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9 장  안식일, 거할 곳이 많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
 거할 곳과 양식이 풍족한 하나님 나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 (355.1)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20). (355.2)
 세상에는 근심이 많다. 세상에서는 “사람이 근심하고 심히 분노한다”(창 34:7).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다”(시 38:17). 사람들은 “마음의 근심으로 심령이 상하고”(잠 15:13), “뼈가 마른다”(잠 17:22). 사람들이 “세상 근심으로 죽을 지경이다”(고후 10:10). 이 걱정은 모두 어디서 오는 것인가. 모두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마 6:25) 하는 근심 걱정이다. “세상의 백성들이 모두 이것을 구하여”(눅 12:29) 근심하고 걱정한다. (355.3)
 안식일은 사람들의 이같은 근심 걱정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요 14:1)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는 거할 곳이 많은 나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모아들이지 않는 공중의 새들도 천부께서 기르시는” 나라이고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 백합화”“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풀들도 하나님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 나은 옷으로 입히시는”(마 6:26-30) 나라이라는 것이다. (355.4)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에 매달려 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이런 일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로 초청한 것이 아니다. 이 일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길을 찾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 . 성령 안에서의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살까를 염려하고 염려하는” 이방인들의 “일로 하나님께 구하는 곳이 아니다”(마 6:31-32 참조).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천부께서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마 6:32).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구할 것은 그런 이방인의 걱정과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이다. (356.1)
 안식일은 거할 곳과 양식이 풍족한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를 상징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삶을 경험케 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이다. 안식일 신앙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 먼 나라 세상에서 “주려 죽게 된” 탕자가 “품꾼에게조차 양식이 풍족한 아버지의 집”“거할 곳이 많은 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하고 일어서는 결단이다(눅 15:18). 그리고 곧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감”(눅 15:20) 이다. 그리고 이 탕자가 큰 사랑으로 아버지의 영접을 받음이다(눅 15:20-24):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안식일은 이러한 날이다. 안식일은 이러한 나라이다. (356.2)
 그러면 안식일은 그 어떤 성격에서 “거할 곳이 많고” 양식이 풍족한 “내 아버지의 집”을 대표하고 상징하는가. 그것은 안식일이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공간의 성소가 아니라 그것과 정반대로 무제한적이고 수용적인 시간에 설정된 하나님의 성소라는 성격에서 그렇다. (357.1)
 공간의 세계는 그 소유의 형식이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누구나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할 곳으로 근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핍절한 공간 세계에서 거할 곳이 많은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의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57.2)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 세계의 소유 경험과 전혀 다른 세계이며, 그 경험이다. 독점적, 배타적 소유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나라가 하나님의 풍족한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속성의 많은 부분을 가진 것이 시간이다. 안식일은 시간의 왕국이고 시간의 성소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의 왕국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그리고 이 시간의 왕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셨다. 우리가 이 시간의 나라로 상징된 하나님의 풍족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핍절한 공간 세계의 소유관계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357.3)
 근심이 끊이지 않은 공간의 세계
 세상에서 사람들의 일차적인 근심걱정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있을 곳의 부족이다. 이것이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마 6:32) 중요한 걱정거리들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의 결핍에서 불안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생존의 공포를 느낀다. 삶이 줄어드는 공포, 생존에서 밀려나는 공포, 죽음이 다가오는 공포를 느낀다. 사람의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본능은 이러한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본능,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있을 곳을 소유함으로써 그들은 삶을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가 곧 생존인 것이다. 소유가 있는 자는 생존이 있는 자이다. 소유가 없는 자는 생존이 없는 자, 없이 여김을 받는 자이다. 소유가 큰 자는 크게 생존하는 자이고 소유가 적은 자는 적게 약하게 위태롭게 생존하는 자이다. 하찮은 자이다. (357.4)
