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4 부 안식일 신앙의 한 작은 주장 제 10 장  안식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일
 그러나 출애굽과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는 둘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지만 중심도 있다. 출애굽의 시작과 끝 사이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있다.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문설주를 건너는 것이 유월(passover)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홍해를 건너는 것도 똑같이 유월이다. 넘어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침례를 치렀다고 한다(고전 10:1, 2).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그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것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롬 6:3)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이다(롬 6:4).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여 그분과 하나가 된 것이다”(롬 6: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옛 사람을 홍해 바다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 곧 부활한 새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홍해 밖으로 올라왔다. 새로운 백성, 곧 부활한 백성으로 광야를 행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출애굽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 사건이 제칠일 안식일 하루로 다 기념되었다. (519.3)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중심이 있다. 금요일에 일어난 예수의 죽음이 시작이고 일요일에 일어난 예수님의 부활이 끝이다. 그리고 그 사이 곧 제칠일에 일어난 예수님의 장사지냄이 있다. 예수님의 이 묻히심이 예수 사건의 중앙이다. 출애굽에서 홍해를 건너는 사건 같은 일이 제칠일에 일어난 것이다. 홍해의 침례 같은 사건이 제칠일 안식일에 예수님의 장사되는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구원의 일정에 있어서도 중심되는 사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된 것”(롬 6:4)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침례는 “그와 함께 묻히는” 의식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있어서 부활과 함께 죽으심과 묻히심이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520.1)
 그렇다면 출애굽 사건이 제칠일 안식일 하루로 기념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제칠일 안식일 하루로 다 기념되어서는 안 되는가. 출애굽의 기념일인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과 부활을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출애굽의 기념일인 안식일이 우리의 침례를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침례의 기념일로서 부활이 기념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출애굽의 기념일로서 부활의 기념되는 것이 아닌가. 부활과 함께 죽으심과 장사 지냄이 기념되고 있지 않은가. (520.2)
 부활의 제2의 출애굽이요 제2의 창조이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제2의 출애굽이면서 제2의 창조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제2의 창세기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9)라고 하였다.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다. 창조의 기념일인 제칠일 안식일이 제2의 창조를 기억하고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의 해방까지 기념하기에 아무런 부족이 없다고 평가한 제칠일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인한 인간의 참 해방을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제칠일 안식일의 계명은 하나님이 친히 돌비에 쓰시고 아들의 피로 비준한 계약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에 기록한 언약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새 언약”이 아닌가. 예수님의 피는 이 새 언약을 위해 부은 피가 아닌가. 창조의 언약의 날로 이 언약을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출애굽의 언약의 날로 이 “새 언약”을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여호와의 행하시고 우리 눈에 기이한” 그 위대한 언약을 기리기 위해 본래부터 “여호와께서 정하신”(시 118:4) 제칠일 안식일로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눅 22:20)을 기억하고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한가. (521.1)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은 제칠일 안식일이 재창조를 기념하기에 무엇이 부족하여 교회가 다시 새 날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새 날을 정하여 태초의 안식일이요 출애굽의 안식일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안식일인 십계명의 안식일을 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제칠일과 비교하여 달아보고 하나님이 이미 “부족하다”(단 5:27)고 선포한 육일의 한 날을 뽑아 제칠일을 욕되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심히 좋은” 데도 이르지 못하고 “거룩한” 데에도 이르지 못했던 한날로(창 1장, 2장) “거룩한 제칠일”을 폐하게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진실로 아니다. 제칠일 안식일은 창조와 출애굽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행하신” 모든 위대한 일들 곧 “우리 눈에 기이한”(시 118:23)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시 118:24) 이다. 구속사의 기념에 있어서 모퉁이 돌 같은 날이다. 그러나 교회의 미련한 인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다(시 118:22). 제칠일 안식일은 진실로 “큰 날”이다. 창조의 날이요 출애굽의 날이요 언약의 날이다. 성육신의 날이다. 수난의 날이요 묻힘의 날이요 부활의 날이다. 승천의 날이요 성령 부음의 날이다. 창세기 2장 1-3절에 이미 이 사실이 잘 암시되었다. (521.2)
