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3장 하나님께 봉사함 (민수기 7~8장)
 또 다른 빛이 성막의 바깥 “거실”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인간이 그 불을 붙인 것이었다. 제사장은 매일 아침마다 등대의 등잔들을 손질하고, 밤새 꺼지지 않고 타도록 매일 저녁 그것들에 불을 붙였다(출 27:21; 30:8). 주님의 빛은 항상 타오르고 있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기 때문이었다(시 121:4). (51.2)
 빛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유용한 조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바른 방향으로 빛을 비추도록 해야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셨다. “등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취게 할지니라”(민 8:2; 출 25:37 참조). 다시 말해서, 등잔은 전 지역을 환하게 비출 수 있도록 성막의 바깥방의 중심부를 향하여 놓여져야 했다. (51.3)
 예수님 또한 우리의 삶으로부터 나오는 빛이 그 직임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51.4)
 우리의 빛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그분께로 다시 반사되어야 한다. 요점은 관심을 우리 스스로에게가 아니라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빛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실족하거나 어둠 속에서 허공을 날아가지 않을 것이다. (52.1)
 일꾼들에게 자격을 부여함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레위 지파 출신이었다. 그 동일한 지파 출신의 다른 남자들이 성막을 돌보는 일에 그들을 조력할 것이었다. 이 레위족 사람들은 제사장으로 성별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거룩한 성물들 가까이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정결케 되고,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과 분리되어야 했다(민 8:5~22). 그들의 정결은 육적인 제의적 부정, 특별히 사체로 인한 오염으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런 부정은 과거에, 그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처럼, 여러 경우들에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껏 정결케 될 수단도 없었고, 또 그럴 이유도 없었다. (52.2)
 신체의 제의적 부정이란 개념은 우리에게 일종의 매우 이질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9살 때, 네브라스카주 링컨 시에 소재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 우리 반의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의 물건이나, 그녀들이 손으로 만진 것들을 만지기를 피했다. 여자라는 종(種)은 남성성을 계발시키는 일을 위협하는 “쿠티스”1(cooties)라는 일종의 전염병을 옮긴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쿠티스”를 피하고, 서로 귀가 째지는 듯한 소리로 그것에 관하여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은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물론 “쿠티스”는 우리의 사춘기가 되고는 살아남지 못했다. 치명적인 호르몬들이 “쿠티스”와 거리를 두려는 우리의 갈망을 죽여버렀기 때문이었다. (52.3)
 성인이 되서야 나는 “쿠티스”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 한 마리의 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스럽고 어린 4학년 여자아이들 몸에 기어다니는 모습을 한 순간도 상상할 수 없다. 소년들에게 있어서, “쿠티스”는 전이(轉移)가 가능한 여성성의 특질을 상징한 개념 범주였다. 의심할 나위 없이 발달심리학자들은 이런 류의 사고를, 소년이 자신의 성별을 긍정할 필요가 있는 다소 불안정한 시기를 대표하는 듯하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쿠티스”의 범주는 소유권이나 만짐에 의하여 특별히 그녀와 연관되어지는 인간의 신체적 근원(소녀)과 사물들과 관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 소년들은 그것을 우리가 피할 필요가 있는 일종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53.1)
 “쿠티스”는 인간의 신체적 부정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한 작은 사례이다. 이런 부정은 여느 보통의 먼지로부터 초래되지 않았다. 비록 어떤 질병들은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긴 하지만, 부정을 가져오는 것은 질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한다는 의미에서의 죄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은 죄로부터 초래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생활주기와 연관된 개념 범주였다 (창 3장; 롬 5:12; 6:23). 그래서 필사(必死)를 강조하는 “부정들”은 사체(민 19장), 질병을 유발하는 피부의 악화로 초래된,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생활 (레 13,14장; 민 12장),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생식기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남자와 여자의 다양한 유출들 (레 15장)로부터 초래될 수 있었다. 출산을 통해 새 생명이 생산되었지만,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산모의 산후 출혈은 그녀를 부정하게 만들었다(레 12장). (53.2)
 “부정한” 사람은 누구이든, 무엇이든, 거룩한 성물들이나 장소들과 접촉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처럼, “여성”“남성”을 나누는 대신, 신체의 제의적 부정은 “타락한 인간”“거룩함”을 분리시켰다. 부정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가치가 덜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결혼생활의 친밀성을 즐기고, “생육하고 번성”(창 1:28; 9:1) 하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으로써 인류가 계속 존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정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계명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로서, 부모님을 장사지냄으로써 부정하게 되는 것 또한 필요하였다. (54.1)
