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을 내밀라 제 1 장 믿음을 활용하여 치유 받은 기적들 기적 2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본문 : 막 1:40-45, 참조: 마 8:2-4, 눅 5:12-15
 의학 용어로 한센 씨 병(Hansen's disease)이라 일컫는 문둥병은 그 불치성(不治性)과 전염성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무척 괄시받는 매우 흉측(凶測)한 병이다. 오늘날 의학이 아무리 최고로 발달했다 할지라도 현대 인술로는 문둥병을 도저히 완치(完治)시킬 수 없으며 단지 초기 증세만 치유할 수 있을 따름이다. 몸 속에 침투한 나병균(癩病菌)은 세포 조직을 파괴하여 뺨 눈썹, 코, 귀에 결절(結節)이 생기게 하고 관절을 녹여 손가락 발가락을 떨어져 나가게 한다. 또한 신경을 죽이고 힘줄을 당겨 손가락을 오그라들게도 한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일지라도, 진물나고 일그러진 문둥이의 흉측한 몰골을 쳐다보면 십중 팔구(十中八九) 공포로 떤다. 어떤 문둥이에게 처음의 문둥병 증세가 어떠했는가를 물어 보았더니 최초에 작은 반점(斑點)이 피부에 생겼고 그것이 점점 썩어 고름이 나왔다고 했다. 얼마 안되어 눈썹이 빠지고 일부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며 신경이 죽고 힘줄이 줄어들므로 손발이 오그라들더니 뭉쳐졌고 결국 전신이 비참하고 추악한 몰골로 변하더라고 했다. 문둥병은 참으로 무서운 불치병이다. (22.1)
 성경 시대에 문둥병의 감식자(鑑識者)는 제사장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문둥병 진단을 정확히 할 수 있도록 문둥병의 다양한 종류에 대해 세세히 계시해 주셨다(레 13:18-46). 먼저 종기에 의해 발생하는 문둥병에 대해 “만약에 하얗게 돋아난 종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보다 우묵한 상태로 번지면 이것은 문둥병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화상에 의해 발생하는 문둥병에 대해 “화상에 의해 덴 곳에 흰털이 나고 움푹 살이 패다가 온몸으로 번지면 그것은 화상의 상처에 의한 문둥병이니”라고 하셨다. 옴에 의한 문둥병 발병은 “누구든지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머리나 턱에 생긴 상처 부위가 주위 피부보다 우묵하고 그곳의 털이 노랗게 가늘어지면 문둥병으로 판단할지니라”고 하셨다. 다음으로 대머리에 생긴 문둥병은 “단순히 머리의 특정한 부분의 털이 빠지는 것을 넘어 빠진 머리털 부분에 희고 불그스름한 반점이 발견 될 경우 문둥병으로 판단하라”고 하셨다. (23.1)
 성경 시대에 문둥이들은 거의 죽은 자로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만일 문둥병에 걸리면 천병(天病) 혹은 천형(天刑)이라 하여 죄의 벌로 생각하고 저주했으며 빈부 귀천 막론하고 누구든지 감식자인 제사장으로부터 부정하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때부터 문둥이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하게 여겨졌다. 결국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홀로 진밖에 거주해야만 하였으며 그러다가 버림받은 문둥이들만의 사회로 가서 집단으로 생활해야 하였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일단 문둥병에 걸리면 예외는 아니었다. 성경은 문둥이에 관한 율법을 기록하기를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 살지니라”(레 13:45-46)고 했다. (23.2)
 만일 문둥이가 사회에 나오게 될 때에 이 율법에 따라 멀리서 사람이 오는 인기척만나도 “부정하다 부정하다” 슬픈 음조(音調)로 목청껏 소리질러야만 했다. 그런 애절한 절규가 들릴 때는 누구든지 전율하며 피신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성벽이 있는 도시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았다. 실로 문둥이들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 냉대와 고통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참담한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23.3)
 오늘날 한국 사회도 문둥이에 대한 생각은 성경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만일 누구든지 문둥병에 걸리면 가정과 친척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버림받고 외딴곳에 격리되어 생활해야만 한다. 진성(眞性) 나환자들은 소록도에 격리돼 생활하며 음성(陰性) 나환자들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전국에 110여 개의 마을이 있다. 과거 문둥이들에게 선거권이 없던 시절이 있었으며, 버스 운전사는 그들을 태워 주지도 않았고, 기차역에서는 그들에게 기차표도 팔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실로 그들은 살았으나 마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생애를 살았던 것이다. 만일 아기들의 간을 빼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설화(說話) 때문에 실제로 문둥이가 아기를 훔쳐 잡아먹는 예가 많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더욱더 소외되었다. 서정주 씨는 1936년 이러한 관행(慣行)을 빙자하여 “시인 부락”이라는 창간호에 다음과같은 시를 남겼다. (24.1)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24.2)
