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5편은 구약의 왕 중 왕인 다윗이 우주의 왕 중에 왕이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왕 중 왕의 찬양시이다.

 — 시편 145편(355.1)
 대왕(大王)의 찬양시
 시편의 히브리어 본래 명칭은 “찬양들”(Praises)을 뜻하는 “테힐림”Crehillim)인데 “찬앙하다”는 동사 “할랄”(halal)에서 나온 말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Praise the Lord!)는 뜻의 히브리어인 “할렐루야”(Hallelujah)도 그 어원이 같은 말이다. 그런데 “테힐림”의 단수인 “테힐라”(Tehmah), 곧 “찬양”은 시편에 모두 30회가 나오는데 그것이 한 시편의 표제(標題)로 쓰인 경우는 145편 뿐이다. (355.2)
 “다윗의 찬양시”로 고유하게 불리우는 145편은, 구약 성경의 왕 중 왕(王中王)인 다윗이 온 세상과 우주의 왕 중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왕 중 왕의 찬양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왕인 다윗이 자기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145편에서 막을 연 다윗 개인의 찬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146편에서 시작되어 시편의 마지막 장인 150편에 가서 절정에 이르는 그 장엄한 “할렐루야” 찬양의 서곡이 되고 있어 시편의 주역인 다윗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 자신이 대왕(大王)인 다윗은 그의 왕이신 하나님을 무슨 이유로 찬양하고 있는가? (355.3)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사를

   나는 묵상하리이다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시 145편 1~6절). (356.1)
 왕의 위대(偉大)하심
 천연계는 다스려지고 있다. 천재를 비롯하여 땅과 바다, 동물계와 식물계 등 생물과 무생물 모든 것이 철저히 다스려져야 우주가 존재할 수 있고 세상은 혼돈과 파멸을 면할 수 있다. 천연계와 동 • 식물계는 고정된 법칙, 곧 자연법칙에 의하여 철저히 그리고 변함없이 다스려지고 있다. (357.1)
 인간도 다스려져야 한다. 땅을 관리하는 책임을 위임받은 인간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세상은 유지될 수가 없다. 기계를 가장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듯이 인간을 가장 잘다스릴 수 있는 분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연계는 반역할 수 없어도,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것이 죄요 그 결과는 불행과 파멸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창조에 근거한 하나님의 주권(主權)이 절대적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統治)가 합당함(worth)을 공인하는 인간의 마땅한 행위가 곧 예배(worth+ship → worship)인 것이다. 이처럼 예배는 창조에 근거하고 있다. 창조의 기념일인 안식일만이 진정한 예배일이 될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출애굽기 20장 8~11절). 예배는 예배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이 수행하신 창조의 역사(役事)를 깊이 “묵상(默想)하”고 이를 “크게 칭송(稱頌)하”“주의 능한 일을 선포(宣布)하”는 것이다. 그것이 찬양(讚揚)이다. 그러한 찬양은 생명이 있는 한 “날마다” 역사가 존속하는 한 “대대로”, 우주가 존재하는 한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시편 33편 1절). (357.2)
아틀란타에서 개최된 침례화 세계 연맹에서 설교 했을 때는 그보다 더 위대 했지만, 가장 위대했던 때는 시골 공동 묘지에 서서 어머니 잃은 어린 소녀를 위로했을 때였다.
(358.1)
 “그것〈천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148편 5절). (358.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149편 1, 2절). (358.3)
 “우리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 (359.1)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것을 손수 다스리시는 창조주 이신 왕(Creator-King)이시다. 1초 동안 약 30만 km의 속도로 질주하는 빛이 약 9조 4,670억 km의 거리를 가는 광년(光年)의 단위로 50억 광년에 이른다는 광대한 우주를 영토로 지으시고, 보이지 않는 원자계로부터 1조의 1천억 배(1023)도 더 된다는 무수한 별들을 빈틈없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넓고 참으로 크신(大) 하나님이시요 최고의 왕이심에 틀림없다. 이처럼 엄연하고 엄청난 사실을 인식한 대왕(大王) 다윗은 왕 중 왕 하나님의 한없는 “광대하심”〈gadol〉. 곧 영원히 위대하심(greatness)을 미땅히 찬양받고 있는 것이다. (359.2)
 왕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선하심〉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 도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145편 7~10절). (359.3)
 잘 알려진 설교자 죠지 트루엣(G.Thiett)의 위대함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그는 강단에서 설교할 때 위대하였고, 워싱턴에 있는 중앙청 계단에서, 남 침례총회에서 설교했을 때는 더 위대했으며, 아틀란타에서 개최된 침례회 세계 연맹에서 설교했을 때는 그보다 더 위대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위대했던 때는 시골 공동묘지에 서서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소녀를 위로했을 때였다.” (360.1)
 맞는 말이다. 인간의 필요와 행복에 상관없는 그런 동떨어진 위대함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이 나와 다른 이들을 위한 위대함일 때 위대함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위대함은 신분에만 있지 않고 속성(俗性)에 있다. 우주처럼 광대(廣大)하신 하나님보다 우주처럼 관대(覽大)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더욱 우리의 찬양을 자아내는 것이다. “의”로우시면서도 “은혜로우시”“자비하시며”, “선대하시”는 그러한 하나님께 마음의 찬양이 솟구치는 것이다. (360.2)
 대왕이 찬양한 “주님의 기도”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能)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왕국〉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145편 11~13절). (360.3)
다윗은 그처럼 광대하시면서도 그토록 자상하신 하나님을 오장 육부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3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