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4 부 안식일 신앙의 한 작은 주장 제 2 장  여호와 유일 신앙과 안식일 계명
 안식일: 유일 신앙의 표지
 안식일은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표지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여호와 한분 뿐이라고 하는 신앙의 날이다.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는 신앙(신 6:5)의 날이다. 안식일 신앙은 이 뜻을 돌에 새기고 날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는”(신 6:6) 신앙이다.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겔 20:12) 라고 고백하는 날이다.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표징”으로 삼은 날(겔 20:20)이 안식일이다. (439.1)
 아브라함이 자기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순전히 이 신앙 때문이었다. 갈대아 우르가 사람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하나님이고 저것도 하나님인 세상이 갈대아 우르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자신을 구별하겠다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영(ruach)이시고 이 한 분 하나님이 생령인 사람의 창조주라고 믿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439.2)
 모세가 동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도 안식일이 대표하는 이 유일 신앙 하나 때문이었다. 이 신앙이 모세5경이요 율법이요 십계명이요 안식일계명이다. 제1계명(출 20:2)이 바로 여호와 유일 신앙의 계명이지만 이 제 1계명의 신앙 정신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이다. 유일 절대의 하나님, 그러나 영이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인식하는 신앙이 안식일 신앙이다. 사람들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시적인 공간이나 물체를 통하여 예배하고자 했을 때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졌다. 안식일 신앙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비물체적이고 비공간적인 시간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이다. (439.3)
 뿐만 아니라 안식일 신앙은 차별적인 신앙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차별하고 영과 물체를 차별하는 신앙이다. 공간과 시간을 차별하고 시간 중에서도 6일과 제 7일을 차별하는 신앙이다. 제칠일을 6일에 대하여 차별적으로 선택하신 그 하나님을 거짓 신들에 대하여 차별적으로 섬기는 신앙이 안식일 신앙이다. 안식일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여호와 한분 뿐이라는 신앙이다. 일주일 중에 제칠일을 자신의 안식일로 삼으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한분 뿐이라는 신앙이다. 그래서 일주일 중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우리가 전적으로 구별해야 하는 날은 제칠일 안식일 하루뿐이라는 신앙이다. (440.1)
 하나님이 목동 다윗을 뭇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높이시고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높이신 까닭도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전적으로 그에게 순종하였기 때문이다(대하 7:17, 17:3, 렘 33:15, 겔 34:23). 여호와 하나님만을 차별적으로 섬기는 안식일 신앙에 투철하였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와 요시아 두 왕의 종교개혁도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신 신앙의 개혁이었다. 이방 잡신들의 신당들과 신상들을 파괴하고 이방 잡신들의 예배를 철폐시키고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강화하였다. 이교의 절기들을 철폐하였다. 이스라엘 신앙의 절기들을 존중하였다. 우상 숭배를 철폐시키고 하나님 신앙을 강화하였다. 안식일 신앙을 강화하였다. 여호와 하나님 유일 신앙의 핵심에 안식일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440.2)
 선지자들과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가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 신앙을 위하여 안식일 신앙의 강화를 부르짖었다. 선지자들의 대강령이 바로 안식일 계명이다.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일컬어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여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여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 .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사 58:13, 14) 하였다. (441.1)
 안식일 신앙의 선택: 제2의 엘리야 운동
 안식일 신앙은 결단의 신앙이다.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쫓으라”(왕상 18:21)고 결단을 촉구하는 계명이 안식일 계명이다. 여호와가 남편이면 그를 쫓고 바알이 남편이면 그를 쫓으라고 촉구하는 계명이다. 그리고 제칠일 안식일을 높이 쳐들어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표시하는 신앙이 안식일 신앙이다(겔 20:12, 20 참조). 안식일 신앙에는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는 일이 불가능하다. 바알을 버리고 여호와를 선택하든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선택하든지가 있을 뿐이다. 안식일 신앙에는 바알만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여호와 외에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신들이 문제이다. 안식일 신앙에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들이 우상이다. 그들은 모두 거짓 신이고 거짓 아버지이고 거짓 남편이다. 안식일 신앙에는 하나님도 하나이고 아버지도 하나이고 남편도 하나이다. 주님도 하나이다. 그리고 그 한 분이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441.2)
 구약성경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싸움은 안식일 신앙의 싸움이다. 엘리야를 비롯한 7000여명의 신앙 투사들은 모두 안식일 신앙의 투사들이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창조주요 아버지요 남편이라는 여호와 유일 신앙의 투사들이었다. 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하나님을 섬기고 두 아비를 섬기고 두 남편을 섬기고자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여러 아비의 자식이 되고 여러 남편의 아내가 되고 있을 때 엘리야와 7000인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 하나님, 한 구세주, 한 아버지, 한 남편의 신앙에 굳건히 섰다. 안식일 신앙에 굳건히 섰다. (442.1)
 일요일과 제칠일 안식일
 어떻게 보면 일요일을 주일로 삼은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절기를 토착화한 구약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의 농경 축제 절기들에게 출애굽 사건의 의미를 부여하여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 같은 이스라엘 신앙의 절기로 토착화 시켰듯이 이교적인 날이었던 일요일에 기독교의 부활의 의미를 부여하여 일요일을 기독교적인 부활신앙의 날로 토착화시킨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호와와 바알을 다 함께 수용하려는 종교 혼합적 미혹이 늘 있어 왔듯이 기독교 신앙 역사에서도 수많은 종교 혼합주의적 시도가 기독교 신앙의 토착화라는 외양을 띠고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442.2)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주변 가나안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 과정에 가나안 사람들의 농경 축제일들의 토양 위에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 등 유대의 신앙 절기들을 토착화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가능하려면 그때까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출애굽의 중요 사건들을 기념하는 절기들이 정착되어 있지 않았어야 한다. 만약 그때까지 출애굽의 사건들을 기념하는 절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착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사건들의 기념일들을 새롭게 지정할 필요를 느꼈다면 그들이 출애굽의 신학적 의의와 선교적 의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선택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하여 살고있는 가나안 지방의 전통적인 절기들도 선택의 대상으로 적극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443.1)
