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2 장  안식일, 기념과 찬양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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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 창조와 출애굽의 기념일
 안식일은 일차적으로 기념과 찬양의 날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들, 곧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출애굽 해방 사건들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 곧 하나님의 재창조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인간의 창조와 구속을 기념하고 세계의 창조와 구속을 기념하는 날이다.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이다. (390.1)
 시편 92편은 안식일의 찬송시이다. “좋고,” “심히 좋은” 세계와 인간의 창조를 기념하고 찬송하는 시이다.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시 92:2) 시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는”(시 92:4) 시이다. 안식일에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시이다. (390.2)
 우리의 안식일 기념과 찬양은 태초의 안식일에 온 우주가 행한 그 기념과 찬양의 연속이며 그 화답이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르러 마칠 때,” 곧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던”(창 2:2)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욥 38:7). 그리고 이 기쁨과 찬양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안식일에도 계속될 것이다(사 66:22, 23). (390.3)
 진실로 “기뻐하고 감사하는”(살전 5:16, 18) 것이야말로 안식일 계명의 중요한 명령이라고 할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는 안식일 계명의 구체적 내용이 “기뻐하고 감사하라” 이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동기가 기쁨과 감사이고, 우리가 “안식일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구체적 행위가 기쁨과 감사이다. 안식일 찬송인 시편 92편 4절에서도 나와 세계를 창조하신 “주님의 행사가 나를 기쁘게 하였으므로 주의 손의 행사 때문에 내가 높이 찬양합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391.1)
 한편 기쁨과 감사는 명령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행위가 아니다. 명령이 없어도 일어나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에덴의 사람은 기쁨과 감사를 자발적으로 표시하는 사람이다. 자발적인 기쁨과 감사는 에덴의 삶에 충만한 현상이었다. 기쁨과 감사는 에덴의 그 죄없는 생명들의 특징적인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심히 좋은” 창조와 그 피조물들의 “거룩한 축복”(창 2:3)을 목격하는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었듯이(욥 8:7) 하나님에 의하여 “심히 좋은”(창 1:31) 삶을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복 받아 거룩하게 된” 제칠일 안식일에 초청된 인간의 즉각적이고 자연적인 반응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었다.” (391.2)
 따라서 아직 범죄로 타락하기 전의 인류에게 안식일의 기쁨과 감사의 찬양은 명령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과 능력이 안식일의 거룩으로 다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기쁨과 감사와 찬양은 거룩한 안식일에 자연스럽게 따라서 일어나는 현상이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과 능력이 충만한 에덴에서 피조물이 반응하는 당연한 현상이었고,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에덴의 나날이 기쁨과 찬양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제칠일 안식일은 오직 이 일만을 위해 하나님이 따로 구별한 한 날이었다.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고(살전 5:16, 18) 항상 찬양하는 에덴의 질서 중에서도 제칠일 안식일 하루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그 중의 “심히 좋고,” “거룩한 창조”를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로 구별되었던 것이다. (391.3)
 안식일은 전적으로 이 한 일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시 118:24).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의 행하신”(시 18:23) 놀라운 일, 곧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이 날을 정하신 것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태초에 안식일을 정하시면서 창세기 2장“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특별히 남기시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분부가 없어도 이 날 자체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기이한” 행사를 기념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날에 즐거워하는 것은”(시 118:24)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지적하여 분부하시지 않으셨다 해도 하나님이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날에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시 118:29)이었다. (392.1)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하나님이 그 지으시던 일을 마치고 기뻐하신 날이다. 그 지으시던 일이 끝남으로써 하나님의 기쁜 감정이 크게 고양된 날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만족함이 충만하여 하나님께 안식이 되었던 날이다. 잠언 8장 27절에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친히 만물을 지으신 그리스도께서 태초의 안식일에 경험하신 그 기쁨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하늘도 지으시며. . .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내가 곁에 있어서 창조주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에 성자 하나님의 이같은 기쁨에 초청된 것이다. 그러나 범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더 이상 이러한 기쁨과 찬양이 생명의 자연적인 반응으로만 기대될 수가 없게 되었다. 이 기쁨과 찬양은 이제 경건의 훈련으로써도 사람들에게 강조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하여 죄에 부패된 우리를 위하여 안식일 계명이 포함된 십계명을 돌비에 쓰시고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이다. (392.2)
 안식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의 부활잔치
 진실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창조의 사건의 기념과 찬양에 초청하시는 잔치 날이다. 성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 . 어서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믿으라”(잠 9:6) 하시는 날이다. (393.1)
