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Ⅶ. 전도합시다! 41. 성장하는 나라
 자 이제 다른 공식을 봅시다. (144.19)
 기별을 설교하지 않음 – 우리 생활 속에 있는 성령의 능력 = 교회가 무너짐 (144.20)
 이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주기로 한 성령의 약속을 주장하지 않거나,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이웃에게 복음전파를 시작하게 된다면 어떻게 오늘날 교회들 대부분이 가지는 문제와 우리들과 무슨 차이점으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144.21)
 공식은 간단하고 정확합니다! 만일 우리가 공식에 없는 성령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교회가 성장하거나 투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반대로, 교회가 퇴보하고 갈등만 겪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144.22)
 씨를 뿌려라
 교회들이 성장을 꿈꾸게 되면 풍성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조금의 성장뿐 아니라 사람들이 칭송하는 성장을 하게 되고 성령의 능력에 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144.23)
 초대교회에서 베드로가 놀라운 설교를 하고 삼 천명이 메시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아무도 베드로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설교가 있고 난 후에 회개한 수 천명의 사람들이 잠깐 여기 범상치 않은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서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44.24)
 씨뿌리는 비유 (마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밭에 심는 씨뿌리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졌는데 이들 씨들은 결국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씨들은 낭비하는 씨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의 직업은 계속 씨를 뿌려야 합니다. 비유에서 결과가 없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비유의 마지막에서 어떤 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8). 이런 성장은 기적입니다! 그 씨는 이와 같은 성장을 예상치 못했습니다. 너무나 풍성한 성장이었습니다. (144.25)
 이제 여러분은 이 비유의 끝을 상상할 수 있겠지요? 만약 씨뿌리는 자가 씨를 심는 일을 멈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결과가 없는 씨는 심겨지지 않은 씨입니다. 그러나 뿌려진 모든 씨는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144.26)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전부가 자라서 결실치 못했다고 제자들을 책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씨는 새들이 먹어버렸고, 어떤 씨는 자리기에 충분한 흙이 없었고, 어떤 씨는 가시가 막아서 질식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씨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씨뿌리는 데 제한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씨들이 자라지 않고 기대한 만큼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해서 씨뿌리는 것을 멈추면 안 됩니다. (144.27)
 다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했습니다. 씨 중에 가장 작은 씨가 가장 큰 나무 중의 하나가 되기까지 자란다는 것입니다. (144.28)
 예수님의 기별은 복음은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매우 작으나,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은 씨들을 뿌리는 일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시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씨 뿌리기를 계속하십시오. (144.29)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자가 그 씨를 자라게 할 능력이 없다고 분명히 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막 4:26, 27). 우리는 씨가 자라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일은 성령의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씨를 심는 일이며 씨들이 싹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144.30)
 나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가 많이 성장하시기를 바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지역의 교회들은 보통 해마다 성장이 2%에서 4%의 성장을 한다고 합니다. 이 성장은 기독교인의 가족에 속한 아이들의 침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비율의 성장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충분한 성장은 아닙니다. (144.31)
 여러분은 이와 같은 작은 비율의 성장을 침례보고로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침례보고에 관해서 성령님의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해는 성장하고 다음 해는 줄어들어 평균해서 매년 2%에서 4%씩의 성장을 평범하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초기교회의 제자들이 행한 것같이 풍성한 성장을 경험한 하나님의 교회를 만나는 성령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과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역시 결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구원을 포기한 수많은 영혼들의 마음속에서 씨가 자라도록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144.32)
 숫자의 어두운 부분
 아우슈비치 수용소에 죄수로 있었던 빅토르 E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나치 친위대들이 죄수들을 한낱 숫자로 취급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가치없는 존재로 취급했다고 합니다. 명부에 올린 사람들은 문제있는 하나의 물건이었습니다. 사람이 단지 죄수 번호로 여겨졌습니다. (144.33)
 사람이 죽었느냐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의 번호에 불과했습니다. 한 번호에 불과한 생명은 완전히 무시당했습니다. 그 번호 뒤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생명이하로 취급당했습니다. 하나의 번호 이것은 사람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고, 애쓰는 것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단지 하나의 숫자로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생각이겠습니까! (144.34)
 불행히도, 많은 교회 조직들이 교인들의 숫자를 그 숫자뒤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가치있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숫자 뒤에 서 있는 존재이며, 그 사람들의 생명은 숫자보다 하찮게 취급당하게 됩니다. (144.35)
 우리는 교인들의 숫자를 우리가 어떻게 잘하고 있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침례자 수가 얼마나 되고, 성경공부를 몇 명이 하고, 방문을 얼마나 했는가 등입니다. 전도회에 몇 명이 참석했고, 교회 십일금이 얼마나 된다는 등의 자랑하는 숫자 놀음이 멈출 줄 모릅니다. (14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