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행복하려거든(시편강해) 제 5장 오, 내 사랑 예루살렘 35. 후일에 생명 그치면 여전히 찬송 못하나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편 5절). (373.1)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30편 9절). (373.2)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奇事)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幽魂)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義)를 알 수 있으리이까”

   (88편 10~12절). (373.3)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115편 17절). (373.4)
 이처럼 죽은 후의 사람의 상태가 깊은 잠처럼 전혀 무의식이요 무활동임을 시편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일치하게 증언하고 있다(욥기 14장 21절; 전도서 9장 5, 6, 10절; 이사야 38장 18, 19절; 사도행전 2장 34절; 요한복음 11장 11~14절 등). 그리고 죽은 사람이 다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때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썩지 않을 육신의 몸으로 부활한 이후임을 신 • 구약 성경은 철두 철미하게 밝히고 있다(욥기 14장 10~13절, 19장 25, 26절:이사야 26장 19~21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 등). 그런데 사람이 죽는 즉시 육신을 떠난 혼백(魂晩)같은 영혼鑛魂)이 있어서, 의인의 영혼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악인의 영혼은 즉시로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신앙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373.5)
 내 영혼의 할렐루야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에단 알렌(Ethan Allen)이 미혼이 었던 때, 연인과의 저녁 데이트를 끝낸 다음에는 습관처럼 동리 공동묘지의 나지막한 담을 넘어 귀가하곤 했다. 짖궂은 뉴잉글랜드의 이웃들은 당차다는 알렌을 한번쯤 혼내줄 심산으로 계획을 짰다. 그날 밤도 데이트를 끝내고 전처럼 공동묘지 담을 뛰어넘던 알렌은 발이 닿는 곳에 몰래 파놓은 흙구덩이에 영락없이 틀어박히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는데, 전설의 유령처럼 차려 입은 이웃 사람이 내려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렌아, 너는 내 무덤 속에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혼비백산했던 알렌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당차게 소리쳤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지금 거기서 하고 있는 엉뚱한 짓이 진짜 문제요.” 그렇다. 인간의 사후상태(事後狀態)에 관한 해묵은 논란(論難)은 죽어보지도 않은 산 사람들이 만드는 문제이다. 그것은 무덤 밖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드는 갑론을박(甲論己驗)에 불과하다. 죽음에 관한 대답은 생명에 관한 대답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만 있다. (374.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촉구할 때 쓰여진 “영혼”은 몸을 떠나 몸 밖에서도 살아서 떠돌아다닌다는 그런 혼백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원어인 히브리어 “네페슈”(nephesh)의 번역인 이 “영혼”“숨쉬다”라는 동사인 “나파슈”(naphash)에서 나온 명사인데, 숨을 쉬어야 사는 존재인 생명체를 뜻하는 말로서 살아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새와 물고기, 짐승도 포함하는 말이다(창세기 1:20, 21, 24, 30절의 “생물,”은 모두 “네페슈”이다). (375.1)
 그것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체와 함께 소멸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숨을 쉬며 살아 있는 “생전”에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 말이 신약의 원어인 헬라어로는 “프쉬케”(psuche)인데 역시 생명체나 생명 현상을 가리켰다. 이 말을 부적절하게도 “영혼”(soul)으로 번역하여 혼백(魂晩)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시인이 말한 “영혼”은 숨쉬며 살아 있는 자신을 가리켰음이 문맥에서도 분명하다. (375.2)
 “호흡이 끊”기기 전 할렐루야
 “호흡”이란 말이 히브리어로는 “루아흐”(ruach)요, 헬라어로는 “퓨뉴마”(pneuma)인데. “호흡”을 비롯하여 “생기”, “바람”을 뜻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켰다. 이러한 본 뜻을 떠나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 듯한 “영”, “영혼”, “신”(神)으로 번역하여, 사람이 죽을 때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오해시키는 것은(전도서 12장 7절; 사도행전 7장 59절 등)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시편 146편 4절의 경우처럼, 창조 당시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생명소(生命素)인 “생기”, 곧 “호흡”인 것이다(창세기 2장 7절). (375.3)
 이러한 여러 용어들이 구약 성경에 1, 168회, 신약 성경에 490회, 도합 1, 658회가 쓰였는데, 그것이 사람에 관련되어 쓰인 경우 그 자체가 불멸(不滅)이라거나 죽은 뒤 몸에서 분리된 다음에도 의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말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전혀 없다. 그렇게 보이는 몇 표현은 편견을 가진 번역에 의한 오해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376.1)
 인간의 사후(死後)에 관하여 신 • 구약 성경은 시종일관 육신의 부활(復活)을 강조했지 몸을 떠난 영혼의 불멸을 가르친 바가 전혀 없다. 몸을 떠난 영혼들이 모여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그런 극락(極樂) 천당이나, 죽은 악인의 영혼들이 끝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그런 명부(冥府) 지옥이나, 과도적이라는 연옥 혹은 칼빈주의적 중간상태(中間狀態)가 성경에는 없다. (376.2)
 불행하게도 이러한 영혼불멸 사상은 고대 이집트에서 연원되어 헬라의 이원론(三元論)을 거쳐서 후기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에 넌지시 잠입된 순수한 이교(異敎)사상을 중세교회가 교리로 재가한데 불과한 것임이 근년의 교리사(敎理史) 연구에서 속속 밝혀지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의인의 영생(永生)도 재림시에 있을 첫째 부활과 함께 시작되고(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고린도전서 15장 50~56절). 악인에 대한 불의 심판과 영멸도 그리스도 재림 뒤 천년 후에 있을 둘째 부활 이후에 있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0장 4~15절). (376.3)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숨쉬고 사는 동안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섬김으로 야곱처럼 영원한 찬양,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런 인간이 되는 여부에 달린 것이다. 언제나 끊어질 수 있는 가냘픈 호흡이 끊기면 다시는 할 수 없는 하나님 찬양을, 숨질 때까지 계속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면 그는 가장 사람답고 행복한 일생을 산 것이다. (376.4)
 후일에 생명 그치면
   후일에 생명 그치면 여전히 찬송 못하나

   무덤 속에서 깰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3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