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서 주일로 제3장 부활 현현과 일요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顯現).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한 유사하지만 같지는 않은 또 다른 설명은 일요일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한 최근의 논문에서 로르도르프(W. Rordorf)가 보급시킨 것이다. 그 논문은 몇 개의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로르도르프는 재기가 넘치지만 왜곡된 논쟁으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과 일요일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 초기 교회 공동체가 떡을 나눠먹는 행위, 고린도전서 11:17-34절에 묘사된 주의 만찬 등을 서로 연관시킨다.25) 그는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시적으로 나타나셨고, 일요일 저녁에 발생하여 머지않아 분명히 부활절 식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부활하신 날 저녁식사에 그 근원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26)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 저녁뿐 아니라 그 다음 일요일에도 나타 나셔서 제자들과 함께 먹었으며(요 20:26), 심지어는 아마도 그 후 다른 일요일(행 10:41)에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은27) 매 일요일 저녁에 정규적으로 성찬 예식이 거행되도록 한 규칙적인 형식이 제정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일요일의 명칭인 “주의 날”(κυριακή ημέρα)과 그 날의 성찬 예배는 둘 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새롭게 거행하신 날 부활일의 저녁에 “또 하나의 제도”로 경험되었던 주의 만찬에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다.28) (110.3)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신 때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먹었던 그 식사들이 오토 베츠(Otto Betz)가 설명하는 것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거행되었던 혁명적인 새 예배의식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29) 그 사건에 대한 복음서의 설명은 그러한 가정을 믿을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제자들은 부활하신 날 일요일 저녁에 여전히 주님의 부활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못하여(눅 24:11) ”문들을 닫고(요 20:19) 모였는데, 주의 만찬을 거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요 2019) 모인 것이었다. 요한 이 내용을 기록한 것은 1세기 말엽이었는데,30) 만일에 로르도로프의 주장에 따르면 그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주의 만찬을 거행하고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부활일 저녁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잡수신 식사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세부 내용이 생략되었다는 것은 부활하신 날 잡수신 식사를 일요일 준수가 시작된 중요한 출발점으로 여기는 것의 부당성을 말해준다. 게다가 요한이 갈릴리 호수의 해안에서 한 주일의 초반부 아침에 제자들과 잡수셨던 한 식사(요 21:13)를 언급하고 있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드셨던 식사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력하게 제안하는 것이다.31) (111.1)
 제자들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먹었던 식사를 “주의 만찬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제도”로 이해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모스나(C. S. Mosna)의 주석에 의하면, 그 식사에 대해서 유일하게 기록한 누가는 “fractio panis,” 즉 떡을 떼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32) 사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그리스도)에게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셨다(눅 24:42-43). 떡이나 포도주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의식적인 축복의 내용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성찬의식의 떡과 포도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 분께 드린 것이다(42절). 그리스도께서만 잡수셨다. 왜 그랬을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신 육체가 물리적인 실체임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무슨 먹을 것이 있”(41절)는 지를 물으신 문맥 속에서 그 답은 명확하게 나타난다(36-41).33) (112.1)
 “여드레를 지나서”(요 20:26) 아마도 부활하신 그 다음 일요일로 여겨 지는 날,34)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신 사건에 대한 진술은 일요일 준수가 규칙적인 형식이 되었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으로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도마가 함께 있지 않았(24 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요한 스스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요한은 어떤 예배 의식과 관련된 만찬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도마에게 그의 육체적인 부활의 실체를 만져서 알 수 있도록 증명해 보이시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26-29절). “여드레가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모였다는 사실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닌데, 왜냐하면 오순절 전에 “저희가 다락에 함께 유하”(ήσαν καταμένοντες, 행 1:13)였으며 거기에서 그들은 날마다 서로 신앙 계발을 위해 만났다(행 1:14; 2; 1)고 우리는 말하기 때문이다. (112.2)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형식에 따라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개인에게도 나타나시고, 모임 중에도 나타나셨으며, 일요일에도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환경에서도 나타나셨다. 