 우리는 이것을 “제의적 부정”으로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정으로부터 지켜져야할 필요가 있는 거룩함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 땅에 거주하고 있는 성소와 그 예식 시스팀의 거룩함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절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제의적 부정들과 그것으로부터의 정결과 관련된 일련의 지시사항들을 요약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신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내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 할지니라”(레 15:31).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은 성막을 그 안에 품고 있었기 거룩하였다. 심각하게 부정한 사람들이 진 밖에 머무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민 5:1-4). (54.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과 자신을 멀리 두시는 일을 강력하게 고집하셨다.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철학과는 달리, 죽음은 결코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죽음이 신들과 함께 하는 불멸의 생활의 다음 단계로 가는 거룩한 통로였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모든 무덤은 성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상태로의 환생 (혹은 재투옥)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이다. (55.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은 생명의 주이시다(마 22:32). 그분은 죽음은 거룩하며, 따라서 그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사상을 배척하신다. 성경에서 죽은 인간의 사체는 부정하며, 따라서 성물들이나 거룩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레 21:10-12; 민 6:6-9; 19:11-22). 죽음은 악하며 죄의 결과이다(창 3장; 롬 6:23). 하나님은 단지 그분의 대적이 만들어낸 허구적 개념인 “불멸의 영혼”을 그저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 3:4), 우리에게 영생을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요 3:16). (55.2)
 이제 이스라엘의 성막과 성전은 사라지고 없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성소에서 행해지고 있다(히 7-10장). 하나님의 쉐키나 현존은 더 이상 지상의 거주처에 거하지 않는다. 이 지구상에는, 이스라엘의 성막과 그것을 둘러싼 백성들의 진이 거룩하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거룩한 장소는 아무 곳에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특별히 나아갈 수 있도록 의도된 장소에서 우리의 의식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가능한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거룩한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하여 싸울 필요가 없다.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이 세상의 거룩의 영역으로부터 이와같은 부정을 분리하기 위하여 물리적인 제의적 불결에 관한 성경의 법들을 준수할 필요도 없다. (55.3)
 어떤 이들은 그 뜻은 좋지만, 그 달의 특정 기간에 여성들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포함하여 정결의 법들을 필수적인 요구 사항으로서 부활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은 잘못된 길로 인도되고 있으며, 불필요한 짐과 혼란을 부과한다. 그들은 또한 일관성이 없으며, 그것들이 이스라엘이 전체적으로 준수해야 했던 체계에 속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율법들을 골라잡는다. (55.4)
 유대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어느 누구도 오늘날 온당한 방식으로 정결예식과 정결법을 준수할 수 없는 바, 왜냐하면 이 시스템은 성막/성전의 기능을 하는 곳에서 정결케 하는 제사를 드릴 것을 요구하는데 (레 12:6-8; 14:10-20 등), 이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사체로부터의 오염으로부터 정결케 할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없다면 (민 19장), 그들의 정결 예식들이 주어지기 전 레위인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저 부정한 것이다 (민 8장). 그러나, 성소가 설립되기 전에 레위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떤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56.1)
 정결법들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지만,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 외에, 신적 본성과 관련하여 인간의 본성,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시는 방식에 관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시 103:3). 심각한 신체의 제의적 부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한 희생 제사들은 죄를 위해 드린 희생 제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였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행동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우리 생애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죄된 죽을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 결과,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때, 그분께서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변화시키실 것이다(고전 15:51-54). (56.2)
 신체의 부정으로부터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는 그들에게 “정결의 물”을 뿌리는 일(민 19장), 그런 다음, 전신을 삭도로 밀고 그들의 의복을 빠는 일이 포함되었다. 그에 덧붙여, 정결을 위한 제사와 번제가 그들을 위하여 행해질 것이었다 (민 8:6-8,12,21). 이 두 제사의 목적은 그들을 정결케 하는 것이었다(21절). 그래서 그들의 정결은 물과 피의 제사를 통해서 발생했는데, 그것은 “물과 피로 임하신 자”(요일 5:6)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했다. (56.3)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한 병사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요 19:34)이 나온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의 첫 이적이 결례를 위한 물과 피를 대표할 수 있는 포도즙으로 변모시킨 일을 수반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요 2:6-11; 마 26:27,28 참조). 물과 피는 이스라엘의 의식 시스팀에서 가장 중요한 정결케 하는 매체였으며, 정결의 궁극적 원천은 바로 그리스도시다. (57.1)
 레위인을 정결케 하는 일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거룩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일은 그들의 대표자로서(민 8:16-18), 그들의 장자 대신에, 모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레위인을 구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리는 자가 희생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듯이, 그들의 손을 그것들 위에 놓을 것이었다(10절). 그런 다음, 대제사장 아론은 레위인을 여호와께로 성별하기 위하여 한가지 상징적 제스처를 해보였다(문자적으로, “들어올려진 제물로서 들어 올리다”)(민 8:11,13,21). (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