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서 이름을 지으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근원인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144,000인의 열두 분파의 이름으로 선택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성격에는 무엇인가 깊이 연구할 가치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285.1)
주께서 어떤 사람에게 이름을 지어주실 때, 그 이름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야곱의 이름은 길고도 고달픈 씨름 끝에, 곧 하나님과 사람으로 겨루어 그가 이긴 뒤에야 비로소 이스라엘로 바뀌었다(창 32:24~28). 요셉도 하나님의 사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을 바쳤을 때, “바나바” 즉 “권위자(勸慰子, ‘위로의 아들’)”라고 불리었다(행 4:36~37). (285.2)
144,000인의 무리는 구주께서 오실 때 사람들 중에서 구속받을 사람들로서,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어린양이 어디를 가든지 따르는 자”요, 열두 무리로 구분되어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행진할 것이며, 각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의 한 이름을 소유할 것이다(계 14:1~4; 7:4~8).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 주어진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85.3)
고대 이스라엘의 각 가정에서 장남은 그의 생득권(生得權)으로서 그의 아버지의 유산의 두 몫을 상속받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제사장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있어서 세상의 어떤 지위나 부귀, 영화보다 더욱 가치 있는 것은 영적인 생득권을 얻어 약속된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는 것이었다. (286.1)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 중 장자인 르우벤은 그의 백부인 에서처럼(창 25:34; 히 12:16) 장자의 특권을 가볍게 여겼으므로 부주의한 순간에 장자로서 누려야 할 영적 및 현세의 축복을 영원히 상실해 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더불어 간통했는데, 이는 바울이 말한 “이방인 중에도 없는”(고전 5:1; 참고 창 49:4) 죄인 것이다. (286.2)
이러한 죄로 인하여 이 지상에서 누릴 야곱의 두 몫의 상속은 요셉에게로 넘어갔고(대상 5:1), 제사장 직분은 레위에게(신 33:8~11), 그리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특권은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주어졌다(대상 5:1~2). (286.3)
임종의 침상에서 야곱은 르우벤이 장자로서 소유할 수도 있었던 성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만한 족장[야곱]이 그[르우벤]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도 있었던 자인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라”(창 49:3~4)고 묘사했을 때에 그의 목소리에 서려 있던 슬픈 어기(語氣)를 상상할 수 있다. (286.4)
르우벤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근본적으로 그에게 부여된 “탁월한 품위”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에게 합환채를 가져다준 친절(창 30:14)이라든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 했을 때,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시도한 노력(창 37:21~22, 29; 42:22) 등이 이에 속한다. (287.1)
르우벤은 격동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끓는 물”과 같았다. 형제들이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려가려고 했을 때, 르우벤이 베냐민을 안전하게 아버지에게 다시 데려오겠다고 맹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을 받지 못했던 사실을 보면, 야곱은 그의 말을 별로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유다가 어린 동생의 보증인이 되겠다고 약속했을 때, 야곱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창 42:37~38; 43:8~9). (287.2)
르우벤의 불안정한 성격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물려진 듯이 보인다. 이와 같은 이기적인 성격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정복한 처음 땅을 르우벤 지파가 소유하고자 원했을 때에도 드러났다. 모세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으나 그들의 요구대로 “요단 맞은편”을 그들에게 주었다(신 29:8; 수 1:12~13). 그러나 이런 결과로 인하여 그들은 B.C. 740년, 앗수르의 왕 디글랏~빌레셀에 의해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민 32:1~33; 대상 5:26). (287.3)
야곱의 예언 즉 “너는 탁월치 못하니”라는 말은 르우벤 지파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지파 가운데서는 사사도, 선지자도, 영웅도 출현한 예가 없으며, 단지 다윗의 군대 가운데 용감했던 30명의 부하와 더불어 아디나가 있을 뿐이었다(대상 11:42). (287.4)
이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 위해 헤브론으로 갔던 갓, 므낫세, 르우벤 지파의 12만 명 가운데 속했던 자들이다(대상 12:37~38). 다단과 아비람은 르우벤 지파의 고라와 더불어 이스라엘 진영에서 반란으로 소요를 일으켰고, 그들의 멸망은 동일한 계획을 꾀하는 사람들에게 실물교훈이 되었다(민 16:1; 신 11:6). (288.1)
르우벤 족속이 원하여 자리 잡은 곳은 모압과 인접한 곳이었다. 그들의 도시 헤스본, 엘르알레, 기랴다임, 느보, 바알므온, 십마 등은 이스라엘의 도시가 아니라 모압에 속한 도성들이다(민 32:3, 37). (288.2)
이처럼 행정구역이나 또는 민족적 신앙의 중심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들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저버린 것은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목전에서 진멸한 그 땅 백성의 신들을 좇았다.” 그 후에는 한때 수리아의 왕 하사엘이 그들의 영토를 소유했다는 정도밖에는 르우벤 지파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듣지 못한다(왕하 10:32~33). (288.3)
지파로서 그들이 소유한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기를 바라셨던 과업을 성취하는 일에 완전히 실패하자, 여호와께서는 불(Pul)과 디글랏-빌레셀로 하여금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의 북부로 옮겨가도록 허락하셨다. 그곳에서 그들은 70년간의 포로기간 끝에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이 약속의 땅에 다시 모이게 될 때까지 체류하였다. (288.4)
이 지파의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의 실패를 기록한 것이다. 장자 르우벤이 지도자로서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모압의 국경 지대에 있던 르우벤 족속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진실함을 증명했어야 했고, 이방인들을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횃불이 되었어야 했으나 그들의 조상처럼 그들은 “끓는 물”과 같았다. (288.5)
비록 그 족장과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르우벤이란 이름은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새 예루살렘의 진주문들 중 한 문에서 바로 그 이름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4,000인 중에서 12,000명이 이 족속에 속하여 르우벤의 이름 하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갈 것이다. (289.1)
어떻게 그 생애가 실패 투성이인 사람이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은 경건의 크나큰 비밀에 속한다. 자신의 생애를 완전히 파선시켜버린 도둑이 어떻게 낙원에서 구주와 함께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즉 죄를 사유하시는 구주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될 수 있다. (289.2)
모세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그의 고별 축복을 선포했을 때, 르우벤 지파에 대하여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노라”(신 33:6)고 선포하였다. 우리는 “물처럼 끓는” 성격의 사람이 어째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르우벤이 추구한 진로는 어떻게 이러한 자가 승리자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해준다. (289.3)
여러 가지 관점에서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의 표상이라고 일컫는 므깃도 전쟁 당시에 “르우벤 시냇가에서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도다”(삿 5:16)라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 (2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