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4 장  안식일에 재현되는 십자가의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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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구속: 창조 사건의 비밀
 안식일은 창조 사건의 재연과 재현일 뿐만 아니라 재창조의 재연이며 재현이다. 재창조의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현존에 일차적으로 연관된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은 여자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새 사람이다. 안식일이 이 두 번째의 창조를 기념하지 않는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안식일은 그리스도인을 창조한 창조의 기념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47.1)
 그런데 재창조는 첫 창조의 반복이라는 성격보다는 하나님의 첫 창조 사건의 또 다른 깊이와 또 다른 국면을 역사에 들어낸 사건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은 첫 번째 창조 사건의 감추인 그 내면적 비밀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창세기 1장 26, 27절의 기사가 인간의 창조에 수반된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적인 사랑을 전달하는 데에 크게 미흡하였고, 이 부분이 창세기 2장 7절의 기사로 보완되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안식일이 창조 사건을 기념하고 재연해야 한다면, 그리고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창조의 사건을 재현코자 한다면, 마땅히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인간을 창조한 창세기 1장 26, 27절의 사건 못지 않게 하나님의 많은 수고와 낮아지심과 희생의 사건인 창세기 2장 7절의 사건이 재연되고 재현되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열왕기하 4장 34절에 소개되고 있는 엘리사의 경험을 빌리어 창세기 2장 7절의 하나님을 사실적으로 조명했었다. (47.2)
 그러나 인간 창조의 진정한 사건은 창세기 2장 7절의 묘사로도 완전히 드러났다고 할 수 없다.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 “다 이루었다”는 선언을 하나님의 입으로 직접 들은 것은 창세기 1장나 2장의 사건에서가 아니었다. 우리가 창조 행위의 종결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듣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창조주간이 필요했으며 또 다른 제6일의 끝에 서야했다. 이는 곧 그리스도 수난 주간이라는 이름의 창조주간이며, 성 금요일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제6일의 끝이다. 십자가상의 “다 이루었다”는 선언을 들은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인간 창조가 말씀의 능력이며, 진흙으로 낮아지심이며, 진흙을 빚으심이며 흙 사람의 입에 호흡을 불어넣으심이며,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전반적 인식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의 “가라사대” 하심과, 하나님이 손으로 흙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 그 자체 그대로가 하나님의 종의 형상을 취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에 다름 아니었다는 깨달음에 다다르게 되었던 것이다. (48.1)
 실로 수난 주간의 금요일 없이는 창조주간의 제 6일이 다 밝혀지지 않으며, 겟세마네의 고뇌와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사람의 코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깊이와 넓이가 다 드러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는 행위는 만물 중에 그의 말씀과 사랑에 반응하는 한 “아들을 낳는”(시 2:7) 경험이며, 이로 인하여 만유를 함께 모아 크게 잔치하는 일(욥 38:7)이면서 동시에 하나밖에 없는 친 “외아들을 내주시는”(마 16:34) 경험이었으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는”(눅 23:44) 사건이었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깊은 의논과 교제가 발전하는 경험(창 1:6, 7)이면서,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마 27:46) 것 같은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마른 흙 같은 인생을 목마름 없는 생명의 강으로 인도하는 행위이면서, 그 자신이 “목마르고” 사망의 “신 포도주”를 마시는 경험이었다(마 27장). 진흙의 사람이 흡입하고 생령으로 살아나게 된 그 호흡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시고 영혼이 돌아감”으로써(요 19:30) 우리에게 돌아온 호흡이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숨진” 호흡을 보기까지는 하나님이 흙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그 숨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기까지는 태초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이 우리에게 미처 드러나지 못했던 것이다. (48.2)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능력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데에 익숙해 왔다. 십자가의 재창조와 더불어 우리는 창조 사건의 진정한 깊이, 곧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의 깊이, 그리고 그 창조적 숨과 쉼의 깊이를 보게 되었다. 안식일에 재연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십자가의 깊이를 가진 창조 사건이 되어야 하고, 안식일에 재현되는 우리의 창세기적 호흡은 마땅히 십자가의 깊이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안식일에 재창조의 사건을 재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삶은 십자가의 깊이를 가진 생명과 삶이어야 한다. (49.1)
