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요한계시록 제2장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어떤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상징들은 계시록에서 그 의미가 밝혀져 있으나(참고 계 1:20; 12:9; 17:9-11, 15),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상징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풍유적인(allegorical) 상상 또는 그 상징들이 가지고 있는 현시대의 의미를 성경 본문에다 집어 넣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계시들의 의미는 그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 계시록을 처음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35.3)
 계시록의 상징들의 의미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 계시록이 거의 2,000년 전 요한의 시대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기록된 것이라는 점이다(계 1:4, 11). 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는 제1세기의 언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계시록을 연구할 때, 애초에 그 계시를 받은 사람들에게 그 상징들이 가졌던 의미를 밝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그의 백성에게 계시들을 주신 시대와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시대와 상황에 맞는 의미를 계시록의 상징들에게 집어넣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36.1)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는 진공 속에서 생긴 것은 아니라, 역사적 실제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상징들은 대부분 구약에서 취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계시록 본문의 약 4분의 3 정도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구약과 연관되어 있다. 미래의 사건들을 기술할 때, 하늘의 감명을 받은 저자 요한은 자주 과거에 사용된 언어를 이용한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는 그분이 과거에 행하신 구원의 행위와 매우 흡사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이 과거에 그의 백성을 위해 하신 일을 미래의 백성을 위해서도 행하실 것이다. 제1세기의 계시록 독자들이 계시록의 대부분의 상징들을 구약의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36.2)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들(symbols)과 영상들(images)의 의미를 풀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구약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여러 상징들—예를 들면, 짐승, 머리, 뿔, 별, 지상의 네 바람, 여자, 일곱 머리를 가진 용, 등—은 그 당시의 유대 묵시적 문서들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어들이 제1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던 용어였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계시록의 이상들은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당대의 그리스—로마식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36.3)
 엘렌 화잇은 “요한계시록에서 성경의 모든 책들이 만나고 또 끝마친다”1라고 말했다. 요한계시록의 많은 구절이 많은 신약의 다른 본문들과 직접적인 평행을 이룬다. 그러므로 신약의 평행구절들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이 책이 주는 기별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얻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37.1)
 독자들에 대한축복(1:3)
 요한계시록은 읽는 자와 듣는 자들에게 특별한 축복을 약속한다(계 1:3). 여기서 말하는 “복이 있다” 또는 “복되다”(“blessed”)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마카리오스(makarios)인데, 이 단어는 “행복하다”(“happy”)라는 뜻이다. 이 그리스어는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팔복(마 5:3-12) 가운데 사용하신 단어와 동일한 것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물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깊은 내적 기쁨을 가리키며(요 16:22), 이러한 축복은 충성된 자들이 인생의 어려움들을 이기고 올라서게 한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에게는 이 예언의 말씀에 명시된 교훈들을 지킬 때 특별한 행복이 주어지리라고 약속되었다. (37.2)
 이 본문에서 “읽는 자”(“the one who reads”)는 단수이고, “듣는 자들”(“the ones listening”)은 복수인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이 계시록을 교회의 공중 앞에서 낭독했음을 시사한다. “듣는 자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해설해 가면서 낭독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회중이었다. 이리하여 계시록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개인들이 계시록의 예언들을 듣는 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광경을 상상하게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 책이 소수의 사람들만이 연구해야 하는 책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책은 믿는 자들 모두가 연구해야 할 책이다. 믿는 자들이 이 계시록의 예언들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할 때에 그 결과로 큰 축복이 그들에게 내릴 것이다. (37.3)
 삼위(三位)를 언급한 요한의 인사(1:4-6)
 요한계시록은 본래 편지 형태로 기록되었다. 이런 편지 형태에는 그 당시의 관습을 따라서 그 서두를 세 가지 요소로써 시작한다. 그 첫째는 편지를 보내는 이와 받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소개한다.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 1:4). 요한은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다. 요한은 로마제국의 아시아 도(오늘날의 터키의 남서부)에 있는 일곱 지방의 그리스도 교회에 편지를 썼으며, 이 일곱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를 파멸시키려고 위협하는 비참한 영적 상태에 처해 있었다. (38.1)
 요한계시록에서 이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교 시대에 존재해 온 교회를 상징한다.일곱이라는 숫자도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충만함과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이다. 이리하여 요한계시록이 원래 그 일곱 교회에게(to) 보내진 편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교 시대를 내려오면서 존재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for) 기록된 것이기도 하다. (38.2)
