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조라는 것은 옛 건물을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무너뜨리고 새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요셉 알레이니 (152.1)
 다른 사람이 아는 것만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사명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같으신 분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낮에 만나지 않고 밤에 약속을 잡고 만나기를 요청했습니다. (152.2)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사업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단지 기별을 가진 지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은 능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 (152.3)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니고데모에게 신비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의 친구들도 모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그들중에는 친척도 있고, 지식인도 있으며 그리고 산헤드린의 학자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지혜로우시고, 하나님을 믿고 계시며, 율법에 정통하십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위대하신 일들에 대한 능력이 어떻게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학자대 학자로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좀더 깊은 주제로 신학, 철학, 그 밖의 학문에 대해서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이 가지신 깊은 학문을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오셨나요? 누가 당신의 스승이었나요? 대학에서 전공과목은 무었이었나요?” (152.4)
 예수님께서는 지식이 많고 교육을 많이 받은 이 열정적인 사람을 쳐다보시면서 그의 공허한 생애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152.5)
 니고데모 너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이 교육 많이 받은 지도자에게 얼마나 당황하게 하는 요청이었든가! 다시 태어나라. 새 사람이 되어라. 너의 영적인 생활을 보통 사람보다 더 높게 일으키라. 이제부터 내가 제공하는 풍성한 인생을 경험하라. 니고데모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의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가 원하는 답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152.6)
 완전히 의지함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걸을 수도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아기가 무언가 할일이 있던가 가야할 곳이 있던가 하면 부모들이 아기들을 위해서 해 주어야 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기들은 완전히 부모에게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152.7)
 중생의 기본적인 뜻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허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먹여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152.8)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은 부모가 필요하며, 부모님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야 합니다. 옷을 입을 때도 아빠와 엄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친구들과 놀 때도 부모님의 돌보심이 필요하며 아이들은 부모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해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152.9)
 거듭난다는 말은 기독교인들에게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중생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모든 일에 신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의 현장에 끊임없이 함께 하심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함께 계시며,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할 때도 함께 계시며, 차를 타고 일하러 갈 때,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시청할 때, 사람들과 대화할 때, 시장을 보러 갈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진정한 중생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152.10)
 바람의 효력
 니고데모는 예언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모세 오경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대화 중에 중생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152.11)
 니고데모는 그가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4) 잠깐만 예수님! 아무도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누구나 다시 태어 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5-8). (152.12)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성령의 능력에 관해서 니고데모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의 능력의 근원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받는 근원을 알려주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152.13)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효력은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들의 생애를 둘러싸고 있었던 교육받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오직 높은 부르심을 받은 남녀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보게 됩니다. (152.14)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사는 삶의 교리는 영광스런 교리입니다. 이것은 거짓 희망들을 쓸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과 문화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이르러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과 문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러분은 거듭나야 된다.’ 이 말은 단순히 외부적인 도덕적인 변화로 이르러 온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외부적인 도덕적 변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듭나야 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52.15)
 “이것은 종교의 외부적인 신뢰나, 교회에 다니거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믿음을 확신하거나, 침례를 받거나,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온다고 합니다만, 이러한 단순한 종교적인 외부 변화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내부에 가진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잎으로 갈아 입는 사람에게 온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희미하고 피상적인 희망을 버리고 새로운 희망과 좋은 소망과 축복받은 소망과 영광스런 소망에 온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동물적인 욕망이나 이기심이나 세상적인 사물에 대한 욕망도 없고, 보다 더 놓은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 이르러 오는 것이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이르러 올수 있지만, 여러분이 예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거듭나야 합니다.” (152.16)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애에 역사하시기를 바랄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완전히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밤낮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면서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을 받아들이시도록 확신시켜 주시는 이기심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152.17)
 생각해 볼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