 남으로부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 속에서도 그렇다. 자신의 의식에서도 생존이 흔들리고 떠밀리고 떠내려가고 있다. 죽음 자체보다도 더 가혹한 경험이다. 이 경험으로부터의 탈출은 필사적이다. 이 필사적인 탈출이 공간의 소유이다. 사람의 소유 행위는 필사적인 삶의 몸부림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크게 소유하여 생존의 안전을 기하려는 몸부림이다. 이리하여 재물을 쌓고 학벌을 쌓고 권력을 쌓고 명예와 인맥을 쌓는다. 이것이 무너지면 죽고 이것을 놓치면 죽는다 싶기 때문이다. (358.1)
 그러나 공간은 이러한 필사적인 소유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몸부림 때문에 더 비좁고 부족한 세계이다. 사람에게 공간은 항상 독점적이고 그 공유가 불가능한 세계이다. 우리는 모두 공간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산다. 그런데 우리 각자는 그 공간을 독점적으로 차지한다. 나의 신체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다른 사람이 같은 시각에 나와 같이 공유할 수가 없다. 나의 신체가 점유한 그 자리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다. 한 의자에 두 사람이 앉을 수 없다. 한 숟갈을 두 사람이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 나의 신체가 점유한 그 자리는 나의 거처이다. 나의 생존의 거처이다. 그 공간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생존의 기반을 내주는 것이며 내 생존을 내주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그 차지한 공간을 내줄 수 없다. 동일한 공간을 동시에 공유할 수 없다는 말은 동일한 공간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남의 소유를 내가 기뻐하고 나의 소유를 남이 기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너의 왕됨과 너의 장자 됨과 너의 신랑 됨을 진실로 기뻐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에게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것을 보고 기쁨이 충만한 친구의 삶이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소유가 곧 생존으로 이해되는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남는 길은 차지하고 지배하는 길이다. 뺏어서 독차지하는 길이 살아남는 길이요 뺏어서 독차지한 소유를 한사코 지키는 길이 삶을 지키는 길이다. (358.2)
 개인의 독점적, 배타적 소유가 불가능하면 사람들은 종족적 독점이나 계급적 독점을 기도한다. 그리하여 세상은 차별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의 공간에 아무나 끼어 들 수 없다. 내 가족, 내 종족, 내 집단만이 들어올 수 있다. 특별한 사람만이 특정한 삶의 공간에서 삶을 향유할 수 있다. 이것이 공간 세계의 윤리이다. 적자생존의 윤리이다. 완력을 차별하고 학력을 차별하고 재력을 차별하고 혈통과 신앙과 도덕을 차별한다. 받아들일 사람을 선별하고 내쫓을 사람을 골라낸다. 학교가 차별하고 병원이 차별하고 교회가 차별한다.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와 죄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그들은 산 자의 땅에서 쫓겨난다. (359.1)
 진실로 모든 사람은 공간의 독점적인 점유와 배타적인 소유로 말미암아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친구가 아니라 적수가 된다. 이웃에게 “너는 이리로 올라 오라”(계 4:1)고 말할 수 없다. 그의 통상적인 말은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 이다. 사람들은 더 소유한 자를 미워하고 덜 가진 자들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웃에 대하여 선한 동기를 잃고 더욱 기만적이며 약탈적이고 파괴적으로 되어간다. 사람의 전반적인 생활방식이 “도적질과 간음과 거짓맹세와 우상숭배”(렘 7:8-9) 이다. (359.2)
 이기심과 적대감과 거짓과 약탈 위에 세운 생존과 소유는 근본적으로 선의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법률과 도덕도 모래 위에 세운 성처럼 근본적인 효력이 상실된 것이다. 생존과 소유의 문제는 항상 힘으로 종결되어왔지 도덕과 선의로 종결되지 못했다. 약육강식이 공간의 법칙이다. 그런데도 허망한 종교와 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을 얻었나이다 라고 말한다”(렘 7:10). (360.1)
 진실로 이 세상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생존과 소유의 토대가 부당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힘과 안전의 토대가 부당하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생존의 공포에 쫓겨 제아무리 필사적으로 뺏고 차지해도 눈 앞의 하늘은 늘 충만한 느낌이 아니라 늘 공허한 느낌이다. 마음은 늘 가득한 것이 아니라 늘 허망할 뿐이다. 공허한 저 하늘 아래의 생존은 언제나 불안하고 언제나 두렵고 언제나 슬프다. 재물을 쌓음으로 안심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약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그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며 가는” 세상이다. 죽을 때도 그 재물로 말미암아 “근심하며 가는”(마 19:22) 세상이다. (360.2)
 피와 죽음을 부르는 공간의 성전과 그 성전의 신
 성전은 생명의 터전이다. 나의 생명의 “있을 곳”을 보장하고 나의 생존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생명의 피난처이다. 생명의 산성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공유가 불가능하고 공생과 상통이 불가능한 공간에 생존의 불안과 공포가 없는 생명의 산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공간의 성소가 과연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동산이 될 수가 있을까? 거할 곳과 양식이 풍족한 하나님의 집을 공간 위에 세울 수가 있을까? (3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