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요한계시록 연구 요한계시록 11:19~14:20 — 참된 어머니와 그 자녀들 3. 어찌하여 하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지 않는가?
 갈수록 상황이 복잡해 짐
 그러나 대쟁투가 시작하기가 무섭게 땅에서는 이미 발생했던 것보다도 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330.1)
 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즉시로 죽지 않았다. 그들은 그 순간부터 죽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그들에게 하나님과 죄에 대해 좀더 알 수 있는 시간, 상황을 재고하고 증거를 심사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 3:9)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또 다른 오해를 받게 되셨다. “악한 일이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전 8:11) 해졌다. (330.2)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너무나 자비심이 많으시기 때문에 그분이 경고하신 그대로 너희에게 영원한 형벌을 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조들이 죄를 짓고도 계속 살아나간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진실로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330.3)
 하나님의 친절성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약점까지도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자신들의 죄된 길을 극복하려고 애쓰던 사람들은 거듭거듭 실패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또 다른 의문을 낳았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330.4)
 대쟁투의 과정에서 제기되는 여러 질문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은 불공평하고 이기적이어서 우리들의 순진한 기쁨을 빼앗는 규칙들을 강요하시는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2) 그는 너무나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순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란 말인가?

 (3)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시는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는 것인가? (330.5)
 위의 질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각기 타고난 성향에 따라 그 질문이 달라진다. (330.6)
 하늘이 이 질문에 답한다.
 하늘의 회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효과적인 한 방법으로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들 가운데 한분이신 아들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시는 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우주 세계 중 죄로 얼룩진 이 땅에서 약속된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살 작정이셨다(창 3:15). 그는 수천 년간 죄의 영향으로 그 성정이 연약해진 인간의 수준에 서서 피조물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능히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작정이셨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들이 그를 살해할 때에라도 그들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의 사랑의 율법은 인간들에 의해 능히 준수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보이려 하셨다. (330.7)
 우리 시조들이 처음으로 죄를 지었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다는 결정이 하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베드로전서 1장 19, 20절에서는 예수님을 “창세 전부터(죽기로) 알리신바(예정하신)” “어린 양”으로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은 예수님을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희랍어 원문에 좀더 엄격한 번역이다(N.I.V., K.J.V.를 참고하라). (330.8)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놀라운 소식을 천사들에게 처음으로 공포하셨을 때 천사들 중 그리스도 대신에 그 일을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자청하고 나선 자가 있었는가? 마땅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그들의 신령하신 지도자가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은 깊은 고통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330.9)
 그러나 천사 중 어느 누구가 그리스도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겠다고 자청하였다 해도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부했을 것이다. 천사의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천사의 사랑을 드러내 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할 수가 없다. 오직 성 삼위의 한 분만이 그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 (331.1)
 그리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 8). (331.2)
 예수님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셨고 평판이 좋지 못한 마을에서 성장하셨다(요 1:46). 그는 자라면서도 끊이지 않고 남의 입방아에 올랐고 터무니없는 비난과 박해를 당하기 일쑤더니 끝내는 십자가에까지 달리셨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친절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생활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들을 기쁘게 해 주셨다. 복잡한 시장 거리도 그가 지나가신 뒤에는 기쁨이 흘렀다. 흉칙한 문둥병자들과 더러운 중풍병자들, 그리고 다리와 팔에 만성적으로 피를 흘리는 사람들도 그가 만지고 나면 씻은듯 병이 나았다. (331.3)
 그는 남의 더러운 발까지 씻었다.
 샌들을 신고 먼지 투성이의 길을 다니다 보면 발이 쉬 더러워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고대 사회에서는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를 대접하기 전에 종을 시켜 발을 씻겨드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발을 씻길 때 손님들의 기분이 얼마나 상쾌했겠으며 발씻은 물은 얼마나 더러웠겠는가? (33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이유 중에는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우리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331.5)
 예수님도 길을 걷게 되면 여느 사람들처럼 발이 쉬 더러워졌다. 최후의 만찬이 있던 날 저녁에는 제자 중 누군가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어야 옳았다. 제자들은 저녁마다. 번갈아 가면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 저녁만은 달랐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일에 정신을 쓸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앞으로 예수님이 세울 새 정부의 높은 직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남의 발을 씻는 따위의 천한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332.1)
 그리하여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이다(요 13장). (332.2)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친절이 뜻하는 어떤 영적인 의미를 알듯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요 13:7). 예수님께서 그 일을 다 마치셨을 때 제자 중 하나인 빌립이 예수님께 요청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3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