 제칠일 안식일을 구별하여 그날에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를 기념하고 찬양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그 “어리석음을 버리고 명철의 길로 행하게”(잠 9:6) 될 것이다. “지혜 있는 자에게는 교훈이 더하여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은 학식이 더해질 것이다”(잠 9:9). 진실로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날인 안식일은 그 기념과 찬양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날이며, “지혜와 명철”(잠 9:10)의 날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기 때문이다. (393.2)
 그러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만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하나님의 출애굽 해방도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더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였느니라”(신 5:15)하셨다. 안식일로 기념하고 찬양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출애굽의 사건이며, 안식일에 우리가 감사하는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393.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후일에 네 자손들이 묻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받은” 안식일의 “훈령과 규정과 법령이 웬 것이냐 묻거든 너희는 너희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열조에게 명하신 땅을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다”(신 6:20-24). 이처럼 안식일은 출애굽의 사건과 출애굽의 하나님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394.1)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그리고 그것에 이어지는 재림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신약시대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이 사건들의 기념과 찬양을 위해 구별해 놓은 날이 안식일이다. (394.2)
 진실로 안식일은 출애굽의 날이며 구속의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제2의 창조이며 제2의 출애굽이기 때문이다. 재창조의 사건이며 참된 해방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죄인의 진정한 구원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업적의 결과이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에서 말하기를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로”(계 15:2-3)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이하신 업적을 찬양했다고 했다. (394.3)
 모세의 노래가 무엇인가? 출애굽의 노래이다. 출애굽의 노래가 우리가 안식일에 하나님을 찬양하여 부를 노래이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노래는 무엇인가?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십사만 사천인이 부르는 노래이다.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이다(계 14:1).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부른 새 노래”가 어린양의 노래이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배울 수 없는”(계 14:3) 노래이다. 본성에 있어서는 이 노래가 안식일의 노래이다. 안식일의 찬송시가 이 노래이다. 어린양의 노래는 근본적인 성격에 있어서 시편 92편과 같은 노래이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노래이다. 우리는 안식일의 기념과 찬양에 참여함으로써 영적으로 십사만 사천인의 무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무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395.1)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들의 부활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부활은 십자가와 묻힘에 이어지는 그리스도 사건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념하고 찬송할 때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함께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기념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창조를 기념하고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고 우리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도 같고”(마 22:22), 또 안식일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3) 하여 잔치를 베푼 “어떤 사람”(눅 15:11)의 잔치와 같은 날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할 뿐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바 된” 우리의 구원과 부활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잔치 날이다. 안식일은 우리의 부활 기념일이며 앞으로 있을 우리의 부활과 주의 재림까지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재림과 부활은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앞당겨 그 감격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하는 사건이다. 안식일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다. (395.2)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우리가 개인적이거나 단체적인 삶의 역사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손의 모든 행사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시편 92편의 노래처럼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신”(시 92:10) 사건들을 모두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적인 또는 단체적인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하나님이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다”(시 92:11). 안식일은 우리를 원수와 행악자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사를 기념하고 찬양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구원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셨기 때문”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을 베푸셨기” 때문이다(시 92:3).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함이”(시 92:2) 옳다. 우리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려야한다”(시 86:12).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은사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다”(시 86:13). (3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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