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3 장  안식일에 재연되고 재현되는 하나님의 창조
 안식일: 돌려 받는 날
 안식일은 숨 돌리는 날이다(출 23:12). 목숨을 돌리는 날, 생명을 회복하는 날이다. 어찌 목에 붙어 있는 목숨뿐이겠는가. 가운데 있는 숨, 몸의 한복판에 있는 숨인 가슴의 숨이 회복되어 막힌 가슴에서 숨이 탁 터지는 날이다. 위로부터 받는 숨, 위 분이 내려주신 숨, 윗 숨이 회복되어 우리의 생명에 “웃음”이 넘치는 날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삶에 웃음이 넘치는 날이다. 숨을 회복한다 함은 우리가 위로부터 숨을 부여받고 생명으로 태어난 창조의 경험을 다시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창조의 사건이 기념될 뿐만 아니라, 그 사건과 경험이 재연되고 재현되는 날인 것이다. 안식일에 사람이 다시 살아나려면 창조의 사건이 기념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창조의 사건이 사람에게 재연되고 재현되어야 한다. 안식일에 사람이 생명으로 일어나려면 흙 사람이 호흡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던 사건이 재연되고 재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36.1)
 사람이 태어나던 창조의 사건은 창세기 2장 7절에 기록돼 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흙 사람이 하나님의 호흡을 나누어 받고 호흡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흙 사람, 죽은 사람이 숨의 사람 곧 산 사람으로 태어났다. 안식일은 6일의 지친 삶에 창조의 사건이 재연되는 날이다. 창조와 더불어 부여받았던 숨, 그러나 이제는 기진하고 숨진 숨을 다시 돌리는 날이다. 넘어가고 죽은 숨을 돌려오는 날이다. 창조의 안식일에 사람이 호흡하던 그 하나님의 호흡을 다시 되돌려 받는 날이다. 그러고 보니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총 주제가 “되돌려 받음”이다. 재산을 되돌려 받고, 인권을 되돌려 받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목숨을 ‘되돌려 받음’이 안식일 사상의 골자이다. (36.2)
 그리고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 안식일을 “숨 돌리는 날”이라고 했던 출애굽기 기자가 안식일에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하는 호흡은 바로 창세기 2장 7절에서 흙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숨이다. 성경의 선지자들이 안식일에, 안식년에, 희년에, 그리고 예수의 재림 때 “되돌려 받자”고 한 삶은 창세기 창조주간에 부여받았던 그 삶, 그 호흡이다. 안식일은 창조 사건의 재연이며, 안식일은 재림의 리허설이다.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애굽기 23장 12절의 기본 텍스트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 사람이 된지라”창세기 2장 7절이었던 것이다. (37.1)
 안식일에 재연되는 말씀의 창조
 창세기 2장 7절의 앞에도 인간의 창조에 관한 보도가 있다. 창세기 1장 26, 27절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 . 사람을 만들고. .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 사람을 창조하시었다.” 하나님이 그 위대한 “가라사대”의 능력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인간이 창조된 이 사건이 우리의 삶에 재연되는 날이다.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날들에서처럼 능력 있게 우리의 삶에 역사 하시는 날이 안식일이다. (37.2)
 우리의 생존이 하나님의 말씀의 소산이라는 것, 우리의 생존의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모든 말씀,” 곧 그의 “가라사대”로 사는 것이란 사실이 안식일에 상기되고 재현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라사대”로 다시 살아났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심으로 우리가 사망에서 나왔다. “네 죄가 용서함을 입었느니라” 하시는 그 말씀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 그가 가라사대 “의롭다” 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주님이 죄와 사망을 향하여 내 백성을 “놓으라” 하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놓였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이 사건을 재연시킨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설교의 말씀을 들을 때, 그리고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때, 말씀의 능력으로 형제들과 교제를 나눌 때,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는 안식일에 능력 있게 재연되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출생과 현존과 미래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에 연결되어 있으며, 창조의 말씀이 지금 나의 생명 안에서 약동하고 있다는 인식이 안식일에 더욱 약동하는 것이다. (38.1)
 그러나 창세기 1장 26, 27절의 사건으로 사람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충분히 기술되었는가? 이 사건의 재연만으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모두 안다고 할 수가 있는가? 이 사건의 재연만으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행동과 사랑을 참으로 보고 듣고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사건의 재연만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사건의 기록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전모를 알리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사람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경험과 마음을 알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38.2)
 안식일에 재연되는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의 창조
 창세기 1장 26, 27절에 묘사된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를 위해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신 분이다. 이 하나님은 이름부터가 “전능”이란 뜻의 엘로힘이다. 이 하나님의 활동에는 인간의 창조를 위해 크게 수고하시고 중요한 무엇을 희생하신 분의 모습이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성경절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가라사대” 한 마디로 간단히 출현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그 큰 수고와 희생의 산물로 묘사돼 있지 않다. 창조의 능력만이 강조되었고, 창조의 수고와 희생이 결여된 창조 기사이다. (39.1)
 따라서 창세기 1장 26, 27절은 인간 창조 사건의 불완전한 기록이고 보완되어야 할 기록이다. 또 하나의 창조 기사가 기록되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의 창조 기사여야 했다. 그것이 창세기 2장 7절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사람의 출현은 말씀 한 마디로 간단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기록이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간단히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많은 수고와 염려의 산물이라는 기록이다. (39.2)
