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하신 성령님 서문 서 론
 왜 성령께서 구약시대에는 충만히 임하지 않았는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그러면 예수께서는 언제 영광을 받으셨는가? 그분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이후이다. (17.3)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 24; 참고 12:28; 13:31, 32). (18.1)
 오순절 며칠 후에 베드로는 영감을 받아 선포하기를 이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회롭게 하셨느니라”(행 3:13). 이처럼 성령은 오순절 이후 이 땅에 충만히, 그리고 영원히 오셨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간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17) (18.2)
 우리는 풍성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 받고 있다. 우리는 이 축복을 구하고 누려야 한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귀중한 권면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18.3)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거룩한 감화가 끝 날까지 당신을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은 마땅히 인식되어야 할 만큼 인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성취는 응당 나타나야 할 만큼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결과는 예상된 바와 같이 영적 가뭄, 영적 흑암, 영적 타락과 죽음뿐이다. 사소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 교회의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이요 다른 모든 축복도 함께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은, 비록 무한하게 제공되었을지라도 부족하다.” (18.4)
 “복음사업을 그처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부재(不在)이다. 학식과 재간과 능변과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온갖 재능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없으면 마음을 전혀 감동시킬 수 없고, 결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면, 가장 보잘것없고 무식한 그분의 제자라도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주에서 가장 고상한 감화가 흘러 나가게 하는 통로로 삼으신다.” (19.1)
 “이것이 우리가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성령의 선물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는가?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가? 주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고자 하신다. 성령의 침례를 위하여 모든 교역자는 하나님께 탄원해야 한다. 특별한 도움과 하늘의 지혜를 얻기 위해 함께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할 때 그들은 지혜롭게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특별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교사들을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18) (19.2)
 “예수께서는 하늘 궁정으로 되돌아가시고자 그분의 제자들을 떠나시기 바로 직전에 성령의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하셨다. 이 약속은 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백성들 앞에 제시되는 일은 얼마나 드문 일인지 모르며, 그것을 받는 것에 대해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19.3)
 “이 지극히 중요한 주제에 대해 침묵한 결과로 모든 영적 수고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선물에 대한 이 풍부한 약속만큼 실현되지 않은 약속도 드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령의 약속은 이따금 우리의 설교 속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우연히 지나쳐 갈 뿐이고, 그것으로 그만이다. 예언들을 연구하고 교리들을 설명해 왔지만, 영적 능력과 능률에 있어서 성장하고, 확신을 끼치는 설교를 하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교회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목회적 노력이 크게 부족하다. 이 주제는 미래 어느 때에나 고려되어야 할 것처럼 도외시되었다. 다른 축복들과 특권들은 백성에게 제시되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얻고자 하는 갈망감이 교회 내에서 일깨워졌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인상은 이 선물이 지금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며, 미래 어느 때에 교회가 그것을 받을 필요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20.1)
 “믿음으로 주장하기만 한다면 이 약속된 축복은 다른 모든 축복들을 함께 몰고 올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후하게 주어질 것이다. 원수의 간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지극히 적은 분량의 은혜의 소나기가 갈한 영혼들에게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해야 하며 하늘로부터는 적은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오류와 흑암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다른 영혼들에게 나누어 줄 빛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오랫동안 교회는 적은 분량의 하나님의 축복으로 만족해왔다.” (20.2)
 “그들은 무한한 값을 치르고 사들인 고상한 특권들에 도달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 그들의 영적 힘은 미약해졌으며, 그들의 지지부진한 절름발이 체험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행하도록 하신 사업에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게 했다.” (21.1)
 “그들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영혼들을 책망하고 회심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크고 영광스러운 진리를 제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요청과 받아들임을 기다리고 있다. 진리의 거룩한 씨앗을 뿌리는 이들은 기쁨으로 추수해 들일 것이다.”19) (21.2)
 서부 텍사스 주의 이란 시에 ‘예이츠 풀’(Yates Pool)이라는 유명한 유전 지대가 있다. 1930년대 세계적인 불경기 때에 이 지대는 아이라 예이츠(Ira Tates)라는 사람의 목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예이츠는 목장 운영만으로는 많은 부채를 갚을 수가 없어 목장을 잃어버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양을 목축하는 것 외에는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21.3)
 그러던 어느 날, 석유 회사에서 나온 지질 관측단이 그 마을에 오게 되었는데, 그들은 예이츠의 목장이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만한 지형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이츠에게 유전 시추 작업 허가를 요청하게 되었고, 예이츠는 토지 임차 계약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21.4)
 지하 1,115피트에서 굴착기는 거대한 석유 저장소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첫 번째 유정에서 하루 8만 배럴의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요즘 시세로 하루 250만 달러에 상당하는 양이었다. (21.5)
 그리고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계속해서 많은 유정들이 발굴되었다. 그 중 몇 개는 처음 유정의 두 배의 산출량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의 시험 결과, 하나의 유정에서 앞으로 30년간 계속하여 하루 12만 5천 배럴을 퍼낼만한 기름이 묻혀 있었다. (22.1)
 이 모든 것을 예이츠가 소유하게 된 것이다.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그가 사실은 믿을 수 없이 어마어마한 기름 호수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곳에 기름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22.2)
 오늘날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축복을 알지 못한 채 영적으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삶의 염려와 근심에 매여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그런 삶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미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22.3)
 참고 문헌
 1) Herman Bavinck, 개혁주의 신론(The Doctrine of God).이 이승구 역(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8), 485; Alister E. McGrath, 역사 속의 신학(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김홍기 외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388.

