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그 시간성과 역사성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정한 날을 기억하게 하신 시간의 계명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하는”(출 20:8) 계명이다. 안식일은 시간의 계명으로서 역사의 계명이다. 시간이 쌓이면 역사가 되고, 역사를 쪼개면 시간이 된다. 안식일의 계명은 단순한 시간의 계명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간의 계명이다. 안식일은 단순한 날이 아니라, 역사적인 날이며 역사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인 시간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459.1)
 제칠일 안식일 계명은 시간의 계명이요, 기억의 계명이다. 기억을 간직한 시간의 계명이요, 기억해야 할 시간의 계명이다.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출 20:10) 모두 모든 일을 제쳐놓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하는” 계명이다.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가? 안식일은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쉰” 역사적인 시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기억하고 지키기 위하여 제칠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출 20:11). (459.2)
 제칠일 안식일 계명은 이처럼 시간의 계명이면서 기억의 계명이다. 안식일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의 위대한 일을 “너는 기억하라”(신 5:15)하신 계명이다.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였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신 5:15) 하신 계명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을 종의 멍에에서 해방되고 구원하신 역사를 기억하기 위하여 그의 백성에게 거룩히 지키라 하신 날이 제칠일 안식일이다. 이처럼 안식일 계명은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역사의 계명이다. (459.3)
 따라서 안식일 계명의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기억의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 여호와는 우리가 “대대로 지켜야 할”(출 3:15) 역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조상의 역사에 반드시 안식일 계명의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안식일 계명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출 3:15). 안식일은 우리가 대대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하나님의 날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우리가 “거룩히 지키는” 날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행적을 기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출 20:11)이 안식일이며,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시 118:23, 24) 날이 안식일이다. (460.1)
 안식일 계명을 가르치는 성경 자체가 기억의 책이다. 기억의 책으로서 역사의 책이다.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시 118:23) 역사의 기록이 성경이다. 하나님이 날들에 기록한 기억이며 역사인 책이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이 하늘책에(단 12:1; 렘 17:1; 시 139:16; 계 1:19, 20:12) 기록하고 하나님이 그 손바닥에 기록한(사 49:16) 기억과 역사가 바로 성경이다. 그리고 제칠일 안식일의 기억은 성경의 모든 역사를 대표하는 기억이다. (460.2)
 뿐만 아니라 안식일 계명의 하나님은 기억의 하나님이시다.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자기 백성을 기억하고 자기 백성의 체질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103:14). 자기 양의 이름을 기억하고(요 10:14) 자기 백성과 더불어 맺은 그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이다(출 6:5; 시 106:45; 렘 14:21; 눅 1:72).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기억을 지키기 위하여 친히 그 언약과 역사를 기록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땅과 하늘에 기록하시고 날과 시간에 기록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돌에 새기시고, 손바닥에 새기시고, 마음에 새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역사를 이룩하시고, 역사를 기록하시고, 역사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이같이 이룩하시고 기록하시고 기억하시는 역사의 압축이요 대표이다. (461.1)
