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당수의 성경학자들이 70 이레(週)의 시작을 기원전 457년이 아니라 기원전 444년으로 잡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보충 설명을 해주겠는가?
 기원전 457년과 444년* 두 차례에 걸쳐 바사(페르샤) 왕 아닥사스다(465~423 B.C.)는 예루살렘 중건을 위해 조서를 내렸다. 기원전 457년 조서는 왕의 재위 7년의 것으로서 권한 부여 범위가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444년의 것은 왕의 재위 20년에 반포된 것으로서 예루살렘 재건에 따르는 권한 인정이 상대적으로 제한된 것이었다(에스라 7장, 느헤미야 2장 참조).

* 성서 주석가들 중에는 예루살렘 중건령이 B. C. 458년과 4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일강의 엘레판틴(Elephantine) 섬에 있는 한 유대 수비대 촌에서 연대가 기록된 파피루스들, 그 중에서도 “크라일링 6”(Kraeling 6)이라고 알려진, 연대가 이중으로 표시된 파피루스가 발견됨으로써 B.C.457년과 444년 설의 정확성이 확인되었다(Horn과 Wood의 「The Chronology of Ezra 7」을 보라. (245.1)
 우선 아닥사스다 왕이 다소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두 연대 중에 어느 것을 70 이레의 시작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그는 언젠가 사나운 사자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구출해 준 재치 있는 친구를 상 주는 대신 추방했다.14 또 한번은 그의 대리인이며 매부이기도 한 메가비주스(Megabyzus)가 이집트의 반란군 지휘자 이나루스(Inarus)에게, 항복하기만 한다면 목숨은 보장한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닥사스다는 이나루스를 처형해 버렸다.15 (245.2)
 바사(페르시아)의 조서는 다시 뒤집을 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단 6:8, 에 8:8). 아닥 사스다 1세의 줏대 없음과 변덕스러움은 메가비주스를 크게 실망시켰고, 결국 그와 그의 동료 페르샤 인들이 아닥사스다에 대해 공개적인 반역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써 바사 제국은 중대 파국에 직면 했었다. (245.3)
 바사 법에서는 한 번의 조서로서도 충분한데 아닥사스다가 예루살렘 중건을 허가하는 두번 째 조서까지 발행하게 된 것은 왕의 변덕과 메가비주스의 반란의 결과였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대규모의 반란을 지도할 당시 메가비주스는 강(江) 서편 지역의 총독이었다는 것이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그의 관할 구역이었고, 예루살렘도 그 구역에 포함되었다. (245.4)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유대인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중건하며 겪은 고생들이 잘 나타나 있다. 에스라 4장 4~6절에는 고레스(539~530 BC), 다리오(522~486), 아하수에로(486~465)의 재위 기간에 겪었던 어려움들이 소개되었다. 에스라 4장 7~23절에는 사마리아 인들이 아닥사스다 왕(465~423)의 예루살렘 중건 허가에 대해 불평했던 일들과 아닥사스다가 기원전 457년의 조서를 번복하여 성전 중건을 중지시켰던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 (245.5)
 사마리아 인들의 이 항의 상소는 지방 관리들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직접 올린 상소였고, 왕은 이 상소를 받고 그 지방 관리들에게 직접 칙답을 보냈다(스 4:7, 8, 17). (245.6)
 왕과 지방 관리들 모두 지방 총독을 통해 문서를 전달하는 관례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례적 현상은 당시 그 지역 총독이 국왕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항하고 있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245.7)
 당시의 사건 전말을 알기 쉽게 재구성해 보자. (246.1)
 538/537년에 고레스 왕이 성전 재건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스 1장). (246.2)
 520년경, 강 서편 총독 닷드네(Tattenai:이 이름이 설형 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되었다)가 당시 16년째 계속되어 온 성전 중건 공사 현황을 직접 답사한 후 다리오(다리우스)왕에게 유대인들에 대한 고레스 왕의 성소 중건 조서의 사실 유무를 확인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스 5:3~17). (246.3)
 519년 경, 다리오가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하는 새 칙령을 반포했다(스 4:1~12). 예루살렘성의 중건에 대한 고레스, 다리오, 닷드네의 언급은 없고, 성전 중건에 대한 그들의 언급만이 있다. (246.4)
 457년에 아닥사스다 1세가 세번째 조서를 내렸는데, 이것은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칙령이었다. 그는 동시에 유대 법과 바사 법을 시행할 행정관과 재판관들에 대한 임명권까지 부여했다(스 7:12~26) 물론, 이 칙령은 행정부 관리들의 주택, 관청 및 재판소, 성벽, 군인들을 수용할 성채의 건설을 허가하였다. 이러한 건물들과 방비 시설이 없이는 행정관과 사법관의 임명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246.5)
 에스라는 팔레스타인으로 직행하여 예루살렘을 중건하는 긴 역사(役事)를 지휘한다(스 7:1~10). (246.6)
 메가바주스가 10여 년 후인 기원전 448년에 반역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정은 사마리아인들이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성을 견고히 쌓아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오해하도록 유도하기에 좋은 배경을 제공했다. 아닥사스다 왕은 이같은 상황에 영향을 받아 사마리아 인들에게 직접 칙답을 내려 유대인들의 공사를 중단케 하였다(스 4:7~23). 사마리아인들은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쌓아올린 성을 허물고 성문과 성전 문을 불살랐다. (246.7)
 한편, 바사 제국의 여러 수도들의 하나였던 수사성(1세기 전 다니엘이 다니엘 8장의 묵시를 볼 때 살았던)에서는 느헤미야가 또 고국의 재건 사업을 걱정하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사람이었다(느 1:11). 그는 팔레스타인에 큰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사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중지시킨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대단히 걱정하였다. (246.8)
 느헤미야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한 동생(에스라 7장 2절에 의하면 친 동생)이 있었다. 만약, 하나니가 바사(페르샤)로 오기라도 한다면 그를 통해 그 곳 사정을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246.9)
 그러던 어느 날, 느헤미야의 동생인 하나니가 수사에 찾아왔다. 느헤미야는 이것 저것 예루살렘에 대해 궁금한 사정을 물어보게 되었고, 그를 통해 들은 소식은 하나같이 낙담스러운 것뿐이었다. (246.10)
 하나니에 의하면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것이다(느 1:3). (246.11)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여러 날 동안 슬퍼하였다”(느 1:4). 느헤미야는 동생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 너무나 마음에 충격을 받아 3, 4개월 동안 얼굴에 화색을 잃고 지냈다(느 1:1;2:1을 비교). 왕 아닥사스다는 그 때 업무 관계로 제국의 다른 지역을 순찰 중이었다. 왕이 얼마 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왕의 술잔을 받드는 사람인 느헤미야는 얼굴에 화색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24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