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2. 그리스도의 위격: 우리의 확증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셨음을 주장하셨다. 그는 자신이 우리의 영혼이 누릴 수 있는 신성한 쉼을 주는 자임을 선언하심으로써 자신의 신성에 대한 자기인식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 29). 이런 구속적인 방식으로 예수께서는 히브리 성서들에 나타난 영적 쉼에 대한 신성한 약속을 성취하셨다 : (34.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2:1).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34.2)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런 메시야적 쉼, 곧 은혜의 쉼을 모든 백성에게—허락하신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정한다.그러나 이들 두 분은 명예와 영광을 위해 경쟁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자신의 연합을 계속해서 인정하셨다. 자신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강조 첨가). 이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확증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이 말씀은 예수를 아는지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의 확증을 가져다 준다. 그렇다면 얼마나 자주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그리고 기탄 없이 알기 위해 부지런히 구해야 할까! (35.1)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연합은 심판, 곧 창조주의 특권을 아들에게 양도하도록 허락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2, 23, 강조 첨가). 하늘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동등한 영예를 가졌다는 예수의 주장을 인정한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큰 소리로 외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35.2)
 만약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신성한 영예와 영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만약 그분 자신이 피조물이었다면 “만물”에 의해 경배를 받을 수 있었을까? (36.1)
 예수는 자신의 성육신 이전에 신성한 영광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5, 24, 강조 첨가). (36.2)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복종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자신의 봉사의 끝이 가까웠을 때,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 진술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6.3)
 아버지의 우월성의 의미를 결정짓는 것은 바로 역사적인 상황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성육신과 고난의 상태의 완료에 대해 말씀하시고,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을 선언하셨다(요 14:2, 28). 그런 다음 그는 그분의 현재의 굴욕을 임박한 높임과 대조하셨다. 그가 만나게 될 아버지는 인간의 모양으로 있는 중보자보다 위대하셨다(참조 빌 2:6-8; 히 5:8). 아버지는 지금—예수께서 아버지께 복종의 상태에 있는 동안—예수보다 우월하시다. (36.4)
 베르카우어는 예수의 신성한 위격과 아버지께 대한 자신의 종속이라고 하는 이 이중성이 “그분의 신성과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복종 사이—그분의 오심과 그분의 보낸 바 되심—의 모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4)는 사실을 주장했다. 같은 날 밤 얼마 있지 않아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언급하시고, 머지않아 그 순간의 자신보다 더 위대한 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 자신의 현 사명을 완수하시면 그는 세상엔 오시기 전에 가졌던 영광을 다시 얻게 될 것이었다(요 17:5). (37.1)
 요한은 예수의 신성을 이렇게 선언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강조 첨가). 바울도 그분의 신성을 선포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강조 첨가). (37.2)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주장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0:30; 14:9). 그가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44, 37, 강조 첨가). 아버지께서는 예수께로 오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구하려는 예수의 소망을 전적으로 인정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37.3)
 영혼은 영생을 하나의 타고난 특성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다. 영혼은 창조주 • 구속주가 그것을 변화시킬 때 이 선물을 “마지막 날”에 받게 된다. 세 번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참조 눅 7:14, 15; 8:53-56; 요 11:38-44). 그가 나사로를 일으킨 것은 유대인의 부활 교리에 대한 마르다의 믿음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부활에 관한 정통 신앙고백 이상의 것을 원하셨다(참조 단 12:2).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진리를 드러내 보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물으셨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26, 강조 첨가). 여기서 우리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 신앙으로의 진보를 본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장 놀라운 주장을 하신다. 그는 죄의 용서들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영생, 곧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도 보증하신다. (38.1)
 요한은 이런 간결한 구원의 확증으로 복음을 요약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강조 첨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얼마나 놀라운 확증인가! 의심하는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그분의 손과 발을 만졌을 때, 그는 놀라움 가운데 고백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따라서 엘렌 화잇의 표현은 적절하다.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牛)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는 자에게 영생에 대한 보증(assurance, 본서에서는 ‘확증’으로 번역함—역자주)이다.”5) (38.2)
 “나는 ∙∙∙ 이다”라는 예수의 말씀
 제4복음(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하신 여러 개의 “나는 ∙∙∙ 이다”라는 진술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이런 표현들에 대해 당황해하는데, 이는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출애굽기 3:14에서 YHWH라는 이름은 ‘나는 ∙∙∙ 이다(éhyeh)’란 동사 형태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적절한 이름으로 이해되고 세 번에 걸쳐 반복되어 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그리고 ‘스스로 있는 자가 ∙∙∙ 보내셨다’(출 3:14, 15).6) 자신을 묘사하기 위해 예수께서 사용하신 절대적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 Egō Eimi)라는 말은 꽤나 도발적이었다. 이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에게 드러낸 신성한 이름과 자신을 사실상 동일시하셨다(출 3:14, 15). 이것은 그분이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였다는 자신의 주장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요 17:6, 26). (39.1)
 또한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언급하기 위해 아니 후(Áni Hu)[“내가 그다”]라는 문구를 여러 번 사용하였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이 문구는 오직 야훼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참조 사 47:8, 10), 이스라엘의 구속주이며 붙드는 자(참조 사 41:4, 43; 43:10-13, 25; 46:4)이심을 나타낸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구약의 자기 칭호인 “나는 ∙∙∙ 이다”“내가 그다”는 이스라엘을 위한 그분의 구속적 사업을 가리키고,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약속이나 재확신이 되었다.7) (39.2)
 예수께서는 자신의 “나는 ∙∙∙ 이다” 진술들에서 그분의 신성한 권위와 구속적 사명을 표현하셨다. 그들 중 얼마는 특별히 그분의 구원하는 사업을 가리키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요 6:35);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다른 진술들에서 예수께서는 술어를 사용하지 않으셨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에고 에이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강조 첨가); 그리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에고 에이미) (요 8:58, 강조 첨가). 이 마지막 두 선언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을 절대적 의미에서—즉 본질적으로 완전한 것으로—사용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에고 에이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강조 첨가). (40.1)
 예수의 말씀의 의미는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믿음을 향해(to faith) 드러나고, 믿음에 의해(by faith) 사용되어야 한다.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야 완전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었다(요 13:19). 예수께서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요 13:20)고 말씀하셨을 때, 이러한 의미를 발전시키셨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 “나는 ∙∙∙ 이다(I AM)”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를 영접하기 위해선 아버지를 영접해야 한다. (40.2)
 필립 하너(Philip Hamer)는 이렇게 설명한다: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