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옵니까” 하고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은 마음속에 예수님의 재림은 물론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26.1)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답하시면서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마24:15) 에 대해 언급하셨다. 다음 몇 페이지에서는 “가증한 것”과 이것이 야기하는 “멸망”에 대해 연구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예수님의 예언이 주후 70년에 얼마나 정확히 성취되었는지를 살펴본 우리로서는 우리의 시대에 대한 그분의 예언의 성취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시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 점은 더욱 중요하다. (26.2)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로 기도하라”(마 24:15~20). (26.3)
 멸망의 전주곡
 이 예언 성취는 확실히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성경 예언의 진실성에 대한 놀라운 예증인 것이다. (26.4)
 사태를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시각을 좀더 과거로 돌이켜 보자.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약소 국가 유대는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로마에 의해 점령된 대부분의 민족들은 제국의 일원이 됨으로서 오히려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나 유대와 갈릴리의 많은 유대인들은 저항 정신을 품고 있었으며 드디어는 로마의 지배에 대한 군사적 항전으로 널리 주목을 끌게 되었다. (26.5)
 로마 인들은 항상 그렇지는 않았으나 통상적으로는 평화적 수단으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세월의 경과와 더불어 하나의 유혈 사태는 또 하나의 더 큰 유혈 사태를 몰고와서 급기야 기원후 60년 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단 한 번의 유혈 사태로 생명을 잃은 유대인의 수가 2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성전 제사장들이 로마 황제를 위해 더 이상 희생이나 기도를 올리지 않기로 작정했을 때에 이러한 악순환의 절정을 맞게 되었다. 그 당시는 로마 제국에 포함된 모든 인종 집단이 황제를 위해 희생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집단은 황제를 신처럼 생각하고 그에게 희생과 기도를 드렸다. (26.6)
 황제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기로 한 유대인들의 결정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응징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3 유대가 속해 있는 시리아의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2 군단에 상당하는 정규군과 상당 수의 보충대를 이끌고 안디옥을 출발하여 남진했다(1 군단은 6천 명의 정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보충대는 일종의 민병대 같은 성격의 병력이었다).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병력은 기원후 66년 10월에 예루살렘에 도착 했으나 맹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단의 게릴라 부대가 로마 군대를 급습하여 515명을 살해했다· 유대인 게릴라 측은 22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러나, 이같이 놀라운 전공을 이룩한 게릴라들은 성공이 큰 만큼 가혹한 보복이 따를 것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 성전 벽 뒤로 피해 들어갔다. (26.7)
 온건파 유대인들은 로마 인들에게, 당장에 성전을 점령하여 반역자들에게 제2차 공격의 기회를 주지 말고 진압하도록 촉구하였다.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성전을 향해 군대를 진격시켰다. 황제를 위한 기도를 다시 성전에서 회복시키려는 것이 그가 군대를 몰고 온 이유였다. 일주일여 간의 노력 끝에 그의 노력은 이제 막 성공을 거두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대한 순간에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까닭없이 그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퇴군시켰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그의 결정은 그의 군대에 일대 재난을 초래했다. 유대의 저항군들은 북부 산악 지대에 매복했다가 로마 군대의 퇴로를 곳곳에서 차단시켜 이로써 로마 군대는 거의 6천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27.1)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전쟁에서 유대 저항군측의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로마에 투항한 사람이다. 그는 여러 해 후에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당시 시리아 총독의 영문 모를 퇴군 결정이 사태를 급변시켰다고 지적했다. 만약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조금만 더 확고한 태도로 공격을 계속했던들 인명과 재산의 희생을 덜 치르고도 예루살렘의 평화를 회복시킬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그(케스티우스 갈루스)가(성전)포위를 조금만 더 계속했어도 그는 그 성을 즉각 함락시킬 수가 있었고”4 그렇게 되었으면 유대 전쟁이나 예루살렘 멸망 같은 것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27.2)
 그러나, 유대인 게릴라들에 의해 상당수의 병사들을 상실한 데 크게 자극된 로마 당국은 보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네로 황제는 브리튼으로부터 유능한 장군인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를 소환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아들 타투스(Titus)와 함께 세밀한 작전을 구상하고 함께 예루살렘 공략에 나섰으며, 이 정벌로 말미암아 약 25만 명의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굶든지, 불에 타든지, 화살에 맞든지, 십자가에 달리든지, 칼에 맞든지 하여 죽거나 또는 노예로 잡혀갔다.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 티투스는 모두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27.3)
 예루살렘과 성전이 모두 초토화 됨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기원후 70년에 4개 군단과 상당 수의 보충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당시, 그 성은 유월절을 지키러 몰려든 유대인으로 일대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5 (27.4)
 포위가 계속되자 질병과 기근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성 안에서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세 개의 폭력 조직이 있어 유대인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그들은 동포들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비축 물자들의 장악을 둘러싸고 경쟁 단체들끼리 싸웠다.이 참혹한 환경에서 어떤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것이다.6 (27.5)
 티투스는 성전을 구제하려고 노력했다· 성전은 로마 제국에 있어서도 보석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또 예루살렘과 그 성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티투스의 제안을 모두 거부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존귀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을 지켜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27.6)
 8월 말경에 유대인 저항군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광신주의에 크게 자극된 일부 로마 병사들이 도금한 재목으로 건축된 성전 천정과 벽에 불을 질렀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대력 제 9월 아브(Ab)월에 이 화재 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성전이 불에 탔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저항 세력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티투스는 분노 끝에 로마 군대에 대한 제지를 풀어 버렸다. 그리고, 도성과 성전은 문자 그대로 사라졌다. (27.7)
 일부 성벽과 세 개의 탑을 남기고 “도성은 완전히 초토화되어 후에 이곳을 찾는 자가 있어도 그 곳에 한때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찾을 수없게 되었다.”7 (28.1)
 예루살렘이 포위되던 때부터 이 성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죽임을 당한 것 같다. 살아 남은 사람이라곤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유대 지방에서 사로잡힌 97,000명의 남녀 및 어린이들 뿐이었다. 이들 중 상당 수는 지방으로 끌려가 원형극장에서 야수의 밥이 되었고, 또 상당 수는 희랍의 고린도 운하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로 끌려가 노예의 신세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유대 땅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헐값으로 팔려갔다. 팔려는 노예는 많고 살 사람은 적어 노예값이 헐값이 된 것이다. (28.2)
 예언이 성취됨
 예루살렘의 멸망은 39 년 앞서 그리스도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하신 예언의 무서운 성취였다. 기근과 지진, 전쟁의 소문과 군대들이 성소를 에워쌀 것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은 여지없이 성취되었다.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