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와 때의 징조
 주지하다시피 이른바 밀러운동이라고 하는 19세기 미국의 재림운동은 성소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부터 출발하였다. 다니엘 8장 14절“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 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에서 재림운동은 출발되었다. 다니엘 8장 14절의 핵심은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에게 있어서 재림은 “성소가 정결해지는 때”이다. 성소가 정결해지는 것이 새 세상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소를 정결하게 하려고 오시는 분”이시며 이 땅에 새 세상을 세우려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소는 정결하게 되고 이 땅에 새 세상이 서는 것이다. (494.1)
 히브리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재림신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은 성소이다. 그 성소가 예루살렘의 성소가 되었던지, 히브리서의 주장대로 하늘 성소가 되었던지, 예수님의 주장대로 예수의 몸이 되었던지(마 12:6), 바울의 주장대로 우리들 모두의 몸이거나 우리 개인의 몸이 되었던지(고후 6:16), 아니면 성소가 교회와 성경이 되었던지 간에 성소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첫째가는 관심사이고 중심되는 관심사이다. (494.2)
 성소와 더불어 거룩이 왔고 성소와 더불어 구원이 왔다. 그리고 성소와 더불어 위기가 왔다. 성소와 더불어 멸망이 왔다. 성소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태도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교체했다. 성소의 처한 처지에 따라 찬송과 애통이 뒤바뀌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국관은 성소의 조건이 결정하였다. 성소가 태평성세이면 이스라엘 나라가 태평성세이고 성소가 말세를 만났다면 이스라엘 나라가 말세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징조도 성소에 있고 세상 나라가 성하는 징조도 성소에 있다. 말세의 확실한 징조가 성소에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마 24:15) 때가 바로 말세이다. (494.3)
 거룩한 나라가 번영을 이루는 때는 언제인가. 주의 보좌가 견고히 서는 날이다. 하나님의 성소가 사람들 중에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는 날이다(시 93:2). 하나님의 성소가 견고하면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성이 기뻐할 것이다”(시 97:1).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실 때”(시 99:2)가 좋은 때이다. (495.1)
 하나님의 백성에게 메시아의 날은 어떤 날인가. “주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때이다”(시 102:13).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는”(시 102:21) 날이다. 성소를 회복하는 날이다. 성소의 무너진 곳을 복구하는 날이다.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단 8:14) 날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다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는”(사 40:5) 날이다. (495.2)
 언약의 성소와 안식일
 그러면 성소는 어떤 곳이며 성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곳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모신 곳이다. 하나님과 사람과 온 만물이 함께 맺은 언약을 모신 곳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물에게 거룩하게 되고 사람과 만물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된 언약을 모신 곳이다. 성소는 거룩한 이 언약 때문에 거룩한 곳이다. (495.3)
 물론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을 모신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약 없이 하나님만 따로 모실 수 없다. 우리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언약이 없으면 우리에게 하나님도 없다. 하나님이 있는 곳에 언약이 있고 언약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언약을 모시는 것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영이시다. 언약이 영이고 영이 언약이다. 우리는 언약에 들어가면서 영으로 들어간다. 언약의 사람이 되면서 영적인 사람이 된다. 성소는 이 언약을 거룩하게 하는 곳이다. 성소는 우리를 영이 되게 하는 곳이다. 영적인 우리를 더욱 영적으로 만드는 곳이다. 이 거룩한 언약을 더욱 거룩하게 하는 곳이다. 우리의 언약과 영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곳이다. 이 거룩한 언약을 눈같이 희게 하고, 태산같이 견고하게 하는 곳이다. 언약을 우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우뚝하게 하는 것이다. 언약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496.1)
 그리고 거룩한 언약을 더럽히는 것이 거룩한 곳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이다. 언약을 짓밟고, 우리의 영성을 짓밟는 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이다. 참 어버이를 저버리고 진정한 지아비를 저버리고 참 하나님을 배반하는 짓이 우상을 섬기는 짓이다. 진실로 거룩한 곳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은 우리가 진실을 저버리고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불신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는 것이다. (496.2)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에게 제 마음과 몸을 내놓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내놓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제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모시고 사는 신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법으로 신체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색신(色身)으로서가 아니라 법신(法身)으로서 자기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이웃에 대한 마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법신(法身)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이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과 부부의 언약과 부자의 언약과 형제의 언약의 주체들이다. 그들은 미혹하는 나라의 색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몸과 마음으로 구현하는 법신들인 것이다. (496.3)