 예수님 당시 치명적(致命的)인 문둥병에 걸려 가족과 친척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완전히 격리돼 외롭게 생활하던 한 문둥이가 있었다. 손가락과 발가락 관절이 나균(癩菌)에 의해 녹아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갔으며 눈썹은 빠져 다 없어졌고 얼굴은 결절(結節)돼 찌그러졌다. 자신의 흉한 몰골을 보며 썩어 가는 지체를 만질 때마다 문둥병의 불치성에 전율하며 한없이 신세(身世)를 한탄했다.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는 법이다. 절망 속에서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이 문둥이는 어느 날 희한한 소문을 듣게 됐다. 예수라고 하는 분이 저 갈릴리 지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온갖 병자를 다 고치는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고 뛰게 하였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셨다는 희소식(喜消息)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문둥이의 마음에 그야말로 한 가닥 희망이 해처럼 밝게 떠올랐다. “만일 나도 예수님께 가서 치유를 호소하면 틀림없이 문둥병을 고쳐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겼다. 지금까지 문둥이가 한 번도 나은 적이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희귀한 믿음이었다. 의사나 가족 그리고 허다한 사람들이 문둥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은 자로 저주하고 자기들에게 접근도 하지 말라고 내쫓아 버리던 시대에 “내가 만일 예수님께 가면 그분은 결코 나를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그냥 거절당한 일이 없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문둥이에게 치유의 소망이 솟았고 결국 예수님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24.3)
 이곳 저곳 수소문(樓所聞)해 보니 주님은 아름다운 갈릴리 호숫가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는 도저히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둥이가 보통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접근하기란 그 당시의 사회적 제약이나 율법으로 볼 때 참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그렇다고 치유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곰곰이 생각한 후 마치 공비(共匪)가 추격병을 피하여 도망다니듯 예수님께 접근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아 호숫가로 나아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정신없이 말씀을 듣고 있었다. ‘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헤치고 나가 예수님 앞에 치병의 소원을 아뢸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같아 보였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절름발이를 고치시고 소경을 보게 하며 중풍 병자를 완치시키고 계셨다. 다 죽어 가던 자들이 예수님의 (25.1)
 안수(按手) 하심으로 완쾌되어 기뻐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문둥이의 마음에도 치유에 대한 강한 욕망이 일어났으며 자기도 예수님께 나가면 결코 거절당하지 아니하고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실로 하늘이 준 천금 같은 기회였다. (25.2)
 “나도 주님 앞에 나아가 치유해 달라고 아뢰어야지.” (26.1)
 그렇게 굳게 결심한 문둥이는 용감하게 군중 속을 걸어 헤쳐 나아갔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26.2)
 “야 문둥이다.” (26.3)
 문둥이의 참혹한 얼굴을 본 사람들은 무서워 피함으로 길이 열렸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돌을 던지는 자도 있었고 침을 뱉는자도 있었다. (26.4)
 “에끼, 이 더러운놈 저리 꺼져.” (26.5)
 “더럽다 퉤.” (26.6)
 그러나 그 많은 저주와 방해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는 문둥이의 행진을 멈출 수 없었다. 조롱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고 문둥이는 오직 힘차게 전진했으며 비난과 저주의 말도 괘념치 않았다.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침뱉음을 당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그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문둥이는 예수님 계시는 곳에 거의 왔을때 있는 힘을 다해 마구 달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절하게 부르짖었다. (26.7)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26.8)
 그는 그냥 고쳐 달라고 떼를 쓴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신적(神的)인 권위를 전적으로 인정하여 치병을 그분의 뜻과 자비하심에 맡긴 것이다. 꿇어 엎드린 것은 자기를 한없이 낮춘 최선의 겸손 표시였고 이를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묘사했다. 문둥이는 돌에 맞아 피가 흐르는 채, 더러운 침이 몸 이곳 저곳에 묻은 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엎드려 절박한 심정으로 치유를 간구한 것이다. (26.9)
 문둥이만 나타났다면 전염될까바 욕을 하며 쫓아내고 저주를 퍼붓던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진물나고 결절된 아주 흉측한 문둥이를 민망히 여기어 당신의 손을 내밀어 그에게 얹으시는 게 아닌가! 돌에 맞아 흐르는 얼굴의 피를 당신의 손으로 닦으시고 침 뱉음을 당해 만신창이(滿身瘡庾)가 된 문둥이를 위로하셨다. 오, 주님께서 산송장 취급받던 진물나던 문둥이에게 당신의 깨끗한 손을 얹어 위로하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과 동정의 모습인가! 그것은 문둥이를 취급하는 유대인의 관행(慣行)을 완전히 파기하신 놀라운 행동이었다. 드디어 주님께서는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치유를 선포하셨다.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