 능력만으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질을 대표할 수 없다. 하나님은 ‘힘이면 다 이다’ 하는 분이 아니다. 도깨비가 방망이 휘두르듯 그 삶을 사는 분이 아니다. 전심을 다해 삶을 사시는 분이시다. 전심을 다해 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전심으로 당신을 예배하고 전심전력으로 삶을 살라고 명령하실 수 없다. 전심을 다해 사는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창조에서도 잘 나타났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그 높은 질에는 정성과 희생과 수고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삶이든지 사람의 삶이든지, 능력만으로 그 질이 한정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 아름다움, 헌신, 지식, 거룩함 같은 질의 항목들이 뒤따라야 한다. (39.3)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만으로 사람을 만드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진흙에 내려오셨고 진흙에 참여하셨다. 하나님은 진흙 사람으로 하여금 산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가 진흙 투성이가 되시었다. (40.1)
 그리하여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창세기 1장 26절의 경우와 다르게 진흙에 연루되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계약의 명칭인 야훼로 표시됐다. 안식일에 재연되는 창조의 사건에는 반듯이 이 하나님, 진흙에 연루된 야훼 하나님의 사랑의 창조 행위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는 안식일에 말씀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진흙 투성이가 되어 우리를 낳으신 수고와 희생의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으로 사시는 하나님, 전심전력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40.2)
 그런데 창세기 창조 사건의 기자는 창세기 2장 7절로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의 창조 기사를 기록할 때, 이것을 마치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 작업을 묘사하듯이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 방식은 창조, 구속, 완성의 모양으로 확대되는 수천 년의 구속 역사의 비밀을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암시같이 느껴진다. (40.3)
 창조 사건의 재기술이든지 또는 인간 창조의 두 번째 작업이든지 하는 시각에서 보면 창세기 2장 7절2장 8절은 동일한 메시지의 이중창 같은 기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2:8). 에덴에 동산을 다시 창조하는 작업은 그 앞서 창세기 1장의 창조주간에 이루어진 세계 창조에 이어지는 두 번째의 작업이다. 창조주간에 이루어진 첫 번째의 작업성과는 “하나님이. . .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 그런데 하나님은 “심히 좋은” 그 세상의 동쪽에 또 하나의 특별하고 더 좋은 동산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 마치 성소를 지으시고 그 성소 안에 가장 거룩한 지성소를 별도로 조성하는 식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완벽한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두 번째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3절에서 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하기 위하여 앞으로도 어떠한 수고를 더 하실 마음이신 것인가! (40.4)
 우리는 창세기 2장 7절의 인간 창조 기사를 하나님이 에덴에 동산을 새로이 창설하시는 문맥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성소를 짓고 다시 그 안에 지성소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심히 좋은 세상을 창조하시고도 사람의 처소를 위해 그 안에 다시 동산을 창설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이 창세기 1장 26, 27절의 인간 창조 기사에는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다시 창세기 2장 7절의 기사를, 그것도 마치 인간의 두 번째 창조 작업을 쓰듯이 쓰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창세기 2장 7, 8절은 인간과 인간의 처소를 위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수고와 정성의 구절이다. 창세기 1장 26, 27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그리고 창세기 2장 7, 8절에서는 하나님의 수고와 사랑의 위대함을 읽는다. 우리가 안식일에 재연되기를 고대하는 창조의 사건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창조 사건이다. 나의 생존의 존엄성의 기초는 나의 생존을 이루어낸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뿐만 아니라 나의 창조를 위해 두 번, 세 번 거듭되는 하나님의 수고와 희생이다. (41.1)
 안식일에 재연되는 호흡의 창조
 창세기 1장 26, 27절에 나타난 말씀의 창조 사건의 재연만으로는 안식일의 경험이 미진하게 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이 사건만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호흡을 내놓고 사람을 창조하신 사실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7절 기사의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흙 사람에게 자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한 사실일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어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인 흙 사람이 산 사람으로 숨을 쉬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42.1)
 창세기 1장 27절에서는 만물을 다스리고 보살피는 통치자와 봉사자로서의 인간이 창조되고 있지만,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살아 숨쉬는 사람이 창조되고 있다. 사람은 다스리는 자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호흡으로 숨쉬는 숨꾼이다. 살아 숨쉬는 사람의 창조가 재연될 때 비로소 인간의 창조 사건이 재연된다고 할 것이다. 안식일에 우리는 만물과 이웃을 돌보는 사랑과 책임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하겠지만, 그 앞서 숨쉬는 사람으로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봉사의 주체이기 전에 호흡의 주체이다. 흙 사람 곧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나의 삶이, 먼지 나는 마른 땅 같은 나의 삶이 먼저 안식일에 창조주간의 첫 호흡을 되돌려 받아,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은 새로운 생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