사실상 그분께서는 게바와 야고보와 같은 개인에게도 나타나셨으며(고전 15:5, 7), 열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고(5, 7절), 오백여 형제에게도 나타나셨다(6절). 예를 들어, 그 만남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모인 중에서도 이루어졌고(요 20:19, 26),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도 이루어졌으며(눅 24:13-35), 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중에도 이루어졌다(요 21:1-14). 일요일에 반복되는 성찬 예식을 거행하는 제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부터 일치된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상 오직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만 그리스도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었다”(눅 24:30). 이 마지막 사례는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처럼 이해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예수께서 초대 받으사 평범한 식탁에 둘러 앉아 평범한 식사를 나눈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두 제자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셔서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 위해 앉으셨다(눅 24:30).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셨다”(30절). 벰(J. Behm)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 행동은 “단순히 함께 음식을 먹기 위한 관습적이고 필수적인 준비에 불과했다.35) 포도주가 제공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축사되지도 않았는데, ”떡을 떼시는 중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지심으로 그 식사가 돌연히 중지되었기 때문이었다(35절, 31절 비교). (113.1)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같이 나누었던 식사라 할지라도 주의 만찬에 대한 “또 하나의 다른 제도”로 간주하는 것은 그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만드신 서약과도 대립 된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막 14:25; 눅 22:18 비교), 이 현실 세상에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거룩한 성찬예식의 떡과 포도주를 다시는 먹지 않을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모든 공관복음서에 이의 없이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주님을 모순되고 대립되는 과실 있는 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 후 그리스도께서 참여하신 그 어떤 식사도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114.1)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태(28:10)와 마가(16:7)에 따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지 않고(누가와 요한은 그렇게 언급함) 갈릴리에서 일어났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맥카슬랜드(S. V. McCasland)가 바르게 고찰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114.2)
그 광경은 베드로의 복음서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된 대로 무교절 후인 거의 열흘이나 지난 후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이 이처럼 후에 나타날 것에 대한 그 비전이 일요일에 주어졌다면, 그런 우발적인 방법 속에서 일요일 준수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된다.36)
(114.3)
 복음서들 속에 서술된 모순점들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 이지만,37) 마태와 마가 모두가 부활하신 날 일요일에 그리스도께서 제 자들과 만나 식사를 나누었다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 일요일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식사가 특별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함축하는 것이다. (115.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한편으로는 낙담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분명하게 재확인시켜준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활을 매주일 반복해서 기념하도록 해주는 시사점이 있을 수 없었음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와 환경에서 발생했고, 그리스도께서 음식을 잡수신 사례들은 성찬예식에 의한 일요일 예배를 제정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육체적 부활의 실체를 증명하기 위해서(생선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을 드신 것이었다. (115.2)
 참고문헌
 1)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44. 참고, 15, 20, 25, 27이하, 51이하, 54이하, 77 이하, 88. P. Massi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언급한다. “부활은 일요일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그럴싸한 유일의 설명이다”(La Domenica, 43). P. K. Jewett, Lord’s Day, 57. ‘초기 유대인 교회로 하여금 일요일을 집회의 정규적인 시간으로 정착하도록 이끈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이전에 살펴봤듯이 그것은 분명히 복음서에 나타난 한결같은 증언들에 따라 일주일 중 첫 날에 일어난 부활 사건과 관련을 맺어 왔다.” F. A. Regan, Dies Dominica, 191. “위 본문 연구를 통해 교회 초창기에는 단 하나의 예배를 위한 연회만 존재했으며 이는 매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었다는 합리적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참고, Josef  A. Jungmann, The Early Liturgy to the Time of Gregory the Great, 1959, 19-21. The Mass of the Roman Rite, Its Origin and Development 1951, I, 15. Bishop Cassien, “Le Jour du Seigneur dans le Nouveau Testament,” Le Dimanche, Lex Orandi 39, 1965, 30. Y. B. Tremel, “Du Sabbat au Jour du Seigneur,” Lumiére et Vie (1962):44 이하.