 안식일 계명의 백성도 기억의 백성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백성이다. 하나님과 그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간직하는 백성이다.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돌에 새기고 책에 쓰고 마음에 새기는 백성이다. 역사의 백성이다. 그런데 모든 역사의 기록에는 명암과 굴곡이 다 들어있다. 하나님의 기록과 사람의 기록이 다 그렇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용서의 기록은 동시에 사람의 큰 죄악과 큰 통회의 기록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기록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구속의 기억이면서 이 세계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던”(시 119:25) 날의 기억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창 1:2) 날의 기억이다. 우리의 영혼과 생명이 바로의 손끝에서 신음하던 때의 기억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허무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던 일”(창 2:7)의 기억이다. 우리의 근본이 혼돈이고 허무이고 흑암이던 날들의 기억이다. “전도자가 가로되 사람의 근본이 헛되고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도다”(전 1:2, 3)고 탄식하던 날의 기억이다. 사람의 진실한 찬양도 기억에서 나오고 사람의 진실한 참회도 기억에서 나온다. 기억의 백성이므로 참회의 백성이며, 기억의 백성이므로 찬양의 백성이다. 안식일의 기억이 찬양과 참회의 기초이다. (461.2)
 진실로 안식일 계명은 시간의 계명이요 기억의 계명이다. 그러나 시간의 계명이어서 마땅히 역사의 계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세월이 다 역사인 것은 아니다. 시간의 계명이 역사의 계명이 되는 경우는 시간의 계명이 기억의 계명이 될 때이다. 시간이 “세계사의 심판관”(헤겔)이 되는 것은 시간이 기억의 처소가 되었을 때의 말이다. 시간이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자비와 배은, 은혜와 반역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때의 말이다. 세월이 기억의 세월이 되고 세월이 기억의 책이 되어 “책들의 기록대로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계 20:12) 시간이 세계사의 심판관이 되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시간, 기억을 지니지 않는 시간은 역사가 되지 않으며, 따라서 기억을 지니지 않는 시간은 구원도 심판도 되지 못한다. 인간의 시간성이 곧 인간의 역사성이 되는 것은 온전히 기억 때문이다. 기억이 인간의 도덕적 반성과 분발의 원천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심판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462.1)
 진실로 이 기억 때문에 사람의 시간은 동물의 시간과 구별된다. 사람의 삶의 시간성과 동물의 생존의 무시간성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시간성 때문에 사람의 삶이 동물의 삶과 구별된다. 니체는 동물의 무시간성을 개탄하여 말하기를 “그대 곁을 지나가는 가축을 보라. 저들은 내일이 무엇이고 오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순간의 고락에만 매달려 있으니 우수도 권태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인간의 시간성의 특성을 간파하여 말하기를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462.2)
 그러나 인생이면 모두가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아는가.” 오늘과 내일을 구별하지 못하고 다만 순간의 고락에만 매달려 사는 목숨이 어찌 짐승뿐이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어제의 기억을 잊은 채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다. 안식일 계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내일이 무엇이고 오늘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순간의 고락에만 매달려 우수도 권태도 모르는 동물의 차원으로 떨어지지 못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계명이다. 시간과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순간의 쾌락과 동물적 포만에 매달려 사는 반(反)시간, 반(反)역사의 인간 모독적 삶으로 인간이 타락하는 일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계명이다. 안식일의 정신은 역사의 정신이요, 기억의 정신이요, 심판의 정신이다. 따라서 시간의 계명인 안식일의 백성은 역사의 백성이고 심판을 믿는 백성이다. (463.1)
 그러나 기억은 자연의 순리가 아니다. 강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 기억은 망각으로 흐른다. 기억은 자연을 맞서고 자연을 거슬리는 의지이다. 기억은 사람의 의지에 있다. 돌에 새기고, 책에 새기고, 가슴에 새기는 의지에 있다. 안식일의 계명은 사람의 의지에 새기는 의지의 계명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윤리는 기억의 윤리이다. 기억의 윤리는 동시에 의지의 윤리이다. 내가 “어찌 잊겠는가” 하는 의지의 윤리이다. 이 분을 잊고도 내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결심의 윤리이다. 이 일을 잊고도 내가 참으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결심의 윤리이다. 이러고도 내가 심판을 받지 않으랴 하는 도덕적 의지이다. 그리하여 책에 쓰고 돌에 새기고 가슴에 새기는 양심의 윤리이다. (463.2)
 안식일 백성의 역사 정신
 안식일의 정신은 쓰고 새기는 정신이다. 기록하여 지키는 정신이다. 역사를 쓰고 역사를 지키는 정신이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역사를 중히 여기는 정신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를 기록하는데 남다른 백성이 안식일의 백성이다. 역사를 바로 쓰고 역사적 기록과 역사적 교훈을 바로 “지키고,” “거룩히 지키는” 데에 남다른 백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의 하나님이신 안식일의 하나님을 닮으려는 백성이다. 역사의 창조주와 그리고 창조주의 역사 창조가 안식일의 백성들이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대상이며 역사의 창조자가 안식일 기억의 주체라는 인식에 투철한 백성이 안식일의 백성이다. (463.3)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처럼 역사의 창조자가 되려는 결의로 충만하게 되는 날이다. 안식일의 백성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역사적 삶을 배운다. 하나님의 삶이 온 우주에 공개되듯이 우리의 삶이 온 우주에 공개되는 이치를 배운다. 기록되어 공개되는 역사에 의하여 개인이 찬양도 받고 심판도 받는 이치를 배운다. 만인이 “책들의 기록대로 심판 받는”(계 20:12) “조사심판”의 이치가 안식일 계명에 있음을 배운다. 주님의 재림으로 우리가 승천하여 천년동안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책임이(계 20:4) 다름이 아니라 천년동안 주님과 주님의 천사들과 함께 인류의 살아간 역사를 살피고 검토하는 책임임을 배운다. 천년동안 하늘의 기록된 역사를 살피며 깨달음을 얻고 감동하고 찬양하는 책임임을 안다. (464.1)
