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 중에 충성스런 일본인들이 “강제 수용소”에 강제로 수용된 사실은 사회가 곤경에 빠질 때에는, 심지어 미국같은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기본권이 묵살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339.7)
 필자는 필자의 일본인 급우가 갑자기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던 그 월요일 아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340.1)
 미 대법원은 법률상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동 방위”의 명분을 내세웠다. 일본의 후예인 소수의 미국인들이 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를 했고 당시 전쟁은 계속 수행중에 있으며 “전쟁은 고통의 집합체”라는 것이었다.15 (340.2)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헌법 관계 권위자는 일본계 미국 시민 7만 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우리를 경고하고 있다. (340.3)
앞으로 발생되는 전쟁에서는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또는 정치적 소수파에 속하는 그 어떤 사람도, 사회적 편견과 편협성이 “군사적 필요”라는 명분 하에 억압 행위로 나타나, 자유 사회 성원들의 기본권이 박탈당하는 불이익을 면하리라는 보장을 받을 수 없다.16
(340.4)
 일단 군사적인 위기가 발생하면 “종교적인∙∙∙소수파에 속한 어느 누구도”, 사회 공동체의 편견 이 급박한 사회 정세를 빙자하여 개인의 기본권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고는 요한계시록 13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잠시 후에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다. (340.5)
 우리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예언은 미국이 구세계인 로마 그리스도교의 “우상”을 설립하는 과정의 일환으로서 어떤 소수파의 종교적 권리를 파괴하는 때가 오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이 예언은 미국이 옛 로마 그리스도교의 “죽게 되었던 상처”가 치유된 후에 이 일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340.6)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의 지위를 1800년 대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죽게 된 상처가 거의 치유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340.7)
 로마 교회에 대한 세상의 태도가 날로 달라지고 있음
 나폴레옹은 1798년에 교황이 다시는 존재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1801년에 새로운 교황과 더불어 “콩 코르다”(Concordat)라고 하는 국가와 교회 간의 협정을 조인하였다. 성경 예언의 말씀 그대로 죽게 된 상처는 상처에 불과했으며 로마 교회를 죽게 하지는 못했다. 한편 1870년에 신생 이탈리아 통일 정부는 수세기에 걸쳐 교황청의 소유물이었던 이탈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을 교황청으로부터 빼앗음으로써 잠정적으로 교황청의 비애를 가중시켰다. 교황 비오 9세와 그를 계승한 모든 교황들은 1929년까지 옛 거주지인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칩거해야 했다. 한때 천하를 호련하던 교황권이 가택 연금의 고통 속에 있었던 것이다. (340.8)
 그러나 1929년에 베니토 뭇솔리니(Benito Mussolini)는 교황 비오 11세와 새로운 협약을 체결하여, 성 베드로 사원을 포함한 108.7 에이커의 바티칸 시(市)를 교황령으로 하는 교황 국가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이로써 교황은 다시 사제와 군주를 겸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죽게 된 상처가 치료되고 있었던 것이다. (340.9)
 상냥하고 마음이 활달했던 교황 요한 23세(John XXIII. (1958~1963))는 특히 그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승인을 얻은 절차상의 개혁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크게 회복시켰다. 1980년 대에 들어와서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가 생존한 인물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부상했다. 1984년에 한 뉴기니아 사람은 그를 가리켜 “세계 제일의 예수 사람”이라고 칭송해마지 않았다. (340.10)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의 변화
 죽게 된 상처가 나았다는 현저한 증거가 미국의 일반 대중의 여론 속에 확연히 들어나 있다. (340.11)
 

1854년에 반가톨릭 감정은 격렬하였다. 어느 날 밤 성난 시민들은 워싱턴 기념관으로 몰려가 바티칸이 기념관에 기증한 한 대리석 받침대를 포토맥 강물 위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341.1)
 1800년 대에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미국 대중의 적대감이 거세게 파도쳤다. 1840년 대에는 아메리카인의 당(American Party), 무지(無知)의 당(Know—Nothing Party)등 반(反) 가톨릭적인 정당들이 매사추세츠 주 의회의 의석을 거의 석권했으며 뉴욕 주와 펜실베이니아의 주 의회에서도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그 당시 미국인의 상당수가 동부 해안 지역에 밀집되어 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시사하는 의미가 더욱 커진다. (341.2)
 1846년에 스티븐 W. 케어니(Stephen W. Keamy) 대령은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빼았으려고 그의 서부 군(Army of the West)을 이끌고 캔자스 시로 진격할 때, 그의 군대 내의 가톨릭 병사들을 위해 약간 명의 가톨릭 사제(司祭)들을 부대로 초청했었다. 이때 그는 워싱턴 당국으로부터 통렬한 비난의 포화를 받아야 했다.17 (341.3)
 1852년에 교황 비오 9세가 워싱턴 기념관을 위해 대리석 한 덩어리를 보냈을 때에도 맹렬한 대중 항의가 있었다. 결국 이 대리석은 대중의 거센 여론 때문에 기념관 안으로 옮겨지지도 못했다. 그 후 2년이 지나서도 계속 그 감정은 삭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일단의 분노한 미국인들이 창고에 보관된 대리석 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밧줄로 묶어 포토맥 강으로 끌고 가 쳐 넣었다.18 (341.4)
 1세기 후에도, 심지어 1929년에 못솔리니가 협정을 체결하여 유럽에서는 가톨릭의 상처가 많이 치유된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도 미국인들의 반(反)가톨릭 감정은 계속 거세기만 하였다. (341.5)
 1951년 10월 20일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만(Hary Truman)이 바티칸 주재 미국 대사 임명 동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을 때 미국은 항의와 고뇌의 소용돌이에 파묻혔다. “이 나라에 있는 개신교 집단 중 공식적으로 아주 신랄하게 항의를 제기하지 않은 집단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대통령은 그의 제안을 철회하고야 말았다.19 (3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