 갈 때 가끔 “아이”라고 불렸으나(창 43:8) 기록을 보면 그때 그는 열 아들의 아버지였다(창 46:21). 족장들의 지배형태에 따라 그가 오늘날의 결혼한 아들들보다는 훨씬 더 그의 부친의 지시를 잘 따랐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44.2)
 베냐민 개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그의 이름을 가진 지파에 대한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44.3)
 이 지파의 성격에 대하여는 야곱이 임종시에 남긴 예언에 잘 묘사되어 있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창 49:27). 이 말은 시샘이 많은 성격을 묘사하기보다는 어린아이가 응석을 부리는 것과 나아가서는 고집을 부리거나 잘 토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일은 대가족 중에서 맨 막내아들에게 흔히 있는 일로서 어머니도 달래기가 힘든 것이다. (344.4)
 이런 고집불통의 정신은 그들이 거의 전멸되기까지 싸울 때 잘 드러났는데, 그들은 오히려 기브아의 악한 사람들을 옹호해줌으로 징벌을 당했던 것이다(삿 20:12~48). 이로 인하여 그들의 숫자는 600명으로 줄어들었으나 다윗의 시대에 와서는 다시 상당한 수의 지파가 됐다(대상 7:6~12). (345.1)
 사사시대의 베냐민 지파는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사람 700명을 배출할 수가 있었다(삿 20:16). (345.2)
 약 350년 후에 베냐민 족속 중에는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살도 발하는” 자들이 있었다(대상 12:1~2). 베냐민 족속은 특수한 목적으로 궁술을 익혔으며, 활과 물매를 사용할 줄 아는 기술이 뛰어나 찬양을 받은 유일한 족속이었다(대상 8:40; 대하 17:17; 삼하 1:22). 베냐민의 영토는 유다의 북쪽에 있는데, 두 지파 사이의 경계선이 예루살렘 도성을 지나가고 있었다. (345.3)
 기브아에서의 불행한 처신의 결과로 위기를 맞은 이후로(삿 19:14~39), 그 지파가 가지고 있던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이 변화된 증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345.4)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궤가 20년 동안이나 그들의 지경인 기럇 여아림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 제사장이 그 언약궤를 돌보고 있었다(삼상 7:1~2). (345.5)
 라마는 베냐민의 도시로, 이곳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희생을 드렸던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다. 사무엘은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다(삼상 7:15~17). (346.1)
 이스라엘의 많은 군중이 모였던 미스바는 베냐민의 지경 안에 있었다(삿 20:1; 왕하 25:23). 여기서 여호와께서 무서움에 떠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5~11). (346.2)
 모세가 임종시에 각 지파에게 말한 예언을 보면, 야곱이 묘사한 베냐민의 성격에 결정적인 변화가 따랐다.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신 33:12). (346.3)
 야곱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는 이리로 비유했던 베냐민의 겁 없는 성격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이제는 그 무모한 힘을 여호와께 대한 관심과 그 백성을 보호하려는 데 사용한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신 33:12a). 고대 베냐민 지파의 성격과 이방을 위한 사도 바울과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바울은 “나도 ∙∙∙ 이스라엘인이요 ∙∙∙ 베냐민 지파라”고 말했다(롬 11:1). (346.4)
 후에 바울이라 일컬어진 사울은 스데반을 돌로 칠 때,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동의한” 사람이었다(행 7:58; 8:1). 다음으로 그는 “물어뜯는 이리”“교회를 잔멸”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었다(행 8:3). 무서운 이리가 피에 굶주려 그 먹이를 찾는 것처럼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이런 사람의 곁에 있는 주의 제자들에게는 안전함이 없었다. 그러나 “물어뜯는 이리”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회심을 하면 그 만큼 더 열정적으로 주의 사업과 그의 영광을 보살피고 보호하게 된다. (346.5)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목격한 다음에는(행 9:3~9) 그의 이리 같은 습성은 사라지고, 주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그의 곁에 안전하게 거할 수 있었다. 다메섹에 있던 성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위험에 처해지지 않았다. 그들을 잔해하려던 자가 이제는 친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때든지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행 9:10~19). (347.1)
 하나님은 하나의 친절한 행위라도 결코 보상하시기를 잊지 않으신다(삼상 2:30). 사울이 “주의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고 보살필 때, 주께서 그를 항상 품고 계셨다.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었다. 무서운 독사가 물어도 힘을 잃었다(행 28:1~6). 그를 빠뜨릴 물도 없었다(행 27:23~25). 하나님은 그를 언제나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347.2)
 모세를 통하여 주신 축복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실(신 33:12) 것이라고 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베냐민의 지경 안에 있는 모리아산에 세워질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칠고 험한 생애를 통하여 아버지의 강한 보호를 받은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 이 말씀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347.3)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해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생애의 노정에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할 때,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전능의 팔로 우리를 번쩍 들어, 그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결코 불가능한 곳에 우리를 안전히 내려놓으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두 팔로 힘껏 아빠의 목을 껴안고 그 두 어깨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할 때,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복된 곳이로다! 이곳은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런 곳에 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불평과 중상의 소리가 영원히 잠잠할 것이다(약 1:26). (348.1)
 이스라엘 백성이 80년 동안 태평하게 살도록 다스렸던 에훗은 베냐민 사람이었다(삿 3:15, 30). 그는 왼손잡이였는데,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모압 왕 에글론을 단칼에 죽여버렸다(삿 3:21~26). (348.2)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다(삼상 9:21). 하나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삼상 10:9). 그는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행했고(삼상 10:26), 그가 겸손하게 머물러 있는 동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다(삼상 15:17~23). 그러나 그가 자기 마음대로 자고(自高)하게 되었을 때, 그는 여호와께 버림을 당하였다. 그러자 그의 성격 가운데 있던 이리와 같은 성향들이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먹이를 찾는 이리처럼 여러 해 동안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것”(삼상 26:19~20)같이 다윗을 추격하였다. 그의 유일한 욕망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다윗을 살해하는 것이었다(삼상 18:11; 15:28). (3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