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장에서 요셉의 계획을 통해서 베냐민이 요셉의 잔을 훔친 사람으로 몰려서 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유다가 그의 집안 내력을 이야기한다. 야곱은 막내 베냐민이 없으면 죽게 될 것이다. 유다가 자기를 담보로 베냐민을 데려왔기 때문에 베냐민 대신에 종이 되겠다고 자원했다. (251.2)
요셉은 형들에게 대적자가 된 듯 보이지만 그의 의도는 복수(revenge)가 아니라 회개(repentance)이다.1 온전한 변화 위에서 형제의 화해와 연합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은 유다의 진술을 통해서 형들의 회개와 형제 사이의 사랑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따라서 본 장에서 발생한 대화는 요셉을 확신시키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251.3)
본장의 사건은 구속사 속에서 지극히 짧은 시간 속에 발생한 것이지만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형들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었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살아남았고, 여자의 후손이시며 아브라함의 후손이신 메시아께서 베냐민의 담보가 되어 온 이스라엘을 구한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다(마 1:1-2; 눅 3:33, 38). (251.4)
요셉, 용서를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심판자 주님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창세기 44:4).
(252.1)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그리스도.‘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너희가 악하도다.’(창 44:4-5).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창 44:16). 요셉의 심판 이야기는 선악의 문제를 다룬다. 형제들이 모두 죄인으로 드러난 것처럼, 인간 가족 중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요셉의 형제들은 과거의 죄가 모두 은밀하게 덮어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심판대 앞에서 과거의 죄를 직면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자이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252.2)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창세기 44:16).
(252.3)
회개로 이끄시는 성령.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창 44:16)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신다. 성령은 우리 심령 속에 우리 각자가 지은 죄를 낱낱이 기억나게 하셔서 회개하도록 하신다. 요셉의 형들이 온전히 회개한 증거를 보였을 때 유쾌하게 하는 날이 찾아왔던 것처럼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온전히 씻음을 받는다(요일 1:9). (252.4)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창세기 44:30-31).
(252.5)
죄의 삯은 사망.‘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창 44:31. 비교, 창 44:29). 요셉에게 용서 받지 못하고 베냐민이 그 값을 치루게 될 때 베냐민과 하나로 연결된 야곱이 죽게 될 것이다. 용서 받지 못하면 죽는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각자가 자기 죄 값을 져야 한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 야곱 집안의 위기 너머로 하나님은 생명의 빛을 비추신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253.1)
미리 마련된 용서. 요셉은 형제들을 심판하여 종으로 만들려고 일부러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형제들을 이미 용서했으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죄인을 용서하신 심판자이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253.2)
유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창세기 44:32-33).
(253.3)
본 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사람은 자원하여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기를 바치고자 한 유다이다(창 44:33). 그는 죄인과 심판자 사이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했고, 그의 중보는 성공적이었다. 과거의 죄가 모두 용서를 받았고, 형제들은 화해했다. 이 집안을 뒤덮었던 죽음의 공포는 모두 사라졌다. (254.1)
유다는 예수님의 모형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 하나님의 심판 때에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주님의 진실한 백성은 정죄 받지 않을 것이다. 정죄가 없는 한 심판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254.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구한 중보자 유다를 인류의 구원자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히 7:14).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계 5:5). (254.3)
심판자는 아우 요셉이었고 중보자는 형 유다였고 죄인은 막내 베냐민이었다. 모두 한 형제이다. 우리 죄인의 심판자는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히 2:11).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중보자께서도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18). (2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