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히브리서 서문 서론-히브리서
 히브리서의 목적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글을 “권면의 말”(13:22)로 부르고 있다. 그는 신학적 논설이 생활과 격리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구조에 대한 우리의 연구가 그 점을 잘 보여 주었다. 신학과 적용은 피차에 잘 들어맞는다. 신학적 논증은 적용을 돕고, 적용은 논증에서 비롯된다. (18.5)
 그러므로 우리가 최선으로 이해하는 히브리서는 설교이다. 모든 훌륭한 설교가 그렇듯이, 목사는 눈에 보이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어떤 영적 필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는 백성들에게 열변을 토하는 것은 아니며, 설교는 하나의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권고는 그것이 성경의 토대와 신학적 사유(思惟)에서 나올 때에만 효력을 지닌다. (19.1)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설교에서 설교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적용들이 우리들에게 해답을 제공해 준다. 우리가 각 구조하에 있는 구절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회중들 중에 있는 잘못들과 그 백성들의 잘못들을 보고서 설교하는 설교자의 권고를 배운다. 그 모든 것에서부터 우리는 그 백성들의 영적 측면들을 매우 명백히 볼 수 있다. (19.2)
 그들은 상당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었고 사도들의 설교와 성령의 선물들과 관련된 이적들을 회상할 수 있었다(2:3-4). 그들은 신앙의 초년에 모욕과 박해, 심지어는 재산 몰수도 당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투옥된 사람들과 함께 입장을 같이했다(10:32, 34). (19.3)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점차 지쳐 있었다. 그들은 그저 물결치는 대로 시류에 휩싸여 떠내려가는 것처럼 느꼈다(2:1). 그들은 신앙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2:2). 그들은 불신으로 향한 유혹을 느꼈다(3:2-14). 죄의 기만이 그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기 시작했다(3:13-16). 그들은 영적으로 자라나는 일에 실패했다(5:11-14). 그들은 점차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중단했다(10:25).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했을지도 모른다(6:4-6; 10:26- 31; 12:15-17). (19.4)
 그러므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점차 공동 사회로부터 그들을 떠나게 만드는 피곤(weariness)이거나 마음 속에 잠식한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그 백성들에 대한 그들의 고의적이고도 공개적인 거절(rejection)이다. (19.5)
 설교자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히브리인들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측면들이 놀라울 만큼 닮았다. 문제에는 상응하는 “해결”이 있는 법이다. 설교자는 그 백성들에게 정신을 차리라(2:1), 단단히 붙들라(3:6, 14; 10:23), 잡으라(4:14; 6:18), 열심을 내라(4:11; 6:11), 생각하라(3:1), 피차 권면하라(3:13; 10:25; 13:19, 22), 상기하라(10:32), 그리고 참으라(10:36; 12:1)고 권고한다. (19.6)
 그러나 유지되어야 할 위대한 특징은 믿음이다. 믿음은 예수님과 모세의 생애를 특징지었고(3:2), 믿음의 결핍으로 이스라엘은 실패했다(4:12). 옛 믿음의 영웅들은 육체의 고난들을 극복하였고, 믿음으로 유혹도 이겨내었다(11:1-39). 그러므로 일세기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이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 권고들은 신학에서 비롯되고 있고, 그 신학은 예수님의 탁월성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업에 모아지고 있다. “이같이 큰 구원”(2:3)—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게 될 구원이다. 만일 지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주님의 모습을—그가 누구이며, 그가 갈바리에서 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의 하늘 봉사가 무엇인지를—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믿음을 소홀히 하거나 거절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들은 새롭게 되고, 부흥되고,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20.2)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20.3)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들
 1. 예수의 탁월하심은 이 책의 사상의 양식들(patterns)을 지배하고 있다. 모든 적용들은 이 진리로부터 솟아 나오고 있고, 그것들은 설교자가 그의 양들을 한 데 묶어 두려는 그의 관심사만은 아니다. 예수! 그분은 오로지 탁월하신 한 분—그의 인격에서 탁월하시고 그의 사업에서 탁월하신—이시다. 히브리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책과는 달리 예수님의 모습을 대제사장으로서 발전시키고 있다. 이밖에 다른 곳으로는, 로마서(8:34), 요한일서(2:1-2) 또는 요한계시록(1:12-2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사상이 희미하게 암시되거나 넌지시 시사되고 있으나,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이 사상이 체계적으로 논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17-18; 4:14-5:10; 6:20-8:2). (20.4)
 그러나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다른 모습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대제사장의 모습만큼 그렇게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들이다. 예수님은 생애의 고난과 시험의 과정을 거치신 개척자(開拓者, pioneer)이시다(2:10; 12:2). 그분은 또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우리의 믿음의 사도(使徒, apostle)이시며(2:1); 하늘 궁정에 먼저 가신 전주자(前走者, forerunner)이시다(6:20). (21.1)
 2. 예수 안에서의 온전한 보증. 멸시받고 박해받는 소수(少數)였던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의식들 이상의 특권들을 가지고 있었다(단지 그들이 그것들을 볼 수만 있었더라면!). 주 예수께서는 참 대제사장이셨으며, 그분은 지상 성소가 희미하게 반영하는 참 성전—하늘 성전에서 봉사하셨다. 자신을 갈바리에서 드리신 그분의 희생은 모든 동물의 희생이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을 한번에 이루었다—그것은 죄의 정결을 단번에 이루었다. (21.2)
 이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죄로부터 정결케 된 양심을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간다. (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21.4)
 3. 하지만, 는 지극히 심각한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안에서 절대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이 죄를 가볍게 다루게 하지는 않는다. 죄는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써 값을 치르게 한다. 그 값이 엄청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여타의 방식의 의식들과 희생 제물들이라 할지라도 죄의 용서를 가져올 수 없었다(9:6-10; 10:1-4). 이러한 피의 희생 제물들은 예수께서 그의 죽으심으로 이루시게 될 것의 표상들과 그림자들에 지나지 않았다(10:1-2). (21.5)
 눈에 띄는 세 구절(6:4-6; 10:26-31; 12:15-17)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소홀히 하거나 거절하는 일의 심각성에 대하여 터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어조가 매우 강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의 의미에 대하여 초기부터 논쟁을 벌여 왔다. 이 세 구절에 나타난 요점은 동일하다. 즉, 예수님과 그의 사업의 탁월성에 비추어 그분과 그의 구원하시는 피를 저버리는 일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2.1)
 4. 순례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생애 또한 히브리서를 관통(貫通)하고 있다.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였다. 그들은 이 땅의 쾌락 너머를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떠한 고난과 모욕과 난관을 직면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더 나은 나라의 시민임을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같이 그들은 지상에서의 그들의 삶이 그들의 목표-하늘 예루살렘(11:13-16)으로 가는 도상(途上)의 하나의 거류민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