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심판의 첫 단계에 의도된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사면(放免)이었다. 하나님은 성소를 정결케 함으로써 죄를 철저하게 제거하여 고백된 죄들을 도말하고자 하였다. 죄란 분리케 하는 것이다(사 59:2). 죄가 제거됨으로써 화해(하나됨)가 실현 된다. 죄의 마지막 기억이 사라짐으로써(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 43:25)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237.2)
 하나님이 “책들을” 조사하시는 것은 실패한 사람들을 골라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끝까지 신실한 사람을 찾아내고자 함이다. 천년기 끝에 있는 무서운 심판에는 영원한 죽음의 형벌이 선고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844년 부터 시작된 재림 전 심판은 레위기 16장의 상징적인 대속죄일을 성취시키는 최종적인 대속죄일 드디어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는 감격적인 선포로 그 절정에 이른다. 그 끝에 예수님은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와 그의 성도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영생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237.3)
 이제 구약과의 또 하나의 평행 현상이 뜻 깊게 나타나고 있다. 옛 대속죄일에 생활을 심사 받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뿐이었다. 그 전(前)해 동안에 제물을 바친 백성들의 죄들만이 대속죄일에 도말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경계 너머에 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백성들은, 최소한 인간의 안목으로 생각할 때는, 심사 없이 영생을 잃게 되는 것이다. (237.4)
 신약 시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수세기에 걸쳐 그의 진정한 이스라엘에 가담해 온 “진정한 유대인들”중에서 신실한 자를 찾아내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이시다”(요 1:9). 조사 심판 즉 재림 전 심판의 기간에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때이건 또 어떤 식으로든 이 참 빛에 대해 호의적으로 반응해 온 사람들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237.5)
 대속(代)은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님
 아마 여러분들은 대 속에는 십자가만이 포함되고 재림 전 심판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친숙해 있을 것이다. (237.6)
 십자가는 실로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최대 유일의 대속 행위이다. 우리의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반역자, 절도범, 노예의 끔찍한 형벌을 당하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셨다. 머리와 마음을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어, “오 하나님,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237.7)
 그분은 대답하신다. “물론, 이토록,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한다.” (237.8)
 우리는 165페이지에서 희생 제물의 흘린 피로 속죄를 이룩하기 위해서 제사장이 그 피를 성소의 제단에 뿌렸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속죄가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에 제사장이 피를 지성소에도 뿌려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죄는 두 번씩 용서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히 10). 대속죄일에 피를 두 번씩 뿌린 것은 고백된 죄의 기록이 도말되었음과 아울러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을 신실히 받들기를 결심하고 여전히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237.9)
 영어 흠정역 성경 같은 옛날 번역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 “속죄”란 영어를 결코 사용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옛 번역에는 오직 희생제물을 죽인 다음에 이루어지는 성소 활동에 연관해서만 그 용어를 사용했다. (237.10)
 속죄에는 십자가 이상의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37.11)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한 번 죽으셨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고통당해 온 기간은 얼마나 긴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분은 고대 이스라엘이 당한 모든 고통을 함께 당하셨다(사 63:9). 그분은 한 마리의 참새가 떨어질 때도 고통을 느끼신다(마 10:29). 그분은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해 오셨다(사 53:4).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롬 4:25). 그리고, “그는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히 7:25). (238.1)
 예수님은 어떠한 개인적인 희생을 치른다 해도 “당신의 언약을 이기게 하기” 위하여 아직도 열심이시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238.2)
 “속죄”는 우리의 필요에 응하고 우리를 당신과 화목케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말한다. 십자가와 1844년 이후의 정결/심판은 각기 다르고 필수적인 것으로서, 구속의 계획(경륜)이라는 대드라마의 2개 대사건이다(159, 160페이지를 보라). (238.3)
 끝까지 충성됨
 요한일서 1장 9절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미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다”는 생각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238.4)
 사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용서 받는다. 구약 때 사람들이 희생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릴 때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 하셨다. (238.5)
  (238.6)
 그러나, 하나님은 전제적인 분이 아니시다. 만약에 십대 소녀가 신앙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였다가 후에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면, 하나님으로서도 그녀의 신앙을 강요할 수가 없다. 그것은 피차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239.1)
 그저 일주일에 한 시간씩 교회에 나가 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일주일 내내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게 되면, 하늘 나라에 어떤 이웃들이 들어서게 될 것인가? (2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