 제칠일 안식일, 창조와 출애굽의 날을 대표하고 예수님의 구속 사건을 대표하는 한없는 용량의 날
 제칠일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를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여섯 날들이 어떤 날들인지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모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는 날이다. 다섯 날은 “좋은” 날이고 여섯째 날은 “심히 좋은” 날이다.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 1:5) 라고 표현되지 않은 날이다. “거룩한” 날로서의 자신을 나타내고 설명하는 데에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는”(계 21:23) 날이다. 해와 달이 이 날을 증거하기 위해 나서지 않아도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심” 하나로 자기를 나타내기에 충분하다는 날이다. (522.1)
 창세기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란 표현을 제칠일 안식일에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창세기 기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란 표현을 제칠일에 한하여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제칠일 안식일이 6일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의 차별화를 위한 조처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의도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제칠일 안식일이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려 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제칠일을 기억하여 지키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칠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분부가 쓸데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기자가 의도하는 바는 제칠일 안식일이 24시간의 하루이지만 그 영적 특성이 남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그 영적 차원이 다른 날들과 다른 날이라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아침이 있고 저녁이 있는 그러한 상대적인 날들의 한날이면서 그 상대적 특성마저도 다른 날들과는 다른 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하루 종일 낮이면서 하루 종일 저녁과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522.2)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은 더 큰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제칠일 안식일은 24시간의 하루이고 이 땅의 하루이고 사람의 한날이지만 하늘의 날이고 하나님의 날이다. 사람의 안식일이지만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육체적으로는 6일의 하나로서 시간에 속하지만, 영적으로는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영원과 같은 하루이다. 6일의 차원에 속해 있으면서 6일의 차원을 벗어나는 날이다. 그 앞에 제6일이 있어 6일과 같은 날이지만 제칠일 뒤에 제8일이 없어 6일과 다른 날이다. 제8일이 없는 제칠일이다. 제칠일은 마지막 날이다. 날들의 끝이면서 날들이 아닌 날로서 제칠일 안식일이다. 보통 날로서의 차원이 끝나고 영원 같은 날의 시작으로서 제칠일 안식일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무한하고 무량한 날을 대표하는 날이다. 제칠일 말고 이런 날이 또 없다. (523.1)
 제칠일은 한없는 용량의 날이다. 창조의 날들을 대표하고 출애굽 해방의 날을 대표하고 제2의 창조를 대표하고 제2의 출애굽을 대표하고 부활을 대표하고 승천을 대표한다. 창조의 기억을 담을 수 있고, 출애굽의 기억을 담을 수 있다. 제2의 창세기인 출애굽을 기억하고 제2의 출애굽인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할 수 있는 날이다. 재창조인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다. 창조를 상징하고 출애굽을 상징하고 주의 성육신을 상징하고 주님의 침례를 상징하고 주님의 부활을 상징할 수 있다. 우리의 침례를 상징하고 우리의 부활을 상징할 수 있다.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약의 교회가 제칠일 안식일로써 구속사의 모든 사건을 상징하고 기억하고 기념하였다. (524.1)
 제칠일은 지나간 질서의 완성의 날이며 새로운 질서의 시작의 날이다. 이전 차원의 완성에 제칠일이 있고 새로운 차원의 시작에 제칠일이 있다. 부활의 새 세계는 일요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제칠일로 시작되는 것이다. 태초의 인간에게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첫날부터 펼쳐진 것이 아니라 안식일부터 펼쳐진 것이다. 첫 사람이 경험한 첫날은 일요일이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이었다. (524.2)
 제칠일 안식일은 7음계의 높은 도 같은 날이다. 7음계의 높은 도는 낮은 도로 시작되는 7음계의 마지막 음표이면서 새로운 7음계의 시작이다. 높은 7음계의 세계는 “좋다→심히 좋다→거룩하다”로 발전하는 세계이다. 제칠일은 높이 자란 나무의 첫날이다. 작은 씨알로서의 삶과 풀잎으로서의 삶을 넘어 아름드리 나무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날이다.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날이다. 에덴의 질서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다. 땅의 온갖 “나쁨”“악함”이 극복되는 차원이 제칠일 안식일의 일차적 뜻이라면 이 “좋은” 제칠일로 시작하여 우리의 시간의 심히 “좋은 차원”으로, 그리고 “거룩한” 차원으로 계속 올라가고 심화되는 세계가 안식일의 세계이다. (524.3)
 그렇다. 안식일은 첫째 날이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 그 달음질을 완성하고 다 이룬 날이다. 첫째 날이 더 큰 날이다. 아니다. 여섯 날이 땅에서 “다 이루고 다 큰” 날이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란 날이다. 동시에 제칠일은 하나님 나라의 첫날이다. 높은 7음계의 첫 음표와 같은 날이다. 진실로 제칠일 하루에 끝이 있고 시작이 있다. 제칠일 하루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 부활의 첫날의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 말고 더 좋은 날이 우리에게 없다. 제칠일 안식일은 부활의 기념일이다. (5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