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10 장  안식일과 바벨탑과 하나됨
 바벨탑의 저주로 흩어지고 분열하고 혼잡해진 여섯 날의 삶
 인류는 오늘날 민족과 나라로 갈라져 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으로 나누어져 있다(계 14:6). 그리하여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있다”(마 24:7). 이 모두가 바벨탑에서 비롯된 분열이다. 이 모두가 바벨탑에서 비롯된 대립이다. “본래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함으로써 그들의 언어가 혼잡케 되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그들이 온 지면에 흩어졌다(창 11:28). 사람들이 온 지면으로 분열되었다. (371.1)
 바벨은 공간의 대명사이다. 사람을 갈라놓는 것이 공간이다. 네가 서있는 자리를 내가 공유하지 못한다. 공간은 너와 내가 갈라서는 자리이다. 바벨은 공간의 이러한 모습과 기능을 대표한다. 이 배타적인 공간에서 사람의 언어는 혼잡해지고 흩어졌다. 사람의 말이 흩어지면서 사람의 마음도 흩어졌다. 말이 흩어지고 마음이 흩어지면서 사람도 흩어졌다. (371.2)
 여섯 날의 세상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날들과 더불어 제각각의 마음과 말로 나누어지고 흩어져 사는 세상이다. 나와 너의 말이 다르고 너와 나의 마음이 다른 세상이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이 제 각각이듯 너와 내 말이 제 각각이고 네 마음과 내 마음이 제 각각인 세상이다. 그러나 여섯 날의 흩어짐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섯 날의 삶은 내 정신이 내 안에서 제 각각으로 흩어지는 삶이다. 우리가 혼비백산으로 사는 날들이다. (371.3)
 이처럼 저 바벨탑은 여섯 날에서 하나됨을 빼앗아 가고 사람에게서 하나됨을 빼앗아갔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에서 하나됨의 경험을 빼앗아 갔다. 하나됨의 자리에 분열과 분산과 이별을 남겨 놓았다. 조화를 빼앗아가고 갈등과 분열과 혼란을 남겨놓았다. (372.1)
 안식일: 바벨탑이 빼앗아간 하나됨을 되찾는 날
 안식일은 바벨탑이 탈취해 간 조화와 통일과 하나됨을 되돌려 받는 날이다. 남편과 아내가 분열과 불화를 극복하여 하나됨과 조화를 되찾는 날이다. 부모와 자식이 한 마음이 되는 날이다. 형제와 이웃의 사이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날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엡 1:10)을 이룩하는 날이 안식일이다. (372.2)
 안식일은 만물이 하나님 앞에 다 모이는 메시아적 종말의 날의 대표이다. 안식일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와서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는”(마 25:31,32)날의 예표이다.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마 24:3)날의 예표이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창 49:1) 하였듯이 주님께서 “백성의 두령을 모이게 하고”(신 33:5), “물을 한곳으로 모으듯”(창 1:9) “열방을 모으고”(렘 3:17) “민족들과 나라들을 모여 여호와를 섬기게 하고”(시 102:22) “온 이스라엘을 헤브론에 모이게 하고”(대상 11:1) 또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이게 하는”(삿 20:19; 삼상 7:6) 날의 대표이다. (372.3)
 그렇다. 안식일은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창 49:2) 하였듯이 주님께서 모든 백성들을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고”(마 18:20) 하나님이 “세상 중에서 주님께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고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말씀을 저희에게 주시는”(요 17:6, 7) 날이다. 만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하게 하는(요 17:14) 날이다. 저희로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는 날이다. 그리고 저들이 하나님의 분부하신 말씀을 지키고 행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날이다(요 17:4-7). 저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날이다(요 17:19).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는”(요 17:22)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계신 곳에 있는 것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도 모두 주님이 있는 곳에 주님과 함께 있게 하는 날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아드님을 사랑하시므로 아드님께 주신 아드님의 영광을 모든 믿는 자녀들이 보게 되는 날이다(요 17:24). 아드님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고 아드님도 또한 저희 안에 있게 되는(요 17:26) 날이다. 이 날이 안식일이다. (373.1)