 2) J. Daniélou, Bible and Liturgy, 243. 일찍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주의 날이란 단순히 기독교적 제도일 뿐이다; 그 기원은 안식일 다음 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오로지 그 근거를 두고 있다”(Ibid., 242, 222도 참고하라).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약에서 믿음과 소망이라는 사도 선언의 본질이다. 참고, 행 1:22; 2:31; 4:2, 10, 33; 5:30, 10:40; 13:33-37; 17:18,32; 24:15, 21; 26:8; 고전 15:11-21; 롬 10:9; 1:1-4; 8:31-34; 14:9; 살전 1:9-10.

 4) H. Riesenfeld, “The Sabbath and the Lord’s Day,” The Gospel Tradition: Essays by H. Resenfeld, 1970, 124.

 5) H. Riesenfeld, “Sabbat et Jour du Seigneur,” in A. J. B. Higgins, ed., N. 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 W. Manson, 1959, 212.

 6) S. V. McCasland, “The Origin of the Lord’s Day,” JBL 49(1930): 69. P. Cotton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부활과 관련된 어떠한 발상에서도 예배의 날로써 일요일 준수를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From Sabbath to Sunday, 1933, 79). C. W. Dugmore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일요일을 공중기도와 같은 주된 경우처럼 사도 시대로부터 계속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준수되었던 날로 가정하는 것과, 처음부터 성만찬이 매주 이루어졌던 어느 한 날로 보는 것 중 무엇이 맞는 것인가?”(“The Lord’s Day and Easter,” Neotestamentica et Patristica in honorem sexagenarii O. Cullmann, 1962, 273). 그의 답은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처음에는 주간 행사가 아닌 연중 행사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A.D. 150년까지는 ‘태양의 날’(day of the Sun)에(Justin, I Apology 67) 성만찬을 포함해 예배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정기적 모임과 관련된 어떤 명확한 참고 문헌을 찾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Ibid., 280쪽).

 7) 참고, Joseph A. Jungmann, The Early Liturgy, 1959, 21. W. Rordorf, Sunday, 221. “그러므로 우리는 κυριακή ήμέρα와 κυριακόν δειπνον 사이에서 하나의 내적 연관성이 존 재했다는 것을 추측해볼 만한 모든 근거를 갖춘 셈이다. . 이 ‘주의 만찬’이 있었던 그 온전한 하루는 ‘주의 날’(Lord’s Day)이라는 제목을 부여할 만하다. 사실상 이런 경우라면(그리고 이 결론이 납득할 만한 것이라면), 우리는 바울의 주의 만찬이 일요일에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일요일이 ‘주의 날’로 불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Rordorf는 심지어 사도행전 2장 46절의 “날마다-καθ ήμέραν” 떡을 떼었다는 언급을 어느 한 일요일 밤 기념식이라는 표현으로 줄이려고 한다(Ibid., 225-228). 그는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인 논증에 자신을 자신의 견해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

   (1) 서방 본문에서 “날 마다”라는 표현은 45절로 이동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2) 떡을 떼려고 함께 모인 것은 “성만찬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모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구체적 용어이다.”

   (3) 공동체가 “매일 저녁에 떡을 떼고자 힘써”모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러므로 “떡을 떼기 위해 모인 것은 매일 있었던 일이 아니라 ∙∙∙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일요일 저녁에 모인 것이었다”(Ibid., 227-228).

 C. S. Mosna는 Rordorf의 해석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사도행전 2장 42-46절과 고린도전서 11:20절 이하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성만찬만을 위해 주 단위로 그것을 기념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또한 그 날이 일요일이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Storia della domenica, 52). O. Betz는 Rordorf의 책에 대한 자신의 논평에서 일요일 성만찬에 대한 저자의 강조를 날카롭게 공격한다(JBL(1964):81-83). R. B. Bacham은 사도행전 2장 42-46절이 묘사하는 것은 조의 만찬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식사일 뿐 이었다 강조한다.(The Acts of the Apostles, 195714, 38). J. Daniélou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밤에만 모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모임이 다른 시간에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했다.(Nouvelle Histoiré de l’Église, 1963, I, 42).

 8)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암시는 최후의 만찬의 공관 복음서의 이야기에도 명확히 나타나 있다. 마 26:28; 막 14:22-25; 눅 22:17-20.

 9) E. B. Allo는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주의 만찬을 제대로 관찰해 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생각들이 고린도의 모든 성만찬 예식을 메운다. ∙∙∙ 실제로 그것은 단순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와 믿는 자들이 영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행동’이었다”(Premiére épitre aux Corinthiens, 1934, 296).

