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우리의 구원 (구속론) 제 1 장 하나님의 택하심과 섭리
 여기에 인간의 책임이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지식으로 사람을 부르심으로서 시작하시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옴으로서 응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엄숙히 선언하신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을 유대인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확증한다. 그러할진대 우리는 온갖 정열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개인의 구주로 알도록 노력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는 예수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18.3)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확신이 어디에 있겠는가? 진실된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3)이다. (19.1)
 이중 예정이 아님(No Double Predestination)
 하나님께서는 인류 가운데서 닥치는 대로 소수의 영혼들만 구원받도록 택하였으며, 그 나머지 인류는 정죄를 받도록 예정했다는 사상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 성경에는 “이중”예정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구속적 사랑을 나눠 주심에 있어서 편견이 없음을 보여 준다.(행 10:34; 롬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딛 2:11),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해”(요일 2:2) 돌아가셨다. (요 1:29과 비교하라) (19.2)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는 빛나고 있다. 심판자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는 그때 구원받은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인 선택, 또는 예정인 것이다. 그외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말씀하실 것이다. (19.3)
 “너희 복받을 자들이여—오라”“너희 저주를 받을 자들아, 떠나라”와 대조를 이룬다. 왕국은 영영한 불과 대조를 이룬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왕국이 예정된 것처럼 창세 이후로 저주를 받은 자들을 위해 이 불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해 볼 때 그 대조는 끝나게 된다. (20.1)
 지옥의 불은 단지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준비되었다. (20.2)
 예수께서는 단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님과 구세주로 선택하기를 거절할 때만 마귀들의 운명에 함께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결정은 인간의 책임이다. (20.3)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이”(롬 9:23) 되도록 유대 인과 이방인 모두를 부르셨다.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그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궁극적으로 운명지으심으로 그의 거룩한 분노(holy wrath)를 보여주실 것이다.(롬 9:22) (20.4)
 구원을 위한 예정(Destined to Salvation)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는 우리가 회개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위탁받은 자들에게 바울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롬 2:5, 6).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고 기록했다. 그 마지막 멸망은 하나님의 “비상한 일”( strange deed)로 일컬어 지고 있는데(사 28:21 R. S. V)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진노를 받도록 예정하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였기 때문이다.(살전 5:9) 또 이것은 그의 사명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을 보시고 왜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막 6:6 K. J. V)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특권과 책임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믿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고상한 생애와 경험 가운데서 위대하신 목자를 따르기 위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적 인도로써 그분의 영원한 구원의 계획과 일치하게 세상 역사의 궁극적 결말을 보증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증한다. 어떤 혼잡한 여건이나, 하나님의 연약한 백성에 대한 압력이 아무리 매정하거나 택한 백성의 실망이 어떻하든지 간에,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그의 계획과 거룩한 의논(divine counsel)의 승리를 마련하고 계신다. 전능자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그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그들의 신뢰였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는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의 하나님을 삼는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0-12) (20.5)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게만 모든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믿도록 하였으며, 또 그것의 인도를 받게 하였다. 이방 국가들은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미 4:12)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예지(豫知)로써 미래를 예언하실 수 있으며, 당신의 섭리로써 당신의 절대적인 뜻에 따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통제력을 가지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처음부터 종말을”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역시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고 선언하신다. (21.1)
 하나님의 뜻의 이러한 질서는 세상 역사의 복잡한 움직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에 있을 번영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며 “후일에 될 일을”(단 2:28) 알게 하신다. 아직도 그는 능동적으로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단 2:21) 세우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관망자나 또는 인류가 할 일에 대한 예언자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면서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모사가 명령하고 약속하셔서 지구상에 일어나도록 한 일들을 성취시킨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22.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의 잊지못할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구속과 심판의 강력한 행위로써, 그러나 거개가 민족적 위기마다 자비롭게도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무리를 보내시는 중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22.2)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도 그 본래의 낙원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운 질서로 회복시키실 왕이신 구세주, 곧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거룩한 약속을 끊임없이 명상하였다.(사 11, 35, 65; 단 2:44, 7:27). 특별히 신약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초림에서 “마지막 날” 또는 종말론적 때의 불가피한 도래를 논하고 있다. 누가는 특별한 어휘인 당연히(must—헬라어—“데이”)란 말을 44회나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의 생애와 사업은 우연한 기회나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히브리 성경에 요약된대로 하늘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의도적으로 성취시키신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선지자들의 예언에 비추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말씀하셨다. 모세의 오경, 시편들, 그리고 선지서에 있는 메시야에 관해서 기록된 모든 것들은 “이루어져야”(눅 24:44)한다. (22.3)
 다시 말하자면 예수의 죽으심은 어떤 선지자의 비극적인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마 26:54, 눅 9:22을 비교 하라) 성경에 계시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안에서 생생하게 나타났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마지막 심판의 종말론적인 필요성을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될 때”(고후 5:10)를 최후의 심판으로,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를 그리스도의 통치로,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고전 15:53) 때를 성도의 영광화로 보면서 종말론적인 필연성을 인정하였다. 계시록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최종적 승리를 포함하여 온 우주의 모든 미래적 사건들을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는 언약의 무지개 아래 두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계 1:14:1; 22:6을 비교하라). 하나님의 그 보좌로부터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는 믿을만한 말씀들이 공포되었다. (23.1)
 우리가 하나님께서 친히 활동하시는 미래의 큰 날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그 미래에 대한 눈에 보이는 징조들을 조성하심으로써 활동해 오셨다. 회복된 인류의 교제와 그의 택한 백성 가운데 있는 영적인 교통과 죄인들의 중생, 그리고 모든 진실된 개혁자들과 의(義)의 옹호자들의 출현 등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이라도 “무대의 상부와 배후를 보며, 또한 인간의 이해 관계와 권력과 욕망의 일체의 승부를 통하여 자비심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대리자들이 묵묵히 또 인내성 있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하고 계신것”(선지자와 왕, 477)을 분별할 수 있다. (23.2)
 인간의 최고의 소명(highest calling)은 거룩한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목적에 기꺼이 협력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24.1)
 바울은 “가시채를 뒷발질”(행 26:14)하는 것이 얼마나큰 아픔이 었던가를 발견했다. 욥도 그러한 높은 지혜를 결국 배우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께 “주께서는 무소 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24.2)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관심(God’s Tender Resp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