 안식일: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는 하나됨의 집
 안식일은 진실로 바벨탑의 저주를 쫓아내고 “전에 멀리 흩어져있던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게 되는”(엡 2:13) 날이다. 그리스도가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 .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는”(엡 2:13-16) 날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엡 2:17) 날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된”(엡 2:18) 날이다. “너희가 이제부터는 나에게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엡 2:19)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사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는” 날이다. 그리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엡 2:20-22) 날이다. (373.2)
 어떤 면에서 여섯 날은 바벨탑의 날들이다. 분열과 혼잡과 적대의 집이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것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다”(계 18:2). 그러나 안식일은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된 하나됨의 성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마다 연결되고 조화되고 하나되게 하는 집이다. 통일의 집이다. 조화의 집이다. 화합의 집이다. 하나됨의 거룩한 집이다. 안식일은 사람사람이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아 서로가 하나로 연결되고 통일되고 조화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날이다. (374.1)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우리 각 사람도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거룩한 한 마음의 사람이 되는 날이다. 우리 각 사람이 거룩한 한 마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통일된 인격으로 지어져 가는 날이다. 안식일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온전히 통일을 이룬 사람이 되는(요 17:23) 날이다. 이전에는 내 안에서 온갖 기운들이 서로 흩어지고 몸의 기능들이 흩어졌었다. 우리들이 살아온 6일의 삶이 그러했다. 우리들의 영혼이 바벨탑의 악령에 시달려온 삶이다. 우리 개인의 정신이 혼잡하고 산만하여 공중에 흩어졌고 우리 각 사람의 말이 통일을 잃어 지면에 흩어졌고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의 기운이 통일을 잃어 그 생활이 흩어졌다. 마음이 하나로 되지 못했다. 둘로 나누어지고 셋으로 나누어졌다. 이중심(二中心)의 사람 곧 중심이 여럿인 환자(患者)였다. 그러나 이제 안식일과 더불어 나는 바벨탑의 혼잡한 귀신의 영에서 “놓이고” “자유하게 되어”(눅 4:18) 온전히 하나됨을 이루게 되었다. 중심(中心)이 하나인 사람, 곧 충성(忠誠)스런 사람이 되었다. 진실로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나의 하나됨이 “다 이루었다”(창 2:2). 제칠일 안식일에 내가 나의 정신과 기운을 하나님의 “내 영과 함께 모음으로써”(고전 5:4) 온전한 통일적 인격을 다 이루는 것이다. (374.2)
 안식일은 우리가 기분이나 전환하는 그런 날이 아니다.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하여 떠들썩하게 들뜨는 날인 것이 아니다. 즐거운 날이라 해서 안식일은 그저 빵과 서커스의 날인 것이 아니다. 먹고 노는 것으로 그치는 날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한 성령을 갈망하고 거룩한 성령을 경험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거룩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흐트러진 우리의 삶을 수선하는 날이다. 흩어진 시간을 모으고 흩어진 여섯 날을 하나로 모으면서 우리의 흩어진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날이다. 6일 내내 우리는 바벨탑의 악령에 시달려 “성령 부재의 삶”을 사는 것 같은 곤비함을 느낀다. 성령 부재로 인한 통일 부재의 곤비함을 느낀다. 우리는 나뉘고 흩어진 삶으로 신음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분할되지 않는 정신을 기다리며 분할되지 않는 사랑을 기다린다. 분할되지 않은 삶을 기다린다. 분할되지 않는 삶의 날을 기다린다. 제칠일 안식일을 기다린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제칠일 안식일을 기다린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오시는 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내 영혼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이다. (375.1)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어 평안하신 날이다”(창 31:17). 