 그렇지만 제칠일 안식일과 일요일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역사적인 기독교가 일반화시킨 일요일 주일 제도의 수립 동기와 배경은 농경 축제일들의 토대에서 이스라엘 신앙을 토착화하여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을 제정했던 동기와 배경과는 크게 다르다. 또 안식일과 유대 절기는 그 성격이 다르다. 우선 제일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제칠일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교절기를 이스라엘의 관점으로 토착화시킨 성일이 아니란 점이다. 안식일은 농경 사회와도 관련이 없고 유목 문화와도 상관이 없다. 오직 이스라엘의 여호와 유일 신앙에만 근거한 날이다. 성경에만 나오는 날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시어 인류에게 주신 날이며 모세의 때에 다시 친히 돌비에 기록하여 내리신 계명의 날이다. (443.2)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 4계명으로 규정된 날이다. 우리가 “삼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사람이 임의로 제정한 날도 아니고 임의로 바꿀 수 있는 날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 5:11)라고 썼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아는가.” 우리가 안식일에 대하여 “사람을 권할” 때에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고”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고 “사람을 권할 때도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고” 하는가. 과연 그런가. 다시 말하거니와 제칠일 안식일이 이미 하나님의 십계명에 의하여 하나님의 안식일로 정해졌으므로 새삼스럽게 다시 일주일 가운데 어느 날을 새로이 주일로 제정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구차스럽게 일요일 같은 이교의 제일을 빌어다가 그 날에 기독교적 신학을 부여하여 하나님의 성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다. 따라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그리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하여 이교 신의 이름으로 오래 일컬어져 온 날짜를 빌어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더욱이 그날 때문에 십계명의 안식일을 폐해서는 안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적인 도리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443.3)
 세상에는 버릴 수 있는 것이 있고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대체되는 것이 있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 있고 바꾸어 쓸 수 없는 것이 있다. 오장육부를 바꾸어 쓸 수 있을지 모르나 생명을 바꾸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사람의 기능 중에도 대체 가능한 기능들이 있고 대체가 불가능한 기능이 있다. 남의 집에 가서 일품을 팔고 노동을 교환할 수는 있지만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기능과 책임을 교체하거나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444.1)
 안식일은 대체할 수 없는 날이다. 안식일의 물리적 기능 때문에 교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그렇다. 늙으신 아버지가 오일장에 나가는 아들에게 먹골배를 먹고 싶으니 사오라고 했다면 아들이 보은 곶감이 더 맛있고 영양가 높다하여 곶감을 사다드려도 되는가. 먹골배를 나주배로 대체할 수 있고 먹골배를 보은 곶감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늙으신 아버지의 분부를 아들의 판단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분부를 사람의 판단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결정이나 명령으로 교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명령으로 대체되는 명령이라면 하나님의 명령일 수 없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십계명의 날이다. (444.2)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농경 사회에서 이스라엘 신앙을 토착화하는 과정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던 성일이다. 오히려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신앙을 토착화하는 과정에서도 행여나 이스라엘이 그 신앙의 근본정신을 잃지 않도록 이스라엘의 신앙을 여호와 유일 신앙으로 이끌었던 지표였다. 안식일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 유일 신앙의 모퉁이 돌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날이다. 주지하다시피 기독교는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도 기초한다. 기독교의 뿌리가 구약이다. 구약의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의 십계명이 기독교의 십계명이다. 구약과 더불어, 그리고 구약의 십계명과 더불어 제칠일 안식일 신앙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앙이었다. (445.1)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정착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신앙을 토착화 해야할 필요가 있었듯이 기독교는 기독교가 선교된 이교의 땅에서 기독교 신앙을 토착화 해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들의 하나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같은 절기들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십계명을 토착화한다고 하여 십계명을 버릴 수 있는가. 십계명을 바꿀 수 있는가. 안식일을 토착화한다고 해서 안식일을 버릴 수 있는가. 안식일을 바꿀 수 있는가. 십계명과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불변하는 것이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변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이다. (445.2)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정착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교적 미혹을 미리 경계하였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실까 하노라”(신 11:17).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명령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태만하게 지켜서는 안 된다. “삼가 지켜야 한다.” 조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는”(신 6:25) 신앙이 여호와 유일 신앙이요, 안식일 신앙이요, 기독교 신앙이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하나님을 섬기고 그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죄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말해서는 안 된다. 죄 많으면 죄 많은대로, 불완전하면 불완전한대로, 어리면 어린대로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다. 정성을 다해서 받드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 신앙이다. (4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