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속의 예수 그리스도 제 1 부 창세기 속의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49장 그분은 영원토록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 후손 예수님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다(히 2:14-15). 예수님은 구속사를 종말까지 인도하시어 궁극적 승리를 가져 오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시다(계 5:5). (271.4)
 3. 메시아적 왕이신 예수님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9:10).
(272.1)
 규. 규 혹은 홀은 왕적 권위를 나타내는 막대기이다(시 45:6; 히 1:8). 아하수에로 왕은 호의의 표시로 왕의 허락 없이 자기 앞으로 나온 에스더에게 이것을 내밀었다(에 4:11; 5:2; 8:4). (272.2)
 실로. 실로는

   (1) 지명,

   (2) 조공을 그에게 바친다,

   (3) 이스라엘의 미래적 메시아의 이름,

   (4) 샬롬 ‘화평하게 하는 자’와 같은 의미를 지닌 메시아의 칭호,

   (5) 통치자,

   (6) 그것이 속한 자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6

 ‘실로가 오시기까지’([שִׁילוֹ] עַד כִּֽי־יָבֹא שילה 아드 키-야보 실로)는 오래 동안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메시아적 예언으로 이해되어 왔다. ‘해석자는 본문이 역사적 인물인 다윗과 그의 왕조 유산을 가리키는지, 혹은 완전한 메시아적 통치자가 오실 먼 지평을 바라보는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7 (272.3)
 표상학은 역사적 사건, 인물, 제도 등 역사적 실체를 가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측면에서 대표하고 있는지를 밝힌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왕권을 나타내고 있는 본문 속에서 이상적 왕인 다윗을 떠올리고 그 후손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주변의 적국들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왔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들의 이름을 솔로몬(שְׁלֹמֹה) ‘평화’라고 지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의 전성기였다. (272.4)
 예수 그리스도는 ‘사르-샬롬’(שַׂר־שָׁלֽוֹם) ‘평강의 왕’이시다(사 9:6)5 주님은 인류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시고(마 11:28), 창조 주일에 인류에게 주신 것과 같은 재창조의 안식을 주시고(히 4:4, 9-10), 영광의 왕국이 임할 때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곡함과 아픈 것들을 모두 사라지게 하신다. (273.1)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창 49:10). 백성은 복수형인 ‘암밈’(עַמִּים) 백성들이며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창 17:16; 48:4) 뿐 아니라 이방 국가들을 포함한다(창 27:29; 신 32:8). 창세기 49:8에 등장한 ‘네 아버지의 아들들’‘네 원수’가 모두 복종하는 백성들에 포함이 된다. 곧 유다가 성취할 나라는 메시아적 왕이 통치하시는 전 세계적인 나라이다.8 영광의 메시아 왕국에서는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갈 것이다(계 21:24-26). (273.2)
 4. 평화와 풍요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왕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창세기 49:11-12).
(273.3)
 메시아 왕국의 왕은 나귀를 탄다. 나귀 탄 왕은 평화 시대에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왕은 전쟁 때 말을 탄다. 예수께서 은혜의 왕국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셨다.9 그 왕국의 포도나무는 나귀를 매어 놓을 만큼 건실하고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다.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사는 모습을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라는 말로 표현했다(창 49:12).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포도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이사야는 평화의 시대인 메시아 왕국을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라고 했다(사 65:21). (273.4)
 우리에게 에덴의 풍요로움이 다시 회복되는 세상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온 우주에 새 창조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광의 왕국에서 십자가의 은혜 속에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서 섬길 분은 하나님과 죽임을 당하셨던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기 때문이다(계 22:3. 참조 계 5:12-13). 포도나무는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통해서 재림하실 때까지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교회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전 11:26). (274.1)
 요셉, 예수의 표상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세기 49:22-25).
(274.2)
 번영. 요셉의 번영 상태는 샘 곁에서 담을 넘어가는 무성한 가지로 표현했다(창 49:22). 그는 애굽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축복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무성한 가지 아래 온 세상이 기근의 위기로부터 쉼을 얻었다. 주님의 왕국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274.3)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름. 요셉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학대와 적개심의 희생자가 되었다(창 49:23). 그러나 그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어 굳건하게 섰다(창 49:24). 예수님은 적대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셨으나 부활 승천하셨으며 영광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이다. (275.1)
 한 없는 축복.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창 49:25). 요셉이 한 없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야곱은 예언했다. 위로 하늘 아래로 깊은 샘은 하늘과 땅 속 깊은 곳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축복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전혀 없다는 표현이다. (275.2)
 깊은 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홈’(תְּהוֹם)은 창조와 심판에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원창조 때에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창 1:2). 대홍수 때에 깊음의 샘이 터져 세상을 홍수로 범람케 했다(창 7:11). 하나님의 심판은 창조의 붕괴였으며 그 대표적인 징조는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이 열려 물이 쏟아짐으로 물과 뭍,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을 막으심으로(창 8:2). 안정적 세상이 확보되고 그 위에 새 세상이 시작되었다. 깊음의 샘은 안정적으로 지하수를 인간과 동식물을 위해 공급하는 제 자리를 찾았다. (275.3)
 회복된 새 세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세계에서는 더 이상 가뭄과 기근이 없게 될 것이다. 물론 홍수도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 인류가 받아야 할 심판을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우리의 구속주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희생 위에서 인간이 영원토록 번영하며 살 수 있는 새 세상이 건설되었다. 요한은 그 광경을 미리 보고 말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275.4)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는 새 세상은 에덴의 회복된 모습이다(계 22:1-2; 창 2:8-14). 선악과와 생명과의 중앙에 십자가가 있다. 나무에서 잃어버린 생명을 나무에서 도로 찾은 그 놀라운 생명의 씨앗 이야기는 영원히 말하게 될 것이다. 다시 회복될 낙원은 더 이상 죄가 없게 될 것이며, 원 에덴의 축복된 삶을 구원 받은 성도들은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2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