평안하셨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뱌인나파쉬이다. 바인과 네페쉬의 합성어이다. 네페쉬는 “영”이다. 성령이다. 바인은 “들어가다”이다. 뱌인나파쉬는 “영이 들어가다”의 뜻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이 나의 흩어지고 분열된 삶, 무엇인가 결여된 나의 삶으로 들어오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이 내게 들어와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모이므로”(고전 5:4) 내가 분할되지 않는 영혼으로 다시 소생하는 날이다. 내 영혼의 분열과 흩어짐과 혼잡함이 끝나고 부족함이 끝나는 날이다.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내가 온전히 하나된 영혼으로 치유되고 온전히 하나된 영혼으로 부활하는 날이다. (376.1)
 내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되고 주님과 하나될 때 나는 진실로 내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주님 안에서 하나됨을 온전히 이룰 때 사랑하는 나의 가족도 “나 있는 곳에” 있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게 되었고 나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되었다”(요 17:26). 하나님께서 주님을 사랑하심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 그 아들이 하나됨 같이 우리도 하나된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 날이 안식일이다. (376.2)
 거룩으로 분리되고 거룩으로 하나된 안식일의 민족
 제칠일 안식일의 민족인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분리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한 민족이다. 그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뽑아내어 분리시키고 이주시킨 사람이다. 이 분리의 거룩은 그후 이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계집종 하갈에서 아들을 보았고 또 나이 백세가 되어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낳았다. 이 집의 거룩한 분리의 전통은 두 아들이 한 민족을 이루는 길을 가지 못하게 했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고 이삭을 선택하여 구별하였다. 이삭으로 아버지의 기업을 잇게 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 되어야 했다. 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났으나 어머니가 다르다하여 두 아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한 민족이 되지 못했다. 분열의 전통이고 흩어짐의 전통이다. 거룩한 분리의 전통이기도 하면서 바벨탑의 분열의 망령이 머뭇거리는 전통이기도 하다. 이삭은 리브가와 혼인하여 한배 쌍둥이로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그러나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자식인데도 그리고 한배 쌍둥이로 낳았으면서도 그 가족은 하나됨을 끝내 이룩하지 못했다. 두 형제는 한 민족이 되지 못했다. 거룩한 분리의 역사이면서 바벨탑의 분리의 역사였다. (376.3)
 갈대아 우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선민적(選民的) 에너지의 과잉 탓인가. 앞서 아브라함은 롯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한 집에 살지 못했다. 삼촌과 조카의 사이에서 갈라져 살았다. 지면에 흩어지는 삶으로 나아갔다. 아브라함의 자식 대는 사촌사이도 아니고 삼촌 사이도 아니다. 친형제 사이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르다는 이유를 분리의 명분을 삼고 갈라졌다. 어머니 다른 것이 분리의 명분이 된다면 한 아버지 한 어머니 자식으로 태어난 형제라면 같이 살아도 되지 않겠는가. 마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이라도 하는 듯이 같은 부모에 그것도 한날 한시에 쌍태로 두 아들을 낳게 했다. 그러나 결과는 뼈아픈 분열과 이산과 흩어짐이었다. 같이 하나가 되지 못했다. 에서와 야곱은 한 민족이 되지 못했다. 질기고 질긴 분열의 전통이요 갈등의 역사였다. (377.1)
 아브라함 가족의 분열은 야곱의 열두 아들 대에 와서 비로소 극복되었다. 낡은 전통과 낡은 사고에서라면 야곱의 열두 아들은 얼마든지 나눌 수 있었다. 얼마든지 대립하고 갈라서고 열두 민족으로 흩어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만한 상황도 여러 번 발생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아버지와 네 어머니의 열두 자식이었지만 수많은 분열의 갈등을 극복하고 끝내 하나됨의 삶을 완성해 냈다. 열두 아들을 한 마음으로 묶고 네 배 자식들을 한 배 자식으로 묶는 영성의 날이 안식일이다. (3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