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에 기초하는 신앙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재림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신앙이다. 당연히 초대교회는 재림교회였다.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였다. 그러나 재림이 지연되었다. 교회는 재림신앙을 잃었다. 예수님이 더디 오심으로 신자들이 재림신앙을 잃었다. 이제 교회는 재림의 소망으로 뭉친 초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재림신앙을 상실하면서 타락했다. 그리스도가 덜 중요해지고 재림이 덜 중요해졌다. 교회와 교회법이 더 중요해졌다. 현세가 더 중요해지고 저 세상이 더 중요해졌다. (503.1)
 재림신앙은 저 세상주의가 아니다. 재림신앙은 살아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맞겠다는 사상이다. 주님과 함께 새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사상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저 세상주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사상이다. 죽지 않으면 주님의 나라로 갈 수 없다는 사상이다. 삶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만 생각하는 사상이다. 주님을 생각하자면 죽음을 생각하고 저 세상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주님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주의이다. 교회가 다스리는 세상이 현세이고 주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저 세상이라는 주의이다. 이리하여 이 땅에서 주님을 맞아 주님과 함께 새 세상을 살겠다는 소망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중세는 예수 대신 교회가 다스리는 세상이었다. 예수를 기다리는 소망보다도 교회의 율법으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세상이었다. (503.2)
 종교개혁은 그리스도를 신앙의 중심으로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아야 일어난다. 이런 사상을 강조하려면 성경을 중요시 해야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경이 제일이라고 하는 운동이었다.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되면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된다. 종교개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신앙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504.1)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미국의 재림운동은 초대 기독교 신앙의 회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신속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윌리암 밀러가 지도하고 사무엘 스노우가 지도한 이 재림의 신앙은 좌절되었다. 초대교회처럼 재림의 지연으로 재림신앙은 좌절되었다. SDA는 좌절된 재림신앙을 딛고 다시 일어선 재림신자들이다. 이들이 주저앉은 재림신앙을 다시 세울 수 있었던 신앙적 활력은 어디서 왔는가? 안식일 신앙이다. SDA는 안식일 신앙으로 재림신앙을 다시 일으킨 재림신자들이다. 이들이 Seventh-day Adventist이다. 재림의 지연을 안식일 신앙으로 극복한 사람들이 Seventh-day Adventist이다. (504.2)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도: 안식일 신앙으로 재림의 지연을 극복한 무리
 좌초된 밀러주의자들은 어떻게 제칠일 안식일 신앙으로 다시 재림신앙의 몸을 추스릴 수가 있었는가. 재림의 지연으로 실망한 재림신자들이 안식일 계명이 있는 지성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매 제칠일 안식일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지성소로 영접되고 영적으로 예수에게 영접되었기 때문이다. 매 안식일마다 영적으로 맞이하는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지루한 재림의 기다림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SDA에게 안식일은 재림의 리허설이고 재림의 맛보기였다. 재림을 미리 맛봄이요 재림에 미리 참여함이다. 재림신도들에게 이미 와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제칠일 안식일이다. (504.3)
 요한은 재림의 지연으로 상심하고 있던 초대교인들에게 성령의 존재와 사역 안에서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했지만(요 14-16장), 19세기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도들은 제칠일 안식일 안에서 경험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다. 제칠일 안식일에 경험하는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성령의 사역 안에서 살지만 제칠일에는 특별한 형태로 성령을 체험한다. 제칠일이 여느 날과 다른 날로 경험되는 그런 방식으로 SDA는 안식일에 특별하게 성령을 체험한다. 제칠일 안식일의 특별한 성령 체험에서 예수의 영적 재림을 경험한다. (505.1)
 하나님은 날마다 그 자녀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지만 제칠일에는 여섯 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 부부가 밭에서 함께 일할 때와 밤에 부부가 함께 한 침대에서 서로 합방을 할 때는 그 함께 함이 다르다. 낮에는 함께 자기의 일을 하고 밤에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리를 함께 한다. 상대에게 참여하고 상대에게 자기를 내어준다. 안식일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안식일에 우리에게 오시는 성령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안식일에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가 이렇게 우리에게 오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매일마다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지만 이렇게 매 안식일마다 특별하게 오신다. 그리고 최후 재림의 날에는 날마다 오시고, 제칠일마다 오시는 그 오심의 절정으로서, 완전히 오심으로서, 오심의 충만으로서, 오심의 완성으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505.2)
 예수께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했다”(요 16:5, 6). 초대교회 신자들은 속히 오리라하신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 되자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재림신자들도 주의 재림이 더디 되자 슬픔이 가득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 계시는 것이 사실상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는 것이요 내가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하셨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9) 하셨다. (506.1)
