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에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주목한 많은 사람들은 밀러가 미혹에 빠졌고 과오를 저질렀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비록 윌리엄 밀러가 몇 가지 사항에서 과오를 범했지만 그는 세상에서 참으로 올바르게 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358.1)
 밀러가 신약 성경에 그렇게 여러 차례(어떤 사람은 수백 번에 달한다고 한다)에 걸쳐 강조된 예수님의 재림을 전파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가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을 가르치고 천년기가 시작할 때 예수님이 직접 눈에 보이도록 재림하신다고 가르친 것도 잘한 일이었다. (358.2)
 밀러 시대의 대부분의 목사들과 기독교 저술가들이 비록 재림을 강조했다손 치더라도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평화와 번영의 일천 년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 하였다. (358.3)
 그러면서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 곧 이 땅에 평화의 일천 년 시대를 건설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영적으로 재림하실 것이라 하였다. (359.1)
 밀러의 일부 반대자들도 2,300일 문제에 대하여는 밀러와 사실상 의견을 같이 했다. 그 중에 가장 저명한 사람은 뉴욕 시립 대학(University of the City of New York)의 히브리 및 고대 문학 교수였던 조지 부시(George Bush, 1796~1859)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1840년 대는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재림에 앞서 이루어질 평화와 번영의 일천 년 시대가 시작되는 연대였던 것이다. (359.2)
 이 같은 사상은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특징짓고 있던 “기분 좋은 시대”(era of good feeling) 의 낙관주의와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상은 당시 수없이 발생하고 있던 사회 개혁 운동 단체와 해외 선교 협회들의 드높은 희망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 호모 아메리 카누스(미국인)가 이상(理想)세계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359.3)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말하기를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국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 이 세상 나라들을 정복할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사실 1835년에 에드워드 비이처(Edward Beecher)가 말했듯이 미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임박했다는 신앙에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고무되어 있다.” 그들이 마음속에 생각하는바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눈에 보이도록 오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세계를 개심시키고 “모든 부패와∙∙∙모든 학대들” 곧 노예 상태와 독재와 전쟁과 빈곤과 술취함 등을 사회에서 없이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영적으로 오시는 것이었다.57 (359.4)
 전천년주의자 윌리엄 밀러
 바로 이러한 시대에 윌리엄 밀러는 전천년주의의 대변인으로 나섰다. 전천년주의는 천 년간의 이상 천국이 이루어지기에 앞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다고 하는 성경적인 주장이다. 그는 디모데후서 3장 1~5, 13절에서 “말세에” 백성들이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점점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는 글을 읽었다. (359.5)
 그리하여 밀러는 그리스도가 능력과 영광으로 나타나셔야만 죄악이 근절되고 영원한 평화가 건설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359.6)
 대 재림 운동은 그 당시의 탁월한 전천년주의 운동이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밀러의 재림 운동은 철저히 조롱당하고 비난을 받았다. 1844년에 마지막 심판이 시작된다는 밀러의 전천년 주장과 기별은 그 주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그의 주장에는 잘못이 없었다) 인기없는 주장이기 때문에 배척되었다. 밀러의 주장은 미국의 미래와 세계의 개심에 관한 당대의 낙관주의적 정신에 부합치 않았다.58 (359.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 남북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밀러에 대한 후천년주의적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된 1861년에 침례교회에서 발행하는 크리스찬 리뷰(Christian Review)지의 편집자들은 “우리들의 환상은 갑자기 무참하게 탈취 당했다” 라고 탄식하였다.59 (359.8)
 그 밖의 다른 사회적 실패극들도 신학자들에게 후천년주의의 파멸을 확신시켰다. 가장 많이 알려진 실패들 중에 두 개만 예로 들기로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네이다. 공동 사회”(Oneida Community)는 은그릇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때 오네이다 공동 사회는 한 야심적인 “완전한” 공동 사회의 이름이었다. 이 공동 사회는 전혀 완전한 지구의 모델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359.9)
 오네이다 공동 사회에서는 매우 조심성있게 다듬은 이론에 의해 남녀들을 짝지우거나 새로 다시 짝짓게 하였다. 그러나 오네이다 공동 사회는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커녕 얼마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 또 하나의 모델 사회로 등장했던 브루크 농장(Brook Farm)도 나다니엘 호오돈(Nathaniel Hawthorne), 오레스테스 브라운슨(Orestes Brownson),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같은 지성인들의 지원을 받았었지만 창고가 불에 타 내려앉자 곤혹스러움 속에 해체되고 말았다. (360.1)
 오늘날에는 전천년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J. N. 다비(Darby)의 휴거(携擧, rapture)이론에 근거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첫째 천사의 기별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천년설은 뒤에 연구하게 될 세째 천사의 기별도 부정하고 있다. (360.2)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밀러가 2,300일 예언이 끝나는 1844년에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도래한다는 첫째 천사의 기별을 성경에 근거하여 가르친 것이 확실히 옳았기 때문이다. (360.3)
 윌리엄 밀러는 하나님의 시간을 위해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 심판의 시작에 대한 참된 기별을 갖고 있었다. 그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서 시작한 위대한 새 일에 관한 것이었다. 분명히 그 어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전해야 했던 기별들을 검토한다면 깊은 감동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60.4)
 달리 밀러를 도울 수도 있었음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밀러를 비판하는 대신에 밀러와 함께 기도하고 연구를 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 밀러보다 월등한 교육 배경을 활용하여 그들은 밀러가 어디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를 성경을 통해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360.5)
 다니엘 7장 9~14, 22절을 보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심판의 시간에 하늘의 새로운 장소로 이동하고 그 뒤를 따라 인자도 하늘 구름을 타고 그 곳으로 옮겨 온다. 이로써 그 곳에서 그들이 시작하려는 위대한 새 일에 온 우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으로 너무나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 밀러는 다니엘 7장에 나타나는 심판의 장면을 위해서 인자가 이 땅으로 오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다. 다니엘 7장 13절은 말하기를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가서” 그의 왕국을 받았다고 했다. 밀러의 대적들은 이 구절의 정확한 뜻에 밀러의 관심을 돌리게 할 수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했다면 크나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3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