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서론 — 과거를 반추함 : (교리 이해의 점진성)
 교리 문제와 연관될 때는 변화라는 개념에 늘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데, 이해할 만하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교회를 진리, 모든 진리, 오직 진리만을 지닌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13.1)
 진리는 늘 신장(伸張)됨
 하지만 나는 우리 중 가장 철두철미한 가운데 한 분이며, 우리가 믿는 대로 예언 은사의 빛을 받은 엘렌 G. 화잇이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롭고 뜻깊게 생각한다. (13.2)
 “드러나야 할 진리가 더 이상 없다거나 성경에 대해 우리가 내린 모든 해석에 전혀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자는 아무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 백성들이 여러 해 동안 어떤 교리를 진리로 지지해 왔다는 사실이 우리의 이해가 무류(無)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세월이 오류를 진리로 만들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진리는 공명정대한 것이다. 면밀한 연구가 교리의 어떤 부분을 잃도록 하진 않을 것이다.”1) (13.3)
 나는 교리가 발전되어 가는 근본적인 이유가 우리의 인간성, 제한성, 근시안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특정 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깨달을 수는 없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13.4)
 역사의 결정적인 시점에 교회는 영적 근시안의 성격을 띤 문제에 시달림으로, 앞을 내다보거나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권고를 온전하게 파악하기가 어렵게 되었던 것 같다.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혹은 관념적인 것을 막론하고 교회의 직접적인 배경이 진리를 제한하며, 교회의 눈을 가리개로 덮는다. (14.1)
 그런 시기 중 하나가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날 밤에 제자들로 깨닫게 하려는 그리스도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혼란에 빠져 있던 때이다. 또 다른 경우는 종교개혁 시기인데, 마르틴 루터 같은 거장도 수 세기에 걸쳐 전통이 쌓아 놓은 장벽의 어떤 것 너머는 볼 수 없었다. 셋째 경우가 바로 1844년 곧 대단한 신학적 통찰, 큰 기대, 고조된 영적 열성의 시기였으나 교회 역사상 비길 데 없는 실망 중 하나를 목격해야 했던 시기였다. 밀러주의자들은 여러 면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했는데도, 말하자면 정신적인 장애물로 시달렸고 그 때문에 그들이 몇몇 기초적인 성경 진리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특별히 그들은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한 예수님의 분명한 진술도 고려하지 못했다. (14.2)
 그런데 하나님께서 절망하고 깨져 낙담한 당신의 백성 일부에게 놀라운 성소 진리를 가지고 나타나신 때는 다름 아닌 곤란한 시기인 1844년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실망과 눈물어린 눈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을 그들이 모두 다 보았다고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는 지는 항상 나의 관심 밖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좌절의 순간에 이해 할 수 있고 그들 앞에 있는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을 만큼만 그들에게 주셨다고 늘 믿어 왔다. (5.1)
 성소 교리는 재림교회 신조 가운데 가장 민감한 분야 중 하나이며, 따라서 재림교회의 사려 깊은 신학자라 해도 주저함 없이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 분야의 연구를 감행한 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 점에 대해 과민한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며 타당성이 없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나는 이제는 우리가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솔직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터놓고 생각해 보아야 할 만한 위치에 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5.2)
 이제는 우리 뒤에 상당한 역사가 쌓여 있으며, 그 역사의 일부는 성소 교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경직되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런 맥락에서, 성소 교리의 중심 국면인 속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명확하게 수정하는 것이 나에게 각별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5.3)
 1905년에 앨비언 폭스 밸린저(Albion Fox Ballenger)2)가 몇 가지 다른 주장과 함께 특히 십자가에서 속죄가 끝났다고 가르쳐,3) 재림교회 지도자들의 분노를 샀다. 그에 대한 심의(審議)가 그 해 대총회가 열렸던 장소인 매릴랜드 주의 타코마 공원에 있는 한 작은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안수받지 않은 젊은 목사였던 밀리언 로리츠 앤드리 어슨(Milian Lauritz Andreasen)4)은 동료 목회자 L, H. 크리스천(L. H. Christian)과 함께 번갈아 가며 서로의 어깨 위에 서서 새벽 심문 절차를 어떻게 엿들었는지 말한다.5) 날이 밝아 다른 회의들이 진행되는 동안 앤드리어슨은 논쟁에 휘말린 그 추방된 자의 견해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냈다. 더 경험 있는 형제들은 바빠서 그에게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시간이 많은 밸린저는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나눴다.6) (16.1)
 아이러니컬하게도, 약 50년 후 앤드리어슨 자신이 바로 그 속죄 문제를 놓고 교회 지도자들과 격론을 벌였을 때 반대 상황이 왔다. 흥미롭게도 이번에는 앤드리어슨이 끝마쳐지지 않은 속죄 곧 1905년에 교회 지도자들이 옹호했던 바로 그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하자, 십자가에서 속죄가 끝났다는 견해를 변호한 것은 교회였다.7) (16.2)
 이 사건을 통해 성소에 대한(혹은 교리의 다른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이 유동적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물론 온당치 않다. 또한 결국 교회는 장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빗나간 입장을 공격할 것이라고 단정지어도 안 된다. 오히려 이는 교회가 폐쇄적이지 않으며, 더디지만 마침내는 성령이 인도하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 준다. (17.1)
 그러므로 우리는 성소 교리에 접근할 때, 마치 우리의 선구자들이 잠든 후 교회가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 존재의 경험은 변하고, 따라서 경험의 변화와 더불어(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변화도 따라온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결코 정적(攝的)이지 않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밝아져서 결국 온전한 낮에 이른다(잠 4:18). 우리는 선구자들의 어깨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그들보다 좀 더 멀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의 호기(豪氣)의 유산에 욕을 돌리는 것이다. (17.2)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음을 시인할 때, 사실상 그것은 그들 역시 굳건한 대지(臺地)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마도 이 책에서 교리적 기둥들의 흔들림을 예상하는 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토대가 굳건하면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그것을 절대 흔들 수 없다. (17.3)
 내가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반추”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내 자신을, 어떤 의미로도 성소 교리에 대한 재림교회 입장의 결정적인 천명(혹은 재천명)을 제시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 주제는 방대하여, 그것의 모든 국면을 탐사하려면 다수의 연합된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독자들이 이 노력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하신 구원(그것이 바로 성소 교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곧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진리 중 몇 장을 이해하려는 한 학생의 시도쯤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 (18.1)
 단순성을 유지함
 방대한 학술 서적을 쓰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재림교인도 구해서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전문 용어와 학술적인 인용문으로 빼곡하여 일반 독자는 접근할 수도 없는 책으로 보이기를 원치 않았다. (18.2)
 그렇지만 나는 최소한의 학술적인 용어와 인용문 없이는 진행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한 근거를 대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용어와 참고자료를 전적으로 피할 수 없는 영역이 몇 군데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사용되는 경우 이 책의 유용성을 증진시켜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18.3)
 아무도 모든 점에서 나와 일치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불가능하며 불필요하다. 수많은 세세한 사항과 읽다가 맘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겠지만, 독자가 나와 함께 하늘의 열린 문들을 통해 우리의 구속의 신경 중추인 보좌실을 한두 번 힐끗 엿볼 수만 있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아무쪼록 이 하찮은 노작(勞作)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장엄한 성소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이르고, 성소의 찬란한 중심에 계신 분께 더욱더 온전히 굴복하기를 기원한다.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