 십자가 희생의 적그리스도적 왜곡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신(神)의 죽음에 대한 이교의 거짓된 신화로 말미암아 크게 왜곡되어 왔다. 그리스도교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십자가 희생에 대한 이교적 왜곡이야말로 적그리스도적 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아니할 수 없다. (49.2)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과 재창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이란 이름의 신처럼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신이 아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계 12:3)라 한 신이 아니다. 이 신은 하늘에서 내어쫓긴 신이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 하였다. (49.3)
 하나님은 일곱 머리의 목숨, 열 뿔의 목숨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다. 일곱 머리의 신, 열 뿔의 신은 머리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또는 뿔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일곱 “머리의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았지만 나았다”(계 13:3)고 했다. 머리 하나가 잘린 것은 상한 것일 뿐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죽었다가 부활한 것인 줄 알고 “온 땅이 이상히 여겨 그 짐승을 따랐다”(계 13:3). 이것이 짐승의 대미혹이고 기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한 거짓 구세주의 연출이다. 짐승은 일곱 머리의 하나를 잃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의 하나를 내주는 희생은 진정하고 근본적인 희생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가장할 수 있으나 그 죽음이 하나님의 대속의 죽음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이리가 양의 가죽을 입을 수는 있으나 양의 가죽을 썼다고 해서 진정한 양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50.1)
 진실로 이 짐승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실로 이 짐승은 죽을 수가 없는 짐승이다. 죽을 수 없으니 부활도 못하는 짐승이다. 단지 상하여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요, 죽었다가 부활한 것처럼 보일 뿐인 짐승이다.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다. 머리를 자르고, 뿔을 없이 하여도 잡초의 뿌리처럼 수 없이 많은 머리와 뿔이, 수 없이 많은 머리와 뿔 같은 목숨이 살아 남아 있는 짐승이 이 짐승이다. 일곱이니 열이니 하는 숫자부터가 상징적 암시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짐승은 죽고 한없이 죽어도 여전히 죽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고 가르치는 영혼 불멸의 거짓 종교를 상징하는 신의 명칭이다. 사람의 목숨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 하는 종교, 사람의 목숨은 일곱 머리요 열 뿔이라고 가르치는 종교, 그리고 그 신의 목숨도 일곱 머리요 열 뿔이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바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짐승이다. 일곱 머리와 열 뿔로 말미암아 결코 죽을 수가 없는 신, 절대로 자기를 희생할 줄 모르고 희생할 수 없는 신, 오직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의해서만 죽고 없어질 신이 바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짐승이다. (50.2)
 그런데 이 짐승의 종교가 갖는 적그리스도적 특성은 짐승의 신이 자신을 죽음과 부활의 하나님으로 가장시켜 세상 사람들을 기만한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짐승의 으뜸 되는 적그리스도적 활동은 십자가의 하나님을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신으로 오해시킨 그 기만적 행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곱 목숨이나 열 목숨의 하나를 버렸거나 상하게 된 사실쯤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십자가의 구속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적그리스도적 운동의 핵심이 아닐 수 없다. (51.1)