 10)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먹던 날 밤에 이루어졌다(막 14:12; 마 26:17; 눅 22:7). 반면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은 그 다음 날, 즉 십자가형이 있던 날 밤에 그 축제를 기념했다(요 18:28; 19:14-31). J. Jeremias는 최후의 만찬이 유대인들의 유월절 때에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설득력 있게 변호한다.(Die Abendmahlsworte Jesu, 19482. 34이후). 나중에는 이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도 당시에 두 가지 유월절 전통이 있었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첫 번째는 제사장 공동체는 니산월 14일에 그 날을 기념했는데, 이 날은 잘 알려지긴 했으나 그 성격이 가변적이었던 음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두 번째는 쿰란 분파들이 희년서에서 옹호되고 있는 364일의 고대 태양력에 따라 수요일에 규칙적으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와 같은 다른 달력 체계가 둘 사이의 유월절을 보낸 날에 대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의 문헌들을 참고하라. B. Lohse, Das Passafest der Quartodecimaner, 1953. J. Van Goudoever, Biblical Calenders, 165, 174, 175. W. Rordorf, “Zum Ursprung des Osterfestes am Sonntag,” Theologische Zeitschrift 18(1962) :167-189. E. Hilgert, “The Jubilees Calender and the Origin of Sunday Observance,” AUSS I(1963):44-51. A. Jaubert, La date de la Céne, 1957. 이 두 가지 다른 달력 체계가 존재한 것은 어느 정도 확립된 사실이기는 하나, 초기 그리스도인들 이 태양신을 숭배했던 이 종파의 달력을 사용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A.D. 1세기경 예루살렘 교회가 성전의 규범 달력을 열심히 따랐다는 암시는 존재한다. 더욱이 어떻게 희년 달력이 성전의 공식 달력과 나란히 사용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설명이 부족하다. 우리는 연중 축제들이 모두 농사의 해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공식 유대교가 달력과 계절이 함께 동시에 움직이도록 필요에 따라 한 달을 윤달로 껴 넣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하루하고도 4분의 1의 날수가 짧은) 계절과 맞게 움직이게 하기 위해 희년 달력에 윤일을 껴 넣었던 것일까? 누구도 이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한다. 35일 혹은 49일을 28년이나 29년마다 껴 넣었다는 이론은 달력에서 한 해의 계절에서 몇 주를 빼야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참고, R. T. Beckwith, “The Modern Attempt to Reconcile the Qumran Calender with the True Solar Year,” Revue de Qumran 7, 27 [Dec. 1970]: 379-387). 그러면 쿰란의 유월절은 공식적인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같은 주에 있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론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지켰다는 그 축제가 성전의 규범 달력의 한 날과 명백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더욱이 왜 공관복음서의 저자들은 쿰란 종파의 달력을 사용했어야 했는가? 누가와 마가는 전통에 따라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았던가? 마태는 로마의 세리가 아니었던가? 어떠한 이유로 그들은 잘 알려지지도 않은 한 종파의 달력을 사용했을까? 참고, William Sanford LaSor은 다음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The Dead Sea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1972, 203-205.

 11) E. Goodspeed는 라틴의 파편들이 A.D. 100년경에 쓰인 원본의 번역이며, Bryennius가 출판한 글은 바르나바스의 축약본을 토대로 A.D. 150년경에 만들어진 확장본에 해당하는것이라고 제안한다(The Apostolic Fathers, 1950, 286), K. Quasten은 그 문서가 만들 어진 시기는 A.D. 100년과 A.D. 150년 사이로,(주입(infusion)에 의한 침례 등) 기술된 법령들의 복잡한 문제들이 안정되기 까지는 일정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Patrology, 1950, I, 36-37). 비슷하게 Kirsopp Lake는 “원래의 ‘가르침’은 2세기 초기였을 것이다”라고 제안한다(The Apostolic Fathers, LCL, 1952, I, 307). Jean Paul Audet는 12사도의 가르침(Didache)은 공간 복음서와 동시에 존재했으므로 A.D, 50년과 7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를 밝혔다(La Didache, Instructions des Apotres, 1958, 219).

 12) E. J. Goodsped, 47.

 13) Clement는 41장에서 다시 성전의 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그분의 봉사의 정해진 규칙들”을 존중해야 할 필요에 대해 다시 반복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매일의 희생제사와 자유로이 드리는 제물들, 또는 죄나 잘못으로 인해 드리는 제물이 오직 예루 살렘에서만 드려지고 있으며, 또한 성지 앞이나 제단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v. 2; Kirsopp Lake, 79). 성전에서의 희생 봉사에 대한 언급들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봉사를 하며 가졌던 큰 존경심과 형식이 축소되기는 했으나 A.D. 70년 이후로도 희생제사가 계속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 K. W. Clark, “Worship in the Jerusalem Temple after A.D. 70,” NTS 6(1959-1960):269-280. J. R. Brown, The Temple and Sacrifice in Rabbinic Judaism, 1963.

