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행복하려거든(시편강해) 제 5장 오, 내 사랑 예루살렘 33. 참으로 신묘막측(神妙莫測) 하여라
 3천년 전에 이미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 주의 책에 다 기록되었”다고 진술하게 하신 시인의 하나님이 곧 핵산을 만드시고 DNA의 암호책에 생명과 유전의 정보를 기록해 두신 그 하나님이 아니신가?

 — 시편 139편(343.1)
 시편의 신학이신 하나님
 어머니의 존재에 대하여 어떤 글을 써보려 한다면 모두 비슷한 고충을 겪을 것이다. 간단히 쓰기에는 사연이 너무 많고, 구체적으로 쓰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고, 대략으로 쓰자니 너무 추상적이 되어 어머니의 자상한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게 되고 ∙∙∙ . (343.2)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쓰려 할 때의 고충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높고 거룩하심과 영원하심과 무한하심만을 강조하다 보면, 그분의 초월성(超越性)이 두드러지게 되어 정말 하늘처럼 너무 높고 아득한, 동떨어진 하나님이 되고 만다. 정도가 지나치면, 그럴싸한 이신론(理神論 • Deism)의 빗나간 주장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모든 것을 영구 불변의 자연법칙에 고정시켜 놓은 채 인간의 역사나 자연계의 현상에 일체 관여하지 않으시는 유야무야한 궐석(闕席) 하나님이 되고 만다. 반면에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 포함되시고 만드신 천연계 속에서 생동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에 치우치다보면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시하는 대단한 착각인 범신론(況神論—Pantheism)에 빠지고 만다. (343.3)
 이러한 하나님의 두 속성 곧 만드신 피조물과 구별 되셔야 하는 초월성과 그러면서도 그것들과 함께 계셔야 하는 내재성을 어떻게 동시에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 시편은 이 만만치 않은 신학의 딜레마에 대한 완벽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시편 139편이다. (344.1)
 시편은 하나님을 냉랭한 신학(神學)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사람의 경험을 통하여 확신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시편의 신학이 되신다. 그리하여 (344.2)
   시간에 관한 한 영원하시고(Eternity)

   공간에 관한 한 광대하시고(Immensity)

   지식에 관한 한 전지하시고(Omniscience)

   능력에 관한 한 전능하시고(Omnipotence)

   존재에 관한 한 편재하시고(Omnipresence)

   관계에 있어서 신실하시고(Faithfulness)

   성품에 있어서 자비로우시며(Love & Mercy)

   도덕에 있어서 선하시고(Goodness)

   행하심에 있어서 공의로우시고(Righteousness)

   신분에 있어서 거룩하시기 때문에(Holiness)

   참으로 온전히 완전하시고(Perfection)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하신(Infinity) (344.3)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屬性)이 시편에서처럼 아름답고 완벽하게 수놓여진 곳이 또 어디 있으랴. (345.1)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全知)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39편 1~6절). (345.2)
화가 치밀어 오른 주인에게 한 차례 모진 매라도 맞게 된 판국에, 안델센은 애원하며 소리쳤다. “아저씨,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그러자 주인은 갑자기 누그러지고 노가 풀리며 오히려 위대한 주석 설교자 스펄젼의 표현처럼, 사파이어 보석처럼 광채가 찬란한 시편 139편에서 비쳐나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345.3)
 “모르시는 것이 전혀 없는(無所不知)

   전지(全知)하신 하나님(1~6절)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無所不在)

   편재(遍在)하신 하나님(7~12절)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는(無所不能)

   전능(全能)하신 하나님(13~18절)

   외롭지 않으심이 결코 없는(無所不義)

   공의(公義)로우신 하나님”

   (19~24절). (346.1)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델센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가 고픈 김에 큰 아이들을 다라 남의 밭에 들어갔다가 주인의 눈에 뜨이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그는 헌 신발짝이 벗겨지는 바람에 붙잡히고 말았다. 화가 치밀어 오른 주인에게 한 차례 모진매라도 맞게 된 판국에, 안델센은 애원하며 소리쳤다. “아저씨,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그러자 주인은 갑자기 누그러지고 노가 풀리며 오히려 안델센을 불쌍히 여겨 후의까지 베풀었다고 한다. (347.1)
 누군가가 나를 낱낱이 살피고(監察) 빈틈 없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의 행동거지(行動擧止)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심사동기(深思動機)까지도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마음은 좌절과 슬픔으로 채워진 채 얼굴로만 웃는 억지 웃음을 분별하시고, 둔한 혀로 표현된 불완전한 말뿐 아니라, 너무 괴롭고 답답하여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로마서 8장 26, 27절)는 그런 하나님이시다. (347.2)
 그렇다. 하나님이 인간의 언행심사(言行心思)는 물론 동기까지 낱낱이 모르신다면 어떻게 인간을 온전히 돕고 완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겠으며, 더구나 공의로운 심판을 베푸실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하나님께 보청기가 필요하실까? 악을 쓰듯 고함을 지르며 장황한 기도를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런 오해를 하게 된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장 7, 8절). (347.3)
 어디에나 계시는 편재(週在)의 하나님
 “내가 주의 신(神)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무덤)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여명에 번지는 햇살)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9편 7~12절). (348.1)
 무신론자인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신앙을 꺾어 보려고 집안 거실의 벽에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God is no where!)고 큼직한 글자로 써 붙였다. 잠시 바라보던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 그것이 우리 교회 목사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세요. 하나님이 지금(now) 여기(here) 계신다구요!”(God is now here!) 그렇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nowhere)을 주장하려면 먼저 계신 것(God is)을 전제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이다. (348.2)
곧 핵산을 만드시고 DNA의 암호책에 생명과 유전의 정보를 미리 기록하신 그 하나님이 아니신가? 죽은 사람을 부활시킬 때, 생명과 유전의 정보를 지닌 “알갱이”“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348.3)
 그 곳이 위로 가장 높은 하늘이거나 아래로 가장 낮은 음부(히브리어 shéol)곧 무덤이나 땅속, 가장 넓은 바다의 가장자리여도 거기 계신다. 새벽에 솟아나 어두움을 사르며 날개치듯 신속히 발산하는 아침 햇살의 속도로 도망친다해도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없듯, 인간은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을 피하여 갈 수가 없다. 하나님을 피하여 바다 끝으로 도망하려 했던 요나는 바다 속 큰 물고기의 배 속에서 하나님과 마주치지 않았던가? 시편은 작가(作家)와 작품(作品)을 혼동하는 어리석은 범신론을 단호히 배격한다. “주의 신”, “주의 앞”, “주의 손”, “거기 계시나이다” 등의 구체적 표현을 써서 그런 혼동을 원천적으로 예방하고 있다. (3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