 위험 부담이 없는 희생,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희생은 희생이 아니다. 땅 짚고 헤엄 치는 것은 헤엄치는 것이 아니다. 위험 부담이 적은 희생, 치명적인 것이 아닌 희생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다. 심하게 부상을 당하는 희생도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다. 온전한 희생, 치명적인 희생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이다. 참으로 죽는 것이 아니면 죽는 것이 아니다. 목숨이 하나뿐인 자의 죽는 것이 아니면 참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진정한 죽음이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부활도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목숨이 하나뿐인 자의 진정한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진정한 죽음에서 진정으로 다시 살아난 진정한 부활이었다. 우리는 이 죽음과 이 부활을 믿고 있으며, 사도들과 교부들과 개혁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교리의 수호를 위해 싸웠다. (51.2)
 십자가에서 숨진 하나뿐인 숨과 우리의 되찾은 안식일
 하나님에게는 친아들이 하나뿐이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내주셨다. 그 아들을 내주심으로써 그는 모든 아들을 내주셨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목숨이 하나뿐이다. 그 하나님은 그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모든 목숨을 내놓으셨다. 십자가의 하나님은 여러 머리 중에 한 머리가 상하여 죽게 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혼이 돌아가신” 것이었다(요 19:30). “영혼이 돌아가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죽으신 것이다. 영혼이 떠난 그 머리와 몸은 장사됨으로써 그의 죽음은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었다. 십자가 하나님의 희생은 완전한 희생이었다. 이런 것을 우리는 희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에 수반되었던 희생이,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감추어져 있던 희생의 비밀이 이와 같았다. (52.1)
 목숨은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인간에게도 하나뿐이라는 것이, 그래서 천하를 준다 해도 내줄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그리스도교의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의 다시 사는 생명은 십자가와 단두대에서 다 죽지 않고, 다 잘리지 않고 살아 남아 있던 여섯 머리와 아홉 뿔의 목숨이 아니다. 참으로 하나뿐인 목숨이 죽고 다시 살아난 목숨이다. (52.2)
 죽음 후에는 남아 있는 목숨이 없다. 다 죽거나 다 살거나가 있을 뿐이다. 죽고도 남아 있는 목숨, 다쳤을 뿐이고 상했을 뿐이며 죽지는 않았던 여러 머리와 여러 뿔 같은 목숨 즉 불멸하는 영혼 같은 목숨은 없다. 영혼 불멸의 교리는 거짓 교리이다. 짐승의 교리이다. 적그리스도의 교리이다. 그 주장 때문에, 그리고 그 기만 때문에 적그리스도적 종교가 된 교리이다. 이 거짓된 영혼 불멸의 교리와, 그 종교와 그 신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일곱 머리와 열 뿔의 끔찍스러운 짐승이다. 십자가의 하나님을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신으로 왜곡시키고 그리스도교를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종교로 왜곡시키는 것이야말로 적그리스도적 행위이며 그 모습이다. (52.3)
 사람에게는 목숨도 하나요 삶도 하나이다. 사람의 삶은 지상에서 연옥으로, 연옥에서 천당으로 무진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삶은 밑도 끝도 없이 죽었다가 환생하고 다시 죽었다가 다시 환생하기를 거듭하는 것도 아니다. 죽으면 삶도 끝난다. 한번의 생명, 한번의 삶이 있을 뿐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들의 거처이거나 한번의 생명 그대로 죽지 않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거처일 뿐, 죽었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불타고도 다 타지 못한 부지깽이 같은, 이른바 불멸하는 영혼이라는 이름의 생명들이 들어가는 거처가 아니다. (53.1)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죽을 수 없는 신들의 죽은 것 같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하나뿐인 목숨의 죽음이었다. 그의 이같은 죽음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뿐인 목숨이 구원되었다. 우리의 재창조를 위해, 아니 우리의 첫 창조를 위해 희생된 창조주의 목숨이 바로 하나뿐인 목숨이었다. (53.2)
 우리의 숨쉼을 위해 십자가에서 “거두 신” 하나님의 “숨”이 그의 하나뿐인 목숨이었던 것이다. 안식일은 이 희생을 기념하고 그 희생의 창조를 재현하는 날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의 현존과 구원받은 우리의 숨과 쉼이 안식일에 재현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더욱 확실해지는 날이다. 6일의 삶을 통하여 기진한 우리의 호흡은 안식일의 숨쉼을 통하여 창조의 호흡으로 회복될 뿐만 아니라 창세기 호흡의 십자가적 차원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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