 이 편지 서두의 둘째 부분은 초기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편지에서 관행으로 사용되던 인사말을 쓴 것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참고 롬 1:7; 벧전 1:2). 이 구절은 그 당시 관례적으로 쓰이던 그리스어 인사말인 카리스(charis, “은혜”)와 히브리어 인사말인 “샬롬”(shalom, “평강”)을 합친 것으로 되어 있다. 신약에서 “은혜와 평강”이란 표현은 보통 인사말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 두 단어의 순서를 보면 항상 “은혜와 평강”이고, “평강과 은혜”라고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2 그 이유에 대하여 브루스 M. 메츠거(Bruce M. Metzger)는 지적하기를 은혜(grace)는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호의(好意, favor)이며, “평강(peace)은 그 결과로 따라오는 영적 안녕(spiritual well-being)의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3 (38.3)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은 신성(Godhead)의 삼위(三位, three Persons)이시다. 처음 언급된 분은 아버지 하나님, 즉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 1:4, 8; 참고 4:8)이시다. 이 세 부분으로 된 칭호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는 말씀의 메아리이며, 이것은 구약의 언약 이름인 “여호와”의 의미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심을 가리킨다(출 3:14). (38.4)
 신성의 삼위일체의 둘째 분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계 1:4)으로 일컬어지셨다(참고 4:5; 5:6). 이 이름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하심을 의미한다. “일곱 영”“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배경은 이사야 11:2의「70인역」(Septuagint, B.C. 3~2세기에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에 나오는 성령의 일곱 가지 칭호이다(“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경건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4스가랴 4장에서 일곱 등잔은 성령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완전한 활동을 상징한다(슥 4:2).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영”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일곱교회와 병행한다. 이리하여 이 구절은 교회가 그의 사명을 성취할수 있도록 그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충만함과 완전함을 의미한다. (39.1)
 삼위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분은 삼중의 명칭으로 일컬어졌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계 1:5a)이다. 이 삼중의 칭호는 시편 89편에 기록된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윗 계통의 왕(그리스도)이 야훼의 장자(長子, 먼저 나신 자)가 되고, 세계의 임금들의 으뜸(머리)이 되며, 야훼를 위한 확실한(충성된)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다(시 89:27, 37).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예수님의 이 세 가지 칭호들은, 예수님의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칭호들과도 상응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충성된 증인으로 사신 덕분에 장자가 되는 영예를 얻었고, 하늘과 땅의 모든 정사와 권세 위로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영광을 받으셨다(엡 1:20-22; 벧전 3:22). (39.2)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어떤 분이신가를 밝힌 후에 이제는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를 기술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계 1:5b-6). 이와 같은 예수님의 하시는 삼중의 활동은 위에서 말한 예수님의 세 가지 칭호들과 상응한다. 그가 성경 원문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인데, 이것은 계속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이 사랑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똑같이 아우른다. 우리를 사량하시는 그분은 그의 피로 인하여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해방했다”(“loosed”)는 동사의 시제가 단순과거(aorist)인데, 이것은 그 동작이 과거에 완결된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셨음을 의미한다. (39.3)
 요한계시록은 우리들에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 되는지를 말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계 4:6; 참고 5:9-10).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것 덕분에 구속받은 자들이 누리게 될 신분이다. 이러한 신분은 원래 고대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출 19:5-6). 그러나 고대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역할을 행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그 특권과 칭호는 이제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 교회에게 주어졌다(벧전 2:9-10). (40.1)
 미래에 이루어질 약속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이 특권은 이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사랑때문에, 구속받은 자들은 이미 “나라와 제사장”의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올려졌다(계 5:9-10). 바울은 구속받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게 된다고 설명한다(엡 2:6). 우리가 그와 같은 신분으로 높여지는 동안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지라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40.2)
 요한계시록의 요지(1:7-8)
 서언을 종결하면서 요한은 이 편지의 요지(keynote)인 위엄과 영광 중에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는 다니엘 7:13(“구름을 타고 와서”)과 스가랴 12:10(“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감람산 위의 강론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올” 것과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마 24:30)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께서 다시 오겠다고 하신 약속뿐만 아니라 성경의 예언에 근거한 것임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였다.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