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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한 나라를 상속할 장자의 명분
 안식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표징이다(출 31:17).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우리로 알게 하는 우리 대대의 표징이다(출 31:13).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의 거룩한 여호와임을 나타내는 표징이 안식일이다(겔 20:13). 우리가 “여인의 남은 자손”(계 12:17)임을 알리는 신표가 안식일이다. (450.1)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가 되고 우리로 그의 아들이 되는”(계 21:7) 표징으로 안식일을 우리에게 주셨다. 진실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들이 되라(히 1:5; 삼하 7:14; 시 2:7)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표이다. 안식일 이것으로 너희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 받으라 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신표이다. (450.2)
 세상에 아들보다 귀한 직분이 없고 아들의 신표보다 더 귀한 표징이 없다. 우리가 “천사보다도 훨씬 뛰어난” 존재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었기” 때문이다(히 1:4). 하나님의 이름이 그 무엇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그 무엇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이름”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구별하여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업”(히 12:17)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우리를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업”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인치신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450.3)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천사에게도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시지 않았다”(히 1:5). “천사 중 누구에게도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시지 않았다”(히 1:5). 하나님은 “어느 때에도 천사 중 누구에게도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리라 하시지 않았다”(히 1:13). 그래서 천사 중 누구도 우리가 얻을 아들의 기업을 하나님께 얻지 못한다. 천사 중 누구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하지 못한다”(마 25:34 참조). (451.1)
 안식일은 우리로 아버지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하는(마 5:5) 신표이다. 우리로 “영생을 상속”하게 하는(마 19:29) 신표이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고 세상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마 5:5; 19:29; 25:34) 아들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고전 6:9-11; 갈 5:21) 아들이 있다. 하나는 사라에게서 났고 하나는 하갈에게서 났다. 하나는 자유하는 자에게서 났고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났다. 하나는 성령을 따라 났고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났다(갈 4:22-23).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나고 성령에게서 난 자는 약속의 아들들이다. 계집종에게서 나고 육체로 난 자는 약속의 아들들이 아니다(갈 4:20-23). 이것은 비유이다. 두 여자는 두 언약이다. 두 부류의 아들은 각기 다른 두 부류의 언약의 사람들이다. 약속 있는 언약이 있고 약속 없는 언약이 있다. 안식일은 약속의 언약이다. (451.2)
 안식일의 자녀들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이다(갈 4:20). 안식일은 “자유하는 자의 아들”(갈 4:30)의 언약이고 “성령을 따라 난 자”(갈 4:29)의 언약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 아들을 위해 “창세로부터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할”(마 25:34) 약속의 언약이다. “계집 종의 아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한다”(갈 4:30).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성령을 따라 난 자와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한다. (451.3)
 하나님의 나라에 침노하는 자들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를 당해왔다”(마 11:12).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눅 16:16).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마 11:12). 안식일의 권리는 “창세부터 그 아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할” 권리이다. 이 권리는 지금까지 침노를 당해왔다. 그리고 침노하는 자가 이 권리를 빼앗았다. (452.1)
 야곱은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로 태어난 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리를 위해 도전했다. 그는 계집종의 아들 이스마엘처럼 아버지의 유업에 상관없는 자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기 위하여 장자의 명분에 도전하였다. 그는 육체를 따라 났으나 성령을 따라 낳은 자가 되려고 도전하였다. 세상에는 수많은 야곱들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생의 기업에 도전하였다. 세상에서 계집종의 아들로 태어나고 육체의 아들로 태어나고 약속의 기업 밖으로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지”에 도전하였다. 어떤 율법사도 도전했고 어떤 관원도 도전했다(눅 10:25; 18:18). 그들이 야곱처럼 씨름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어려서부터 다했다”(눅 18:21). 아버지에게 “염소의 좋은 새끼도 가져왔고”(창 27:9) 그것으로 “아버지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기도 했다”(창 27:14). 어미와도 모략을 의논하고 친구와도 모략을 세웠다. 아내도 속이고 형도 속이고 아비도 속였다. 맏아들의 옷을 취하여 입기도 했으며(창 27:15) 성직자의 옷을 취하여 입기도 했다.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자기 손과 목의 미끈미끈한 곳을 꾸미기도 했고”(창 27:16) 장자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아버지를 불러 보기도 했다(창 27:19). 아버지를 속여 아버지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게 했다”(창 27:19). 오직 “영생을 얻으려는” 일념에서 그렇게 했다. 하나님이 그 장자를 위해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으려는 일념 하나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 빌기 위해 예비해 놓은 약속의 축복을 받으려는 생각 하나로 세상의 야곱들은 이 모든 일을 다했다. “어려서부터 다했다”(눅 18:21). (452.2)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는 이처럼 침노를 당해왔다. 아버지가 그 큰아들을 위해 간직해 둔 약속의 축복은 이렇듯 침략을 당해왔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고 침입한다”(눅 16:16).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소식이 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로,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 모든 사람이 영생의 길을 찾는 구도의 길에 나섰다.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이 궁리요 사람마다 이 몸부림이다. (453.1)
 안식일은 하나님 아버지가 그 맏아들을 위해 창세부터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할 약속의 언약이다. 야곱과 다른 또 수많은 야곱들은 이 언약을 얻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고 있다. 개종도 하고 있다. 휴직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에 대한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사람마다 장자의 명분 곧 안식일의 언약을 얻기 위하여 “그리로 침노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식일의 언약은 결국 “침노한 자가 빼앗는다”(마 11:12).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 그가 안식일의 유업을 얻었다. (453.2)