 사실상 초대교회는 보혜사 성령의 선물이었다. 보혜사 없이는 초대교회도, 초대교회의 신약성경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SDA는 예수가 오시지 않고 대신 보내신 성령의 선물이다. E. G. White에게 부어 내리신 성령의 은사의 결과이다. 우리는 E. G. White의 영적 은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 복음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 거듭남과 선교와 교육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 이처럼 재림의 지연되는 시간은 보혜사의 은사로 그리스도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심판의 사상에 우리가 심화되는 시간이다. 날마다 성령 안에서 예수의 오심을 맞이함으로서, 그리고 안식일마다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되는 성령 안에서 예수의 재림을 맞이함으로서 예수를 믿고 기다리는 사랑을 심화되는 시간이다. 오심의 절정으로서 최후의 재림을 맞는 날까지 재림의 기대를 고조시키며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제칠일 안식일 자체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대신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와 함께 있게 한 보혜사 성령 같은 날이다. 재림의 지연으로 상심한 우리의 위로자 같고 은혜의 스승 같은 날이다(요 14:16). (506.2)
 저녁 ∙ 안식일 ∙ 종말
 재림의 중요한 성격의 하나는 다 이루고 마침에 있다. 만남에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옴에 있다. 귀향에 있다. “아버지가 우리를 영접함”(요 14:3)에 있다. 잔치를 베풂에 있다. 모든 식구가 식탁에 함께 참여함에 있다. 재림은 우리의 고난과 기다림이 끝나는 날이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준비와 노력이 완성되는 날이다.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완성에 이르는 날이다. 우리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가 옛 고향 에덴으로 돌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것과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가신 아버지와 신랑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날이다. (507.1)
 하루의 저녁과 제칠일 안식일이 모두 이러한 날이다. 하루는 저녁으로 끝난다. 하루의 수고가 저녁으로 끝난다. 하루의 보람이 저녁으로 완성된다. 아침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저녁에 만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그들에게로 영접하는 시간이 저녁이다.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되는 것이 저녁이다. 저녁에 사냥감을 가지고, 추수한 곡식을 예비하고, 장사해서 번 돈을 가지고 아버지와 신랑이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 만찬의 자리가 준비되고 우리의 온 식구가 잔치에 참여한다. 한방에 잔다. 사랑을 나눈다. 쉰다. 행복을 느낀다. 평강을 느낀다. 이것이 저녁이다. 하루의 수고가 끝나고 쉼과 행복이 시작된다. 이것이 저녁이다. (507.2)
 제칠일은 6일의 저녁이다. 하루 열두 시간 끝이 저녁이고, 한낮의 끝에 오는 것이 저녁이라면 제칠일은 여섯 날의 끝에 오는 여섯 날의 저녁이다. 제칠일은 하루 종일이 저녁인 날이다. 스물 네 시간이 저녁인 날이다. 제칠일 하루가 종일 저녁 같은 날이어서 햇볕이 쓸데없는(계 21:23) 하루이다. 일하는 하루가 아니기 때문에, 쉬는 저녁 같은 하루이기 때문에 햇빛이 필요 없는 하루이다. 여섯 낮의 저녁 같은 하루이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즐기는 저녁 같은 하루이다. 낮의 수고와 노력이 보람으로 자란 저녁 같은 날이다. 낮의 수고와 노력의 보람으로 우리가 쉬고 평안을 누리는 저녁 같은 하루이다. 노동을 쉬고 부부가 연락하는 저녁과 같은 하루이다. (507.3)
 한낮의 끝인 저녁에는 너도 쉬고 네 아들도 쉬고 네 딸도 쉬듯이, 그리고 네 남종이나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방황하는 나그네도 아무 일도 못하듯이 여섯 낮의 저녁인 제칠일에는 하루종일 너도 쉬고 네 아들과 네 딸도 쉬고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육축과 나그네도 쉬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여섯 날을 하루같이 일하시고 “제칠일을 쉬어 평안하셨듯이”(출 31:17) 우리도 육일동안에는 우리의 일을 하고 여섯 낮의 저녁인 제칠일에는 쉬는 것이다. (508.1)
 6일 동안에는 마치 한 낮에 힘써 네 일을 하듯이 일해야 하지만 제칠일에는 쉬는 것이다. 한낮의 저녁에서처럼 쉬어야 한다. “네 소와 나귀가” 한낮의 저녁에서처럼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돌릴 것이다(출 23:12). 한낮의 저녁이 숨돌리는 시간인 것처럼 제칠일 안식일은 여섯 날의 끝에 숨돌리는 저녁인 것이다. 여섯 낮의 저녁인 것이다. (508.2)
 이처럼 사람의 시간은 일과 쉼의 리듬으로 되어있다. 낮과 저녁의 리듬으로 되었다. 하루는, 낮과 저녁으로 일주일은 6일과 제칠일로 리듬이 갖추어있다. 6일이 낮이고 제칠일이 저녁이다. (508.3)
 역사에도 낮이 있고 밤이 있다. 밤에는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재림은 역사의 저녁이다. 지금은 때가 낮이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 일하는 낮이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일하지 못하는 역사의 저녁이 올 것이다. 그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이고 세상의 종말이다. 인간 역사에서 낮과 밤의 리듬이 이와 같다. 그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삶과 죽음의 리듬이 있다. 사는 시간은 낮이다. 일하는 낮이다. 그리고 인생의 죽음이 저녁같이 오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쉬는 죽음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509.1)
 제칠일과 재림 사이에도, 인생의 삶과 죽음사이에도 여러 단위의 일과 쉼, 낮과 저녁의 리듬이 있다. 6년과 안식년의 리듬이 있고, 49년과 희년의 리듬이 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하루의 리듬이고 대단원의 리듬은 역사의 낮과 종말의 저녁으로 이루어지는 리듬이다. 그리고 제칠일 안식일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중간적 단위의 일과 쉼, 낮과 저녁의 리듬을 대표하고 통합하는 리듬이다. (5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