 천상에서의 이 역사적인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진실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는 보상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도들의 천상의 삶은 지상의 삶의 연장이다. 지상의 역사적 삶이 천상의 역사적 삶으로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백성들은 지상에서 하늘의 기록책에 기록되는 자신의 역사적 삶을 의식하며 산다. 그리고 그같은 역사적 정신의 삶과 역사적 실천의 삶이야말로 안식일 백성이 안식일 신앙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가장 큰 보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지상적 보상이 천상적 보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안식일 신앙으로 이 지상에서 역사적 삶에 충실할 수 있었던 안식일의 백성은 예수 재림과 더불어 하늘로 올라가서 천년동안 온 인류의 지상적 삶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적 성찰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의 백성은 이같이 역사적 삶의 축복을 누리는 백성이다. (464.2)
 안식일 계명의 윤리는 기억의 윤리이다. 안식일 계명에서는 기억이 의로움이요, 기억이 준법이고, 기억이 선이다. 그리고 망각이야말로 죄이다. 망각이야말로 안식일 계명을 더럽히는 죄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이다. 안식일 계명에서 배은은 곧 망덕이다. 망덕이 곧 배은이다. 이점에 있어서도 안식일의 계명은 역사의 계명이다. 안식일 계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죄는 망각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정신은 역사를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정신이다. 안식일 계명을 두렵게 생각하는 정신은 역사를 두렵게 생각하는 정신이다. 안식일 계명을 가볍게 여기는 정신은 역사를 가볍게 여기는 정신이다. (465.1)
 안식일의 윤리는 똑바른 기억의 윤리이고, 올바른 기억의 윤리이다. 바른 역사의 윤리이다. 역사학이 진실 규명의 학문이듯이 안식일 계명의 윤리는 진실의 기억과 보존의 윤리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진실을 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식일 계명을 더럽히는 중대한 죄이다. 따라서 안식일 계명의 심판은 기억과 망각의 구별이요, 진실과 거짓의 구별이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구별이요, 참 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의 구별이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이다.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의 구별이다. 하나님과 우상의 구별이다. 착하고 진실한 종과 악하고 거짓된 종의 구별이다. (465.2)
 이처럼 안식일 계명의 중요한 가르침은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이냐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실하고 어느 것이 거짓 되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 신앙에서는 어느 날이 진정한 안식일이고, 어떤 하나님이 진정한 안식일의 하나님이며, 어떤 신앙이 진정한 안식일 신앙이냐 하는 문제가 반드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참된 안식일 정신은 진실 추구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참된 역사의 정신을 뜻하기 때문이다. 추상같은 역사 정신이 안식일 신앙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아무 날이면 어떠냐 하는 식의 불분명한 태도는 안식일 신앙에서 결단코 용납되지 않는다. 어느 하나님이면 어떠냐 하는 신앙 방식처럼 결단코 용납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역사 왜곡적 사고방식과 진실 왜곡적 사고방식이야말로 안식일 계명이 극력 경계하는 사고방식이다. (466.1)
 안식일 신앙은 역사적 신앙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백성들은 역사적 심판을 믿는다. 하나님의 역사의 심판을 믿는다. 하나님의 진실한 기록의 심판을 믿는다. 조사심판을 믿는다. 제칠일이 안식일이냐 일요일이 안식일이냐 하는 논쟁은 이러한 문맥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쓸데없는 논쟁이 결코 아니다. 진실한 삶을 위한 진실된 노력의 하나이다. 안식일의 백성들은 마땅히 진실된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진실된 역사를 기억하고, 진실된 역사를 기록하는데 남다른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역사적 삶을 두렵고 무겁게 여기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의 삶을 진실되게 살아가는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늘의 역사책에 기록되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참으로 두렵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승천하여 천년동안 하늘의 기록책을 검토해야 할 자신의 책임을 깊이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4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