 14) 세 교부들의 증언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 VII 장을 보라.

 15)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357. W. Rordorf 또한 반대 논지를 변호하고자 노력했지만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 기초한 일요일에 대한 정당성이 2세기 이전,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매우 희박하게 제시되었다는 것을 합당하게 밝혀낼 수 있다”라고 인정한다(Sabbat (texts), xvi).

 16) “유월절 양”이라는 표현은 성전에서 양이 죽임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갈바리를 암시한다(요 18:28; 19:31). 참고, C. Spicg, Ie Épitre aux Corinthiens, 1969, 20. E. Hoskyns-F. Davey, The Fourth Gospel, 1947, 531. J. Jeremias는 바울이 그리스도를 “유월절 양”으로 언급한 평상시의 방법은 “그와 같은 비교가 고린도 교회에게 이미 친숙한 것”을 의미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πάσκα,” TDNT V, 900), 유월절 희생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동일시하는 것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스스로를 유월절 양에 비유 하셨기 때문에 예수 스스로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초기 교회의 방대한 유월절 예형론의 핵심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인정되어온 부분이다. 참고. J. Bonsirven, “Hoc est corpus meum,” Biblica 29 (1948):205-219. A. Walther, Jesus, das Passalamm des Neuen Bundes, 1950, 38-91. A. J. B. Higgins, The Lord’s Supper in the NT, 1952, 49이하.

 17) W. D. Davies, Christian Origins and Judaism, 연도 불명, 75.

 18) J. Jeremias, 902.

 19) Epiphanius, Adversus haereses 70, 10, PG 42, 355-356.

 20) 두 가지 번역본은 E. Hennecke의 자료에서 대조되어 제시되고 있다(New Testament Apocrypha, 1963, 1, 199). 고린도전서 5장 7절과 11장 26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죽음’에 주안점을 둔 것에 주목하라.

 21) 본 문서는 1940년 Campbell Bonner에 의해 영어 번역을 포함해 그리스어로 처음 출판이 되었다(Melito of Sardes, the Homily on the Passion, with Some Fragments of Ezekiel, Studies and Documents 12, 1940). 현재는 Gerald F. Hawthorne의 인용을 빌린 것이다(“A New English Translation of Melito’s Paschal Homily,” in Current Issues in Biblical and Patristic Interpretation, ed., G. F. Hawthorne, 1975, 147-175).

 22) E. Lohse는 14일주의자(Quartodeciman)의 유월절에는 죽음과 부활을 함께 기념했는데, 이는 Melito가 부활에 대해 몇 차례 언급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E. Lohse, 75). W. Rordorf는 또한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14일주의자의 유월절에 암시되어 있었다고 설명한다(W. Rordorf, 167-168). 그러한 결론은 Melito의 Paschal Honmaily에 의해 타당성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주교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설교 막바지에 제시하고(100, 105절) 있으며, 이는 유월절 기념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난극(the passion drama)의 논리적 결말로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유월절은 희생에 대한 기념으로 여겨졌으며 그리스도의 고통은 Melito의 homily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1) 유월절 양과 그리스도의 희생 사이에 성립되는 상세한 상관관계(1-8절),

   (2) 구약에서의 양의 선택과 희생, 소모와 관련한 절차의 반복(11-16절),

   (3) 양의 피 없이 발견된 애굽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묘사(17-29절),

   (4) 이스라엘의 안전이 “주님의 표상인 양의 희생” 덕분이었다는 설명(30~33절),

   (5) 분명하고도 반복적으로 그 표상을 성취시키는 예표가 그리스도임을 확인시키고 있음(34-45절),

   (6) 유월절이 “고통을 받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단정적인 정의(46절),

   (7) 고통을 겪는 양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57-65절),

   (8) 양의 희생과 동일시되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서술(66-71절),

   (9) 주님을 살해한데 대한 이스라엘의 독설(72-99절).

