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의 망국한을 애상의 눈물로 기록한 서정시가 “포로의 시” 혹은 “애국의 시”로 알려진 137편이다.

 — 시편 137편(333.1)
 예루살렘이 그리워 못 살겠다며, “다음 해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마다 소원을 되뇌었던 선민(選民)들은 어느새 마음이 변하여 당장 살기 편한 바벨론에 펄썩 주저앉았다. (333.2)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나라 없는 슬픔을 이스라엘 백성만큼 자주 그리고 오래도록 뼈저리게 겪어 온 민족도 드물다. 그 중의 한 차례로 기원전 722년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하여 종말을 맞은 데 이어, 기원전 586년에는 남방 유다가 신바빌로니아에 의하여 정복을 당한 뒤 잡혀가 70년간의 포로살이를 치루게 된다. 그 때의 망국한(亡國恨)을 애상의 눈물로 기록한 서정시가 “포로의 시” 혹은 “애국의 시”로 알려진 시편 137편이다. 이 시는 사무친 망국의 한(恨)을 품고 있으면서도 협소한 민족주의를 능가한 신앙의 열정(熱情)으로 끓고 있다. (333.3)
 가정 제도를 마련하여 집(家)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듯, 민족들이 오순도순 정답게 살도록 큰 집인 나라(國家)를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맥락을 같이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면 동시에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신앙 윤리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334.1)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죽은 뒤 무덤인들 남겨 무엇하랴.” 인간의 가장 보람된 죽음이 신앙을 위한 순교(砲敎)와 나라를 위한 순국(苑國)인 것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다. (334.2)
 이역 하늘과 강변, 버드나무와 수금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정하여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 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137편 1~4절). (335.1)
 이역 하늘 바라보며 떠나온 조국을 그리워하던 독립투사들의 애상(哀傷)이, 뜻이 그윽한 노래「선구자」에는 “일송정 푸른 솔”“한 줄기 해란강” 그리고 “용두레 우물가”와 달빛이 고요한 “용문교”에 애처롭게 수놓여 있다. 정든 고국을 떠나 이역 만리 바벨론 땅에 사로잡혀 온 유대인들은 그들의 애상을 “바벨론의 여러 강변”과 거기 늘어선 “버드나무” 그리고 “시온의 노래”를 뜯을 수 있는 생명처럼 아껴온 “수금”(堅琴)으로 심금(心琴)을 울렸다. (335.2)
 유프라테스강 좌우에 펼쳐진 바벨론은 거기서 뻗어나간 여러 운하와 관개 수로에 둘려 있었으며, 버드나무가 줄지어 선 고요한 강변은 한 날의 고달픈 노역이 끝난 뒤 타향살이에 지친 실향민(失鄕民)의 슬픔을 달래는 요람이 되었다. (335.3)
고국에 살 때는 이렇게 사무치도록 그리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온산이었다. 높지 않고 험하지 않아 오르기 편했던 정다운 산 시온.
(336.1)
 아름답고 평화스러웠던 지난 날의 추억처럼 말없이 흐르는 강물, 그것은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예레미야애가 2장 18절)린 “시온의 눈물”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강물은 눈물이었으며 흐르는 강물은 흐르는 눈물이었다. 추억이 강물처럼 흐르는 강변에 늘어선 애잔한 나무, 버드나무는 울고 있는 나무(weeping willow)였으며, 그들은 함께 울어 주는 나무, 버드나무 아래 주저앉아 버드나무와 함께 울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서서 울고 그들은 주저 앉아 울고 ∙∙∙ 그 버드나무에 말없이 걸려 있는 수금, 그것은 참으로 표현할 길 없는 애상(哀傷)이었다. (336.2)
 시온을 기억하며
 고국에 살 때는 이렇게 사무치도록 그리울 줄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온산이었다. 높지 않고 험하지 않아 오르기 편했던 정다운 산 시온, 옆구리를 둘러 기드론 골짜기가 우아하게 뻗어내리고, 발치엔 힌놈의 골짜기가 쭈그리고 앉아 있어 능선의 단조로움을 살포시 가리고 있었다. 산들을 병풍처럼 두른 채 금빛 찬란한 도성 예루살렘을 가슴에 품고 예루살렘 성전을 젖먹이듯 자랑스럽게 안고 있던 그 시온산이 아니던가? (336.3)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125편 1, 2절). (336.4)
 울었도다
 그러나 무자비한 적군의 발길에 시온산은 짓밟혔으며 치마처럼 두른 예루살렘의 성벽은 헐리어 수치를 드러냈다. 그리고 설마설마하던 예루살렘 성전마저 불길에 휩싸인 여러 날 뒤 폐허로 드러났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신다더니 ∙∙∙ 그러나 포대기처럼 그들을 겹겹이 둘렀던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거듭된 불순종과 반역으로 걷어찼으며 그들은 이제 걸친 것 없는 벗은 몸으로 이국 땅에 내던져진 것이다. (337.1)
 하나님 임재가 약속된 예루살렘 성전, 구속(救聽)이 경험되는 거룩한 제사, 절기 명절이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며 산지사방(散之四方)에서 모여들어 서로 얼싸 안았던 재회(再會)의 감격—이제 이 모든 것은 눈물을 자아내는 한낱 그리운 추억이 되고 말았는가? (337.2)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가 약속된 시온산,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시편 2편 6절)고 선언하신 그 시온산은 아직도 거기 전처럼 앉아 있지 않는가? 옮길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는 시온산처럼 태연(泰然)하고 태고연(太古然)한 그런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아야 한다. (337.3)
 시온산은 하나님의 거처인 성소〈전〉가 있는 곳이었으며. 당신의 백성과 동거(同居)하기를 그처럼 원하시는 하나님께 “유다는 여호와께 성소가”(시편 114편 2절)되었다. 그러므로 시온을 기억하고 우는 울음, 그것은 위로가 약속된 성도의 애통(哀痛)이며(마태복음 5장 4절), 마침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고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요한계시록 21장 2~4절)겨 주실 행복한 눈물인 것이다. (3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