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4 부 안식일 신앙의 한 작은 주장 제 1 장  그리스도인은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친히 명령하신 날이다
 복잡한 생활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으면서까지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길 수 있으나” 어찌됐건 이 문제는 “각기 자기 마음에 따라” 확정할 일이 아닐까(롬 14:5). 안식일을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은 전혀 개인적 판단에 속한 개인의 문제가 아닐까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정황적인 문제가 아닐까.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의 일이 아닐까. (428.1)
 물론 모든 세상의 날들은 대부분 같다. 절대적인 가치에서 다를 바가 전혀 없는 날들이 대부분이다. 혹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한 경우들이 있지만, 그것도 각각 개인적인 이유에서 그러한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러한 경우는 좀처럼 없다. 날들의 사이에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차이보다는 상대적이고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날들을 놓고 이 날이 더 큰 날이다, 저 날이 더 큰 날이다 하고 다툰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또 개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자기에게 저 날이 더 중요한 날이라 한다 해서 그것을 잘못이라고 비난한다면 그것 또한 옹졸한 태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이라면 사도 바울의 권면이 백 번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은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롬 14:5) 일이지 남이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항차 주님을 위하여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긴다 하는데는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날이 그렇고 그런 날들인데 그러한 날들 중에서 어떤 한 날을 그 사람이 낫다 한다 해서 그 날이 뭐가 대단하랴 마는 주님을 위한다 하는 그 마음이야 어찌 중요하다 하지 않을 것인가. (428.2)
 세상의 날들은 이 날이다 저 날이다 해보았자 모두가 그저 그런 날들이다. 모두 24 시간의 날이고, 밤과 낮이 교차하는 날이다. 모두가 햇빛 나고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이다. 사람들이 고생스럽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인 그러한 날들이다. 도대체 차이라 할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날들 중에 특정한 한 날을 특별히 구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이 날은 특별한 날이니 특별한 날로 존중하라고 무조건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누구이시겠는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특별한 날은 그 날의 본성 속에 있는 어떤 차별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그날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높은 위엄 하나 때문에 특별한 날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존귀히 여겨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명령으로 제칠일은 특별한 날이니 특별한 날로 대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지 말고 또 날들의 외양이 모두 같다 해서 모든 날들을 같게 여기지도 말고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고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429.1)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하고 두려운 분이 어디 또 계시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크고 두려운 명령이 어디 있는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분부가 그처럼 크고 두렵지 않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시 14:1; 53: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분부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고후 5:11). 유대인이 안식일을 그토록 명심하여 지킨 것도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이 안식일을 성심으로 지킨 것도 모두 그날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령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429.2)
 관습 때문이 아니다. 관습과 하나님의 명령을 혼동하여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고전 5:11)라고 감히 말하지 못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안식일을 태만히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의 분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태도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분부를 온 마음으로 받드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도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하였다. (430.1)
 하나님의 분부는 지엄하신 분부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지키라”(신 4:2) 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 하실 것이라”(계 22:18) 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면 하나님이 그를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리라”(계 22:19)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존중되는 것은 우리의 제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에 의해서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진심은 우리의 제사에 있지 않고, 우리의 순종에 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삼상 15:22). (430.2)
 그리고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것”(롬 6:18)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전에 죄의 종이었다가 복음의 교훈을 듣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다(롬 6:16).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신 안식일을 멸시하고 제 임의로 다른 날을 더 낫게 여긴다면 어찌되는 것인가. 또는 모든 날이 다 같은 날이지 안식일이라 해서 특별한 날이겠는가 하는 태도를 고집한다면 “하나님께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 하는 그의 고백을 과연 진실하다고 믿을 수가 있겠는가. (431.1)
 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십계명 중 아홉에 대해서는 아무 이의가 없는데 안식일 계명만큼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야고보 선생은 그같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권면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자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지 않느냐”(약 2:10, 11)고 하셨다. 참으로 그렇다. 살인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시지 않았는가. 죄는 계명 하나 하나에 대한 불법이지만(요일 3:4)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십계명을 주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죄이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이다. 간음을 함으로써 간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고, 살인함으로써 살인하지 말라 한신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다. 이 계명으로 하나님께 득죄하든지 또는 저 계명으로 하나님께 득죄하든지 하나님께 득죄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계명이 무엇이건 간에 결국은 계명으로 대표된 하나님의 마음에 불복한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신 그 하나님에게 불복한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복하고서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인일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 불복하는 마음을 회개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는가? 