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길은 멀지 않아요” 터키 속담 (119.1)
 내가 14살 되었을 때 한 소녀를 만나서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 집을 떠나서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그 소녀을 만났고, 서로 다른 경험들을 한 시간 이상 이야기 했습니다. (119.2)
 시간이 많이 지나갔을 때, 나는 그녀는 더 이상 나의 여자친구로 있는 것을 싫어하는 눈치를 보였습니다. 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미남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날 내가 그녀에게 내 여자 친구가 되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렇다고 확실히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여러분에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이야기만을 하겠습니다. (119.3)
 우리는 편지도 주고받고, 전화로 이야기도 하고 집에 와서는 그녀를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6년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애기간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결국 “결혼 할게요”라고 말하고 난 뒤에 각자에게 모든 것을 서로에게 위임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이 이야기하고, 싸우기도 하고, 의견도 충돌되고, 눈물도 흘리고 웃기도하고, 즐거워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실질적인 교제로 삼았습니다. (119.4)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결혼하자마자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후로는 더 이상 함께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생일날이나 발렌타인데이도 기억할 필요가 없었고, 이런 날들을 기억해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카드를 쓰고, 선물을 사는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와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으며, 더 이상 그녀의 상황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관계의 정점인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자라면 여러분은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을 그만 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결혼식 날이 우리 관계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함께 시작하는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19.5)
 결혼 후에 우리는 각자를 더 잘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았다면 스물 세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여러 해 동안 함께 살아감으로 우리는 이전 보다 서로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많이도 싸우고, 많이도 울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고, 아주 좋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서 겪게 되는 갈등을 뛰어넘어 함께 즐거워함으로 우리는 한 쌍의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119.6)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이 두 딸들입니다. 나의 아내와 함께 하는 결혼 생활은 끝이 없는 아주 먼 길입니다. 내 기도는 하나님께서 내가 죽을 때,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죽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기쁜 순간은 결혼식 날이 아니고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있습니다. (119.7)
 나의 제일 기쁜 날은 성령이 함께 하시는 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성령을 받는 날이 우리 “결혼일”이고 그리스도인 생활을 기념하게 되는 “큰 날”입니다. 이날이 우리여행의 끝 날이 아니고 우리 교제를 시작하는 유일한 첫 날입니다. (119.8)
 침례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우리가 있을 곳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침례를 받게 될 때 성령을 영접하고 믿음을 나타내게 됩니다. 성경에서 믿음은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19.9)
 이것은 한 번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배우자나, 사람들의 존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결혼관계에 들어가는 것처럼 성령과 생활을 함께 쌓아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함으로 우리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수많은 결혼이 서로를 가치 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깨어집니다. 여러분을 모르는 사람과 여러분이 함께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의 필요나 여러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과 함께 교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119.10)
 화잇부인은 다름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가 기대한 만큼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땅히 감사히 여겨야 할 만큼 그 약속을 감사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다.” (사도행적, 50). (119.11)
 우리가 침례를 통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 결혼식입니다. (119.12)
 지금 우리는 매일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과 실질적인 교제를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 (119.13)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동사는 반드시 해야하는 현재형입니다. 이 말의 뜻은 “끊임없이 매 순간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119.14)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뜻도 일생에 한번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사의 현재형 문장은 현재의 상태가 계속 진행하는 것을 가리켜 줍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꼴 지어 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말을 사도행전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에서 초대교회 과부들을 위하여 봉사하여 도울 집사님들을 뽑을 때 사용되어 집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을 사도행전 6장 5절“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바나바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성령의 충만한 자라”는 것은 어느 곳에서든지 그의 생애를 성령의 지배를 습관적으로 받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의지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란 그 사람이 단 한 번 극적인 경험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생애를 성령께 굴복시켜서 끊임없이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가 그의 생애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119.15)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개인적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진자라고 성령을 더 많이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에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19.16)
 성령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만 초청이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생애 전체에 이르러 오는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초청은 우리 생애의 모든 관점에 충분한 지배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하는 내 말과, 행동들, 마음, 생각들, 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들에 대한 지배입니다. 그리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성령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119.17)
 내가 침례를 받을 때, 성령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함께 하는 여행에서 시작에 불과 합니다. (119.18)
 생각해 볼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