 그러나 그는 육신의 일을 빼앗듯 안식일의 유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육체로 난 자는 하나님의 기업을 얻을 수 없다. 성령으로 난 자만이 이 약속의 언약을 얻을 수 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생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일들을 “어려서부터 다했다 할지라도 네게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눅 18:22). 네가 어려서부터 재산과 지식과 명성과 의로움을 쌓았다 할지라도 “네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 따위 것들은 영생의 유업을 계승하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 모두 팔아버리고 모두 나눠주어 버려도 아쉬울 것이 없다.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가 없고 그런 것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을 얻을 수 없다. 재산도 혈통도 지식도 명성도 의로움도 모두 계집종에게서 나온 것이고 육체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하는 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령을 따라 난 것”이 아니다.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다. (454.1)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려면 “성령을 따라 나야 한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무슨 짓을 다 한다해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가 없다. 야곱은 성령으로 나는 일에 도전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약속의 언약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위해, 성령으로 나고 거듭나는 삶에 도전하였다. “날이 새도록 씨름”(창 32:24)하였다. “세월이 새도록” 씨름하였다. “머리가 새도록” 씨름하였다. “환도뼈가 위골이 되도록”(창 32:25) 씨름하였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간구하였다”(호 12:4). 장자의 유업을 간구하였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간구하였다. 안식일의 약속의 언약을 간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얻었다. 씨름의 밤이 지나고 날이 새면서 그는 약속의 언약을 얻었다. 씨름에서 이기고 날이 새면서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부르게 되면서 축복된 언약을 얻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고 사람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되면서, 육체의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면서, 육체의 환도뼈가 무너져 내리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새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그는 안식일 언약의 아들이 되었다. “침노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었다”. 찾고 찾은 결과였다. 구하고 두드린 결과였다.(마 7:7). (454.2)
 언약의 본가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안식일의 언약에 대해 어찌하고 있는가
 그러나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장자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 유업의 언약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본가지(롬 11:7)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어떻게 이 언약을 지키고 있는가. “나라의 본 자손들”(마 8:12)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가. 에서와 같이 장자로 태어난 안식일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어떻게 존중하고 있는가? 아버지의 유업을 상속하게 할 안식일 신앙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가. 이 약속의 언약 밖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마다 약속의 복음을 듣고 이리로 침략해 들어오고 있는데, 그들이 날이 새도록, 머리가 새도록, 환도뼈가 무너지도록 사람과 더불어 씨름하고 천사와 더불어 씨름하고 하나님과 씨름하여 울며 하나님께 이 언약의 축복을 빌고 있는데 정작 이 언약 안에서 태어난 본가지 자손들은 이 안식일의 언약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안식일 신앙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수많은 에서들은 그들이 가지고 태어난 장자의 명분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의 복음을 들은 수많은 야곱들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하고 부르짖고 있는데,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하면서 씨름하고 있는데 언약의 본 가지에서 태어난 우리의 자녀들은 어찌하고 있는가. (455.1)
 저 “붉은 사람” 그래서 “붉은 것”을 잘먹는 아들 “에서”처럼 사냥으로 곤비한 삶에서는 붉은 팥죽 한 그릇의 실속이 중요하지 신앙의 명분 따위야 무엇이랴 하지 않았는가. 팥죽이 되었건 월급이 되었건 부동산이 되었건 감투가 되었건 실익이 중요하고 실속이 중요하지 명분이 밥 먹여주는 것이냐고 하지 않았는가. 안식일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할 우리들의 신앙적 명분이요 권리요 신표라 한들 당장 내 코가 석자요 내 입이 포도청인데, 생활에 “곤비하여 죽게 되었는데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 26:32)하지 않았는가. “취직 못해서 죽게 되었고 대학 못 들어가서 죽게 되었고 시집 못 가고 장가 못 가서 죽고 싶은 마음인데 이 안식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지 않았는가. 안식일 신앙의 “본 자손들이”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마 8:12; 창 26:34)이 이와 같지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계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을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다. 안식일의 명분은 장자의 명분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권리이다. 거룩한 명분이다. 진주 같은 권리이다. 이 거룩하고 진주 같은 안식일의 명분을 물려받은 “본 자손들은” 과연 이 명분을 존귀하게, 값지게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에서”처럼 경홀히 여기고 있는가. (456.1)
 사람이나 물건이나 사상이나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인을 잘 만나야 영광을 얻는다. 여자도 주인을 잘 만나야 정경부인이 되고 요조숙녀가 된다. 안식일 신앙은 역사적으로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유대인이 그랬고 바리새인이 그랬다. 그리고 과연 현대의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어떤가. 우리로 말미암은 안식일은 영예를 받고 있는가 수모를 받고 있는가. 존귀한 신부로 사랑을 받고 있는가 비천한 여자로 박대를 받고 있는가. 거룩한 진주같이 대접을 받고 있는가 천하고 귀찮은 돌멩이로 무시를 받고 있는가. (456.2)
 안식일 나라의 본 자손들은 명심하여 들어야 한다. “용이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계 12:17), 왜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가. 장자의 권리, 하나님 아버지의 예비된 나라를 상속할 권리를 빼앗기 위하여 싸우려는 것이다. 안식일의 자녀들은 유업의 권리를 빼앗기지 말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졸고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깨어나야 한다.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한 “에서”의 운명이 어찌되었는지를 명심하여 들어야 한다.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빼앗겨 방성대곡했던 “에서”의 일을 명심하여 새겨야 한다. 약속의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후에 약속의 아버지 이삭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 높여 우는”(창 27:38) “에서”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너희의 아는 바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히 12:17)고 한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1, 12)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 12:16)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기업을 받는 자들을 본 받으라”(히 6:12). 아브라함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으라”(히 6:15). “성도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계 14:12). (4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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