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히브리서 3장 14절“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인 올리브 나무(감람나무)에 접붙인 이방의 “가지들”에게 잘려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원가지(즉 이스라엘 민족)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너희가 계속해 거하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너희에게 인자하시리라(롬 11:20~22). (239.3)
 우리가 끝까지 깨끗한 사람으로 선언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계속해서 그 “안에 거하여야 한다”(요한복음 15장 1~11절을 보라). (239.4)
 우리가 우리의 죄 많음을 인식하고 우리의 처지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우리는(1) 즉각 용서받고, (2) 하늘 가족에 입적된다. 새 언약은 이것을 약속했다. 줄지어 기다릴 필요도, 값을 지불해야 할 필요도 없다. (239.5)
 그러나, 새 언약은(3) 변화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친절하고 의로운 성격을 발전시 킬 힘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렘 31:33). 하나님은 우리가 심판에 능히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 (239.6)
 일정 기간 계속되는 재림 전 심판의 주요 기능의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용서와 함께 하나님의 제공하시는 능력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밝혀 내는 일이다. (239.7)
 용서할 수 있는, 용서된, 용서하는
 하나님은 이기심을 눈감아 주시지 않는다. 우리의 행복에 대한 그분의 관심은 너무나 큰 것이다. 그리하여, 결코 새 땅에 완고한 죄인들이 살게 하지 않으신다. (239.8)
 그분의 심판 기준의 하나를 예로 들자. 주의 기도문이 끝나는 부분에 그분의 산상 설교가 나온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하셨다:“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마 6:14, 15). (239.9)
 이 원칙을 요한일서 1장 9절의 약속과 일치시켜 본다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후회하고 고백하자마자 선선히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그 후회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라면 좀 전의 하나님의 용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용서가 그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39.10)
 그러나, 우리에게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239.11)
 실로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수 있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에게 부당하게 하는 사람뿐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아무 일도 우리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39.12)
 여기에 새 언약의 실제적인 적용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의 정신을 우리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구하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바랄 것이다. 바라봄으로써 변화가 오는 것이다(고후 3:18). 만약,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시 사시는 것을 상상으로 그려 본다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239.13)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240.1)
 본 항목을 시작할 때 소개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용서 받았으나 용서하지 않는 한 종을 보았다. 그는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했었다. (240.2)
 필자는 이 사람의 문제가 배은 망덕에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그가 주인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부채를 탕감받은 사실로 크게 고마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인이 한 일을 완전히 잘못 이해 하였다. 그 종은 필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은 너무나 중요한 하인이고 따라서 자기가 없이는 주인이 일을 해가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주인이 자기를 용서한 것이다. 필자가 짐작하기에 그 종은 주인의 사무실을 보란 듯이 머리를 세우고 나왔을 것이다. (240.3)
 그리고, 그에게 일만 육천 원 정도의 빚을 갚지 못한 동료 하인을 만나자 그는 대단히 분노했다. 그 동료가 자신을 우습게 보고 돈을 갚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40.4)
 그는 주인이 자기를 용서해 준 것을 고마와했다. 그는 주인이 자기 같은 사람도 용서해 준 사실에 대해 고마움을 품어야 했다. (240.5)
 그러면, 이 용서하지 않는 종은 과연 누구인가? 바로 여러분과 필자 자신이다. 두렵건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손톱만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의 선하심과 우리의 죄 많음으로 마음이 겸비해져서 누구에게 대해서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듯이 친절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240.6)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나가 “자비로운 주 하나님”의 찬미를 부르면서 다시 배우자와 싸우고 끝내는 이혼 법정에 서서 누구는 카메라를 가져가고 누구는 TV 세트를 가져 가기로 법정의 신세를 질 수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대속 곧 용서와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남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원한을 품으며 법정에 고소하는가?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들을 하면서 끝에 가서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고 선언되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240.7)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 주소서! (2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