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490 년을 더 긴 기간에서 “잘라냈다” 또는 “절단했다”는 이야기 로부터 그의 설명을 시작했다. 문제는 이처럼 단순한 것이다. (203.1)
 2,300일의 길이에 관한 다니엘의 지겨운 의문의 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햇(年)수로 따지면 7년 안팎에 불과한 2,300일에서 490 년을 “잘라낼” 도리는 없는 것이므로 그 해답은 간단해진다. 2,300일은 상징이며 2,300년을 뜻하는 것이다. (203.2)
 다니엘은 2,300년이 언제 끝나는지를 계산해 내기 위하여 그 기산점이 어딘지를 알고자 했다. 이는 우리로서도 대단히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잠시 후면 가브리엘 이 그 정보를 알려 줄 것이다. (203.3)
 70 이레로 분할됨
 우리는 먼저 가브리엘 천사가 다니엘 9장 25~27절에서 70 이레의 기간을 7 주(49 년), 62 주(434 년), 1 주(7 년)의 기간으로 세토막 내었다는 사실을 주목 해야 한다. 그는 또 마지막 1 주를 둘로 나누었다(3 년 반씩), 이것을 도표로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203.4)
  (203.5)
 70 이레의 시작
 25절을 보면 깨달아 알지니라(깨닫다[understand]란 중요한 동사가 또 나오고 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가 지날 것이요라 하였다. (203.6)
 다니엘은 언젠가 예루살렘의 회복을 명하는 칙령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크게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 칙령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없을까? (203.7)
 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칙령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서기관 에스라에 의 해 기록으로 보관되었다. (203.8)
 1. 첫번째 조서는 기원전 538(또는 537)년에 고레스 대왕이 반포한 것으로서, 유대인 유랑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다(에 1:2~4). 고레스는 이 칙령에 맞추어 앞서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가져온, 그리고 이 조서가 있기 1, 2년 전 고레스에게 패망하기 전날 밤에 벨사살이 불경스럽게 술 마시는 데 사용했던 성전 기명들을 예루살렘으로 송환토록 조치하였다. 그릇의 수는 5,469 점에 달했다(에 1:7~11). (203.9)
 그 해 안으로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비유태계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기록을 읽노라면 마치 오늘날 중동 특파원의 뉴스 보도를 듣는 것 같다! (203.10)
 성전 재건은 이 같은 저항에 직면하여 지지 부진하게 되었다(에스라 2~5장). (203.11)
 2. 두번째 조서는 기원전 519년경 다리우스 1세 히스타스페스(Darius 1 Hystaspes: Darius the Mede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반포되었다. 다리우스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고레스 대왕의 조서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서를 받았다. 다리우스는 바벨론과 에크바타나(Ecbatana)에 있는 페르시아의 기록 보관소를 철저히 조사토록 명하고 드디어 이 조서의 공식 비망록이 발견되자(에 6:1~5) 그 조서의 확인서를 흔쾌히 발행하였다(에 6:6~12). (203.12)
 3. 세번째 조서는 아닥사스다(아르탁세륵세스) 1세 롱지마누스(Artaxerxes 1 Longimanus). 롱지마누스란 이름은 손이 길었다 해서 생긴 것이다)가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질적인면에서는 앞의 두 칙령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 조서는 에스라에게 행정장관들(有司)과 재판관들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행정장관들과 재판관들은 정치와 종교의 전권을 장악하여 유대 법과 페르시아법에 따라 재판하고 중벌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닥 사스다 왕은 명하기를: (204.1)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유배시키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스 7:25, 26).
(204.2)
 에스라는 그의 보고에서 말하기를 그가 지도 역량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아닥사스다 왕 제7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고 그 얼마 후에 “왕의 조서를 왕의 관원과 강 서편 총독들에게 부”쳤다고 하였다(에 8:36). 그는 또 말하기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성전 건축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하였다(에 6:14). 그가 세 문서를 언급하면서 조서라는 낱말을 단수로 쓴 것은 이 조서들의 통일성을 나타내려 한 것이며, 그가 특히 세번째 조서에 주의를 환기시킨 것은 세째 조서가 없으면 앞서 두 조서가 미진하기 때문이었다. (204.3)
 

 (204.4)
 예루살렘의 합법적인 제2의 탄생을 가능케 해 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7년에 반포 된 세번째 조서였다. 유사와 재판관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특별히 지방 정부 차원에서 옛 유대 율법의 재건을 허락함으로써 수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능케 한 것은 이 세번째 조서였다. (205.1)
 따라서, 가브리엘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조서)을 말할 때 그 마음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 세번째 조서였다.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