 언약의 안식일과 언약의 신앙 양심
 모두 알다시피 우리 안식일 신자들에게 안식일은 이 언약을 두고 말한다. 우리에게 안식일은 하나님과 사람과 만물이 “한 장막에서 함께” 맺은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에서 맺은 하나됨의 언약이다. 예수의 살과 피로 맺은 언약이다. 그러면 성소는 우리에게 무엇이며 안식일은 무엇인가. 성소도 언약이고 안식일도 언약이다. (497.1)
 성소와 안식일은 언약의 자리로서 서로 일치하고, 언약의 기능으로서 서로 일치한다. 우리는 성소에서 안식일을 만나고 안식일에서 성소를 만난다. 우리 안에서 성소와 안식일이 만난다. 그리고 안식일과 성소는 언약으로서 하나이다. (497.2)
 재림 신앙과 안식일 신앙의 선구자들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궤를 보았으며 안식일의 계명은 이 궤 안의 언약에서 핵심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다니엘 8장 14절의 성소 회복은 동시에 안식일의 회복이다. 성소의 회복과 안식일의 회복은 언약의 회복이다. 언약의 정결이다. (497.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양심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들의 신앙양심이다. 성소를 정결케 하고 안식일을 정결케 하는 일은 언약을 정결케 하는 일이요, 우리의 신앙양심을 정결하게 하는 일이다. “이천 삼백 주야까지이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히 되리라”하는 말은 그때에 우리들의 신앙양심이 정결하게 되리라는 말의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히 9:14). (497.4)
 다시 생각해보자. 성소의 정결이 무엇인가. 지성소의 휘장과 지성소 바닥에 묻은 각종 짐승의 피들이 씻겨나는 것이 성소의 정결이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렇게 성소의 정결을 물질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소는 언약의 성소이고 동시에 영의 성소이다. 성소의 정결은 언약의 정결이고 영의 정결이다. 우리의 언약이 거룩해지고 우리의 영혼이 거룩해지는 것이 성소의 정결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히 9:14)이 성소의 정결이다. 우리의 양심이 바벨론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는 것이” 성소의 정결이다(고후 6:17). 그리고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거룩한 여자와 거룩한 자녀로 “영접을 받는 것이”(고후 6:17) 성소의 정결이다. 우리의 신앙 양심이 정결해지는 것이 성소의 정결이다. (498.1)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의 신앙 양심이 정결해지는가. 흠 없는 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이 깨끗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언약의 의가 새로워진다. 우리로 말미암아 저버린바 된 하나님의 믿음이 치료된다. 잃어버린 우리의 믿음이 회복된다. 우리를 믿어주시는 예수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회복한다. 우리의 믿음과 더불어 우리의 양심이 회복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양심의 정결이다. (498.2)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신앙 양심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는 이미 쏟아졌다. 이미 드려졌다. 골고다에서 부어졌다. 객관적 역사에서 부어졌다. 그리고 이 희생의 피로 나는 주님께 영접되었다. 나는 주님의 여자가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나의 개인적 성전에서 쏟아져야 한다. 나의 영혼의 골방에 쏟아져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성전 곧, 나의 개인적 성전이 깨끗해져야 된다. 내가 주님께 주님의 여자가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서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나 자신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받아들이고, 내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영생의 하나님을 내 안에 모셔야한다. 이래야 성소의 정결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안식일의 정결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게 하나님의 언약의 정결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499.1)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바로 이러한 시간이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성소가 정결해지는 시간이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언약이 정결해지는 시간이다. 우리의 신앙 양심이 정결해지는 시간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몸에 영접하여 모시는 시간이다. 주님이 오심을 지체하는 시간은 주님이 우리에게 진실로 영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 안에 “성소의 정결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우리의 성소가 정결해지는 그 때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날이다. “하나님께 드려진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히 9:14) 우리 안에 뿌려지고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우리의 성전 안으로 영접되는 그때가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흠 없는 피가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이 하여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게 될”(히 9:14)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몸으로 오실 것이다. 천만 천사들과 함께 우리들에게 강림하실 것이다(살후 4:16). 우리가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간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교회적으로 “성소의 정결”“다 이루어내는” 기간이다. 흠 없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접되어 그가 우리 안에서 이 위대한 일을 “다 이루어내는” 기간이다. (4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