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기적적인 창작물이다. 그것은 결코 자기 의지로 맺어지지 않고 항상 성장함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그 열매을 생산하실 수 있으십니다. 나무는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나무들은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헤퍼, 제자도의 가치 (156.1)
 거짓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매주 교회에 갑니다. 정장을 차려입고, 올바른 말을 할 줄 알고, 일 년에 한두 번 선교활동에 참여하고도 거짓 성령의 열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나를 믿어라. 내가 그 열매를 보여주리라. (156.2)
 어느 날 새벽 두 시경에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쪽은 절망적인 어머니의 음성이었습니다. “목사님 내 딸이 행방불명입니다” 나는 곧 바로 차를 몰고 그녀의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내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수석장로였습니다. 그녀의 집은 내가 사는 집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져 있어서 내가 도착했을 때, 경찰도 거기에 딸과 함께 있었습니다. 경찰이 그 딸을 발견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딸이 집에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딸은 아버지를 두 팔로 감싸 안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딸은 아버지를 허그할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철로 만든 동상처럼 팔짱만 끼고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냉정하였고 그의 몸의 표정은 용서를 구하는 딸에게 경멸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156.3)
 어머니 역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집에서 딸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딸들이 더 이상 교회에 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집에서는 교회에서의 생활과 같이 생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교회에서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잘 돌보아 주고, 착한 아버지이고,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열매를 갖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가짜 열매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열리는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156.4)
 나는 교회에서 순수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람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집에서 개인적인 삶에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성령으로 그들의 거짓을 믿고 있었습니다. (156.5)
 육신의 소욕
 우리 마음속에는 성령에 순종할지 육신에 순종할 지를 두고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 17). (156.6)
 바울의 경고는 육신의 소욕을 만족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는 지적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여러분에 의해서 성령이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여러분이 행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성령께서만이 여러분을 바른 방향으로 지적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성령을 따라 살면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56.7)
 그러면서 바울은 육신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을 비교해 줍니다. 육신의 열매은 자연적인 행동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이런 열매을 맺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19, 20절) (156.8)
 자신을 파괴하는 이런 삶의 형태는 육신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열매 맺는 생애를 스스로 살수 없음으로 성령없이 스스로를 아는 데 실패함으로 세상은 도덕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156.9)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진실한 성령의 열매을 맺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2, 23절).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이런 일들은 가짜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울은 이것을 열매라고 부릅니다. 오렌지 나무는 오렌지 열매 외에 다른 열매를 맺는 것을 절대 걱정하지 않습니다. (156.10)
 오렌지 나무가 오렌지를 생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는 것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우리 생애에 모시는 것에 대해서 염려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성령의 열매을 맺게 될 것입니다. (156.11)
 우리의 싸움은 우리의 생애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 안되고, 성령과 함께 연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156.12)
 이것이 수십번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대신에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빌 4:4). 우리는 열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죄라고 부르는 추한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트레스를 불러 일으킵니다. (156.13)
 우리는 우리들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무언가를 이루어 낼려고 절망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행한 것이 거짓 성령의 열매을 맺게 합니다. 우리의 외모는 선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거짓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156.14)
 우리가 성령과 연합하는데 우리 삶의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 6). (156.15)
 우리의 마음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육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두게 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게 되는 일들을 하게 될 것도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에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156.16)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결정이 항상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안에 성령께서 행하시도록 허락하시면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만족시키는 일을 멈추게 될 것이고 우리는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156.17)
 좋은 열매는 하늘 아버지게 영광을 돌립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세상에 증거가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15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