성경 말씀을 읽고 교회에만 출입한다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 (431.2)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크고 두려운 분이다. 그분이 우리를 향하여 “너 없다” 하면 우리는 그 순간으로 없는 것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허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그 두려운 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이것이 우리의 생존의 기초이다. 우리의 기쁜 소망의 기초인 것이다. (432.1)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크고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에 천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다시 선다. 우리의 기쁨은 그같이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생존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를 살게 하시려는 사랑의 명령이란 사실에 있다. 우리에게 선한 명령이라는 사실에 있다. 세상에는 좋지 못한 명령이 많고 명령대로 순종했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명령들이 많다(겔 20:25). 이런 법은 저항해야 살고 시키는대로 하지 말아야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그대로 지키면 우리가 살게 되는 명령이다”(잠 4:4).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는 명령”(느 9:29; 겔 20:13) 이다. (432.2)
 안식일 계명도 마찬가지이다. 안식일 계명은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존하라”(창 42:18)는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는 피투성이라도 살아야 한다”(겔 16:6)는 하나님의 뜻이다. “나를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뜻”(시 119:159) 이다. “내가 이스라엘에 이슬과 같으리니”(호 14:5)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를 백합화 같이 되게 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히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안식일 계명이다. 안식일 계명의 명령을 순종하여 우리가 “곡식같이 소성하고 포도나무같이 꽃이 피고 그 향기가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게 하려는”(호 14:6, 7) 것이 안식일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향하여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명령하는 것은 “네가 생존하며 번성하기를 바라시기”(신 30:16) 때문이다. (432.3)
 그리하여 하나님이 “오늘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기를”(신 30:19) 촉구하시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의 생명이고 너희의 장수함이시니 그에게 복종하라”(신 30:20)는 것이다. (433.1)
 안식일은 우리가 여호와께 속한 신분의 표시이다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안식일이 우리의 영적 신분의 표징이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이 하나님과 우리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 증명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회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이름 석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름 위에 자신의 신분적 명칭을 가지고 산다. 이 명칭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관계에서 자기를 규정하고 대표하는 명칭이다. 누구의 남편과 누구의 아내로 불리는 명칭이다. 누구의 부모와 누구의 자녀로 불리는 명칭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자녀가 된 언약의 표징이다. 즉 안식일은 “너 위에 찍힌 여호와 하나님의 표시”인 것이다. 네가 여호와에게 속한 자라는 표시인 것이다. (433.2)
 우리는 안식일의 준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신부라는 사실을 천지간에 공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안식일을 불편하게 여기고 안식일과 결부되기를 싫어하여 안식일을 기억하지 않고 안식일은 지키지 않으면서 산다면 이는 마치 우리가 누구의 남편이나 아내로 처신하기를 기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안식일을 기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부와 자녀로 처신하기를 기피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족적 신분이나 사회적 신분을 감추고 지내려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색안경을 쓰고 뭍 사람들 속에 얼굴을 가리고 행동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목사가 목사 신분을 감추고 학생이 학생 신분을 감추고 행동하려는 자세인 것이다. 남의 어엿한 아내가 뭇 남자들 앞에서 남편 없는 여자처럼 행동하고 남의 어엿한 남편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 앞에서 아내 없는 남자로 행동하려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남자들의 유혹과 다른 여자들의 유혹을 기다리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434.1)
 이런 태도는 언약의 상대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약을 더럽히고 짓밟는 마음이요 행위이다. 이러한 삶을 성경은 우상 숭배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저버리는 태도는 우상 숭배적인 태도이다. 이런 정신과 태도로서는 언약의 생명을 지속시킬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의 언약에는 진실이 없다. 요한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저를 아노라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고 하였다. “저를 안다”는 표현은 언약의 관계에서 쓰는 표현이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서로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남편과 아내가 되는 언약의 명령과 언약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언약의 호칭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남편이라고 부르고 아내라고 부른다해도 그 호칭에는 진리, 곧 진실이 들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공적으로든지 사적으로든지 언약의 신분으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끼리의 여보와 당신이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안식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아빠-아가의 언약을 사회적으로 나타내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표징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여보-당신의 언약을 사회적으로 나타내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표징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3)고 하셨다. (434.2)
 서양 등 여러 나라에서는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성으로 자신의 성을 바꾼다. 이것은 이 여자에게 그 남자는 자기를 거룩하게 구별한 남편이 된다는 사실을 그 여자가 받아들였다는 표징이다. 그 남자가 자기를 그 남자의 하나밖에 없는 거룩한 아내로 구별하여 자기의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표징이다. 안식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속하게 하신 사실을 내가 받아들이는 행위가 곧 내가 “하나님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행위이다. 내가 남편의 성을 나의 성으로 삼듯이 “하나님의 안식일”(출 31:13)을 나의 안식일로 받아들인 것이다(출 31:14). (435.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이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하셨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럽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언약의 생명을 유린하는 것이다. 언약을 죽인다면 더 이상 남편이나 아내라는 언약의 생명체는 살아 있을 수 없다. 남자는 살아있을지 모르나 더 이상 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살아있을지 모르나 아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언약을 짓밟고 욕되게 한다면 남편을 욕되게 하고 아내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약을 파괴하는 것은 남편을 죽이는 것이요, 아내를 죽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죄는 죽음으로써 처벌되는 것이다. 당연히 언약의 가족관계에서도 끊어지는 것이다. (4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