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에서 가장 유용한 성경 구절의 하나가 11장 6절이다. 얼핏 보면 이 구절은 난해한 고대 역사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인즉, 이 구절에서는 흥미 진진한 인간의 관심사들이 이야기 되고 있으며,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268.1)
“몇 해 후에 그들이 서로 맹약하리니 곧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에게 나아가서 화친하리라 그러나 이 공주의 힘이 쇠하고 그 왕은 서지도 못하며 권세가 없어질 뿐 아니라 이 공주와 그를 데리고 온 자와 그를 낳은 자와 그 때에 도와 주던 자가 다 버림을 당하리라.”
(268.2)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인가? (268.3)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기원전 250년경 이집트의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Ptolemy Philadelphus)와 시리아의 국왕 안티오쿠스 데오스(Antiochus Theos)는 국혼을 통해 양국의 화평을 유지하려 했다. 이리하여, 시리아의 안티오쿠스와 이집트 국왕 프톨레마이오스의 공주 베리나케(Berenice)의 결혼이 추진되었다. (268.4)
그런데, 안티오쿠스에게는 라오디케(Laodice)라는 전처가 있었다. 정략 결혼의 일환으로서 그는 전처와 이혼해야 했다. 이혼은 이루어지고 뜻대로 새 신부와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당연한 결과로서 사내 아이가 태어났다. 불행히도, 안티오쿠스는 곧 베레니케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늘 베레니케를 그의 전처와 비교하였다. 그러던 중 베레니케의 부왕인 이집트의 국왕이 사망하자, 안티오쿠스는 베레니케와 이혼하고 라오디케를 다시 데려왔다. (268.5)
그러나, 라오디케는 그 동안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는 그의 남편이 또 어떻게 할지 불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당시 흔히 있었던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안티오쿠스와 베레니케와 베레니케의 측근 들과 어린 아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268.6)
이것은 기분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 여인들이 흘린 눈물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느낀 배신감과 불안과 증오를 생각해 보라. (268.7)
그런 다음에, 이 일이 발생하기 근 삼백 년 전에 천사가 다니엘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려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니라”(히 13:8). (268.8)
하나님은 모든 파괴된 심령과 파괴된 가정의 처지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인간의 증오심으로 말미암는 뼈아픈 고통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약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모든 비극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 다니엘 10~12장에서 예언의 시작과 끝 부분에 나타 나셨다. (268.9)
적개심에 불타는 인류
다니엘 11장은 개인적인 비극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취급 범위가 역사에 걸쳐 있다. 11장에 나오는 천사는 TV에서 주요 기사들을 논평하고 방송을 마치는 월터 크롱카이트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는 “그래서 그 일은 이렇게 되는 것이다” 라든가, 또는 이것은 전조적인 예언이며 “그래서 이 일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사건을 해설하고 있다. (268.10)
그리고, 마치 저녁 뉴스 시간의 중요 기사들처럼 11장에 보도되고 있는 거의 모든 행위들은 하나같이 적개심이 가득 찬 것이다. 배역들은 하나같이 음산한 조명 아래 등장 한다. 누군가와 싸우고 있거나 싸우려고 준비하고 있다. 끝 부분에 가까와서 예외적으로 소수의 “지혜로운”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심중한 도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이다. (268.11)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가 알고 계시는 것들은 대부분 선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 3:23). 죄란 언제나 누구에게 대하여 저지르는 것이다. 그 대상은 하나님이거나 우리의 이웃이다. 이 장(章)에서는 적개심에 찬 인간들이 서로 속이고 깎아내리고 죽이는,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까지 교만과 분노를 자행하는 모습이 적나라 하게 묘사되고 있다. (268.12)
다니엘이 다섯번째 본 이 이상은 이렇듯 적나라한 인간의 적개심을 배경으로 하여 몇 가지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찾든지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이다. (268.13)
이 이상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비열한 경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언제라도 호각을 불 태세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27, 29, 35절은 “작정된” 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17장 26, 27절에서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스톱 워치(운동 경기 등에서 사용하는 시간 측정용 시계)를 알고 있었다. (268.14)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다니엘 11장의 언어는 2장, 7장, 8장의 경우처럼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적”이다. 11장에는 여러 가지 원료로 된 신상 같은 것도 나오지 않으며 짐승들이나 뿔 같은 것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장의 언어가 쉽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다. 마치 암호문같이 불가해하다. 각 문장은 정보의 양(量)을 간략히 압축하고 있다. 은유적인 표현도 많다. 얼핏 보면 그 많은 대명사들의 선행사들도 분명치 않다.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에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269.2)
처음에는 왜 하나님이 좀더 평이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나 곧, 그분이 이런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예언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방식이 최선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표현 방식을 선택하신 것이다. (26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