 2) 박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3), 14.

 3) Ted Peters, 삼위일체 하나님:신적 삶 안에 있는 관계성과 시간성(God as Trinity: Relationality and Temporality in Divine Life. 이세형 옮김 (서울:컨콜디아서, 2007), 88.

 4) Karl Barth, Church Dogmatics, trans. Geoffery W. Bromiley (Edinburgh: T. and T. Clark, 1975), 1/1 :406.

 5) Bavinck, 413.

 6) Thomas F. Torrance,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One Being Three Persons(Edinburgh:T. and T. Clark, 1996), 2.

 7) Bavinck, 485.

 8) 아리우스주의자들이나 여호와 중인, 그리고 근년에 재림교회 안에서 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다. 특히 2000년 토론토에서 개최된 대총회에 참석한 일부 재림신자들이 부스를 차려놓고 반 삼위일체주의와 준 아리우스주의(semi-Arianismp) 초창기 재림교인들의 신념이었다는 이유로 삼위일체 신앙을 부인하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에도 들어와 전파되고 있다 . 모두가 성경을 오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 삼위일체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자료는 다음과 같다. Fred Allaback, No New Leaders No New Gods! (Creal Springs, IL: Fred Allaback. 1995); 고진주 엮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연극인가 실제인가?(맞춤토탈, 2009).

 9) 이한수, 신약이 말하는 성령 (서울; 솔로몬, 2009), 16.

 10) Kirgen Moltmann, 생명의 영(Der Geist des Lebens).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117.

 11) Moltmann,126.

 12) Moltmann, 131.

 13) 카를 바르트(Karl Barth)는 신학을 다시 쓴다면 기독론이 아닌 성령론을 중심으로 쓰겠다고 말하였다. Moltmann, 생명의 영.

 14) Moltmann, 생명의 영.

 15) Ellen G. White, 사도행적 (Acts of the Apostles), 39. (이하 모든 엘렌 화잇 저서의 인용문 쪽수는 원문 쪽수임)

 16) White,사도행적, 37.

 17) White, 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Testimonies the Ministers and Gospel Workers), 511.

 18) White, 교회증언 (Testimonies for the Church), 8:21, 22.

 19) White, 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중언. 174,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