 실제로 전체 설교는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고통의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부활은 연중 축제가 아니었”으며 14일주의자들 가운데서 유월절은 일반적으로 고난에 대한 회상과 관련이 있었다는 J. Jeremias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Tertulian은 이러한 결론을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월절은 침례식을 베푸는 보통의 엄숙 한 날보다 더 많은 것을 선사한다. 게다가 우리는 주의 고난의 때에 침례를 받고 온전하게 되었다”(On Baptism 19 ANF 111, 678. 참고, Justin Martyr, Dialogue, 72)

 23) Irenaeus는 다음과 같은 비슷한 정의를 내린다. “그분의 수난의 날에 대해 모세 역시 무지하지 않았다; 대신 비유적 방법으로 유월절에 주어진 이름을 통해 그분에게 예언을 했다; 그리고 모세로부터 아주 오래 전에 선언되었던 바로 그 축제에서 우리의 주께서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유월절을 성취하셨다”(Against heresies 4, 10, 1, ANF 1, 473). “유월절-πάσκα”이 어원상으로 “고통 받다-πάσκειν”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는 히브리어에서 “유월절—פסח”“건너뜀” 즉, “피하게 해줌(sparing)”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유월절 축제와 관련된 의식 전체를 나타낼 때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정의가 축제의 기독교적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즉 그리스도의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변증적 논쟁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인가?

 24) “재림(parousia)에 대한 기대는 니산월 15 아침에 시작되는 단식에서 알 수 있듯이 초기 기독교의 유월절 행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Epistle of the Apostles 15).

 참고, J. Jeremias, 902-903.

 25) W. Rordorf, Sunday, 221. P. K. Jewett은 Rordorf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변호했다.(Lord’s Day, 64-67). 또한 P. Massi와 C. S. Mosna는 부활 후 그리스도의 등장이 일요일 기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면서도, 그것이 집회의 시간, 즉, 저녁 시간을 결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P. Massi, Lo Domenica, 40. C. S. Mosna, Storia della domenica, 52-58.

 26) W. Rordorf, Sunday, 233.

 27) Ibid., 234.

 28) Ibid., 233. 또한 Joseph A. Jungmann은 “주의 날”“주의 만찬”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지했다(oseph A. Jungmann, 21). 참고, Bernard Botte, “Les Dénominations du

 Dimanche dans la tradition chrétienne,”
Le Dimanche, Lex Orandi 39, 1965, 13.

 29) Otto Betz, “Review of W. Rordorf Der Sonntag,” in JBL (1964):83. Betzź C. S. Mosna와 달리 관대한 방식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Storia della

 domenica, 52-58).

 30) 사복음서의 집필 시기는 일반적으로 1세기 말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초대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요한이 트라야누스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다(Irenaeus, Against heresies 2, 25, 5; 3, 3, 4; Clement of Alexandria, Eusebius로부터 인용, HE 3, 25, 5). 참고. Alfred Wikenhauser, New Testament Introduction, 1958, 319.

 31) Pacifico Massi는 요한의 기록에 따라(21:1-19) 티베리아스 호수에 나타나신 것은 일주일의 첫 날이었는데, 이는 “안식일 이후에 이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21:1-3)”라고 했다.(La Domenica, 40). 그것이 전적으로 있음직 한 일이 아닐 수 있지만 그러한 추정을 인정할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토요일 밤에 안식일을 보낸 후 고기를 잡으러 갔다(그들은 고기를 잡으며 밤을 지샜다, 요 21:3). 일요일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는 것으로 그날을 의도적으로 준수했다고 여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32) C. S. Mosna, Storia delle domenica, 52.

 33) 사도행전 10장 41절은 또 다른 중요한 예가 되는데, 본문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먹고 마셨다는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환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34) 이 구절에서 “8일이 지나서” 라는 표현은 월요일은 뜻하는 것이 아니다. 8일이라는 명칭과 함께 9장에서도 다룰 것이지만 날을 전부 통틀어 새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참고, R. J. Floody, Scientific Basis of Sabbath and Sunday, 1906, 125-126.

 35) J. Behm, “κλάω,” TDNT III, 728.

 36) S. V. McCasland, 69.

 37) 베드로와 제자들이 티베리아스 호수로 돌아간 때를 무교병 축제 후로(즉 8일 이후) 제시하고 있는 베드로 복음의 시간표는 두 가지 다른 이야기에 대한 가능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참고, W. Rordorf, Sunday,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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