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8 장  안식일의 종교는 제사와 정죄의 종교가 아니라 자비의 종교이다
 안식일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뜻
 안식일을 둘러싸고 예수 그리스도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자주 논쟁이 있었다. 예수님의 안식일관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관이 충돌한 것이었다. 안식일에 대한 상이한 두 태도의 충돌은 두 개의 다른 신앙의 충돌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인식의 충돌이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 12장 21절까지 이어지는 안식일 토론을 보아도 예수님은 안식일의 문제를 종교관의 문제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신관의 문제로 제기하고 있다. (343.1)
 이 안식일 토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던 예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일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마 12:1, 2) 이라 하였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어떤 뜻이 나타나고 있는가. 그들이 안식일 예배 끝에 점심도 먹이지 않고 보낸 나그네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일도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라고 정죄하는 그들의 안식일에는 바리새인들의 어떠한 마음이 나타나고 있는가. 자비인가 제사인가. 예수님이 볼 때 바리새인들의 이같은 안식일 인식은 자비의 종교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제사의 종교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한 안식일의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지 않고 제사를 원하는 신이다. (343.2)
 그러나 예수님의 안식일은 그런 안식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종교는 그러한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출 6:16; 마 12:7). 예수님의 종교는 제사의 종교가 아니라 자비의 종교이다. 예수님의 안식일도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마 12:7)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마 15:32)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들이 인생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결코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마 12:7) 하였다. (344.1)
 하나님의 뜻을 달리 이해함으로 하나님의 종교는 달라진다.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네가 어떻게 읽느냐”에 의해서도 달라진다(눅 10:26). 바리새인들의 인식과 태도에서는 “너 있으라,” “너 살라”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있지 않다. 대신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강조되고 있다. 인간의 생존을 억압하는 제사가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종교와 제도가 아니라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는” 종교와 제도가 반영되어 있다. (344.2)
 이방 종교의 가장 큰 특성은 제사와 정죄이다. 종교가 그 신봉하는 자를 가두고 억누르고 헐벗고 병들게 하는 수단이 제사와 정죄이다. 종교가 타락하는 모습이 제사와 정죄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바로 그러한 종교의 최대 피해자였다. 그들의 종교적 봉사의 핵심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이었으며, 그 같은 희생제사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정죄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수 천년 동안 이러한 종교적 관행과 경건의 전통을 통하여 키워온 습관은 삶의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누군가 정죄하고 제물로 삼을 희생양을 찾는 일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그들은 적절한 희생양을 찾고 적절한 “변명”을 찾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자신의 정죄를 면하기 위하여 말 못하는 짐승을 죽이고 힘없는 어린 아기를 바치고 시집 못 간 처녀를 제물을 삼고 장가 못 간 총각으로 제사하는 이교도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 천년간 정죄와 제사의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쳐온 이러한 역사적 죄과의 응보로 나치 치하에서 몇 천 명씩, 몇 만 명씩, 몇 십만 명씩 이른바 “문명 세계를 위한 집단적인 제물”이 되어 죽었다. 이러한 비극 끝에 그들은 무슨 교훈을 깨달아야 하는가. (344.3)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이 교훈을 가르치신 분이다. 예수님의 큰 사명의 하나는 제물과 제사의 종교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제사의 종교를 자비의 종교로 개혁하는 일이었다. 제사를 핑계 삼아 사람을 “없이 하소서” 하고 부르짖는 종교를 사람을 향하여 “너 있으라,” “너 살라,”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종교로 개혁하는 일이었다. 제사 신의 제물로 먹혀지는 피조물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종교로 개혁하는 일이었다. 신에게 제사하기 위하여 사람의 생존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정죄를 면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불쌍한 희생양을 찾는다면 인간의 생존은 안녕을 누릴 수 없고, 인류의 양심은 더 이상 구원을 기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계속하여 제사의 신에게 종살이하고 제사의 신의 제물이 된다면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345.1)
 그러므로 종교는 더 이상 제사의 신에게 종살이하고, 더 이상 제사의 신의 제물이 된 사람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사람이 죄의 제물이 되고 환경의 제물이 되는 처지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제사의 짐들을 지우면서 그 자신들은 그 짐에 손도 대지 않는 자세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눅 11:46 참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오라” 해놓고 그들을 더욱 무거운 짐으로 수고하고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저들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게 해야 한다(마 11:28). 저들을 반듯하게, 바르게 살게 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종교의 기능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안식일에 나타내신 뜻이었다. (346.1)
 예수는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더 이상 어린양을 잡지 말고, 더 이상 나그네와 죄인들을 제물로 삼지 말고, 더 이상 “무죄한 자를 죄로 정하는” 못된 행위를 계속하지 말고 만약 필요하다면 “나”를 제물로 삼으라고 자기를 내어준 “사람의 아들”이다. 제사의 신에게 붙잡혀 있는 인류를 대신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마 16:20)고 가르친 “사람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다른 데서 십자가를 멜 사람을 찾는 종교가 아니라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종교이다. (346.2)
 무엇보다도 예수의 하나님은 책임을 사람에게 전가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제물이나 제사를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혹은 인류 전체를 제물로 삼는 대신 자기 스스로가 제물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자기 자신이 직접 책임의 제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자비를 나타내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사람의 모습으로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습이며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을 따라 가는 사람들, 정죄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나타내어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를 나타내는”(눅 6:36) 사람들의 모습이 십자가의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의 모습이다.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가르치는 종교의 날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안식일 신자들이다. (346.3)
 그러므로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마땅히 붙잡아내어야 한다”(마 12:11). 그리고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마 12:12).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옳다”(마 12:10). 그리하여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이 있던 “그 때,” 곧 그 안식일에 “한편 손 마른”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고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하여 성하게”(마 12:10, 13) 하셨다. 그리고 정죄와 제사의 안식일을 신봉하는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어떻게 예수를 죽일고 의논하”고 있는 그 시간에(마 12:14) 자비의 하나님을 섬기며 자비의 안식일을 지키는 예수님은 사람의 고통과 죽음이 압박해오는 잘못된 안식일의 “거기를 떠나 가셨다”(마 12:5). 안식일의 잘못된 관점을 떠나셨다. 올바른 안식일관의 자리로 옮기셨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좇아” 잘못된 안식일의 “거기” 곧 잘못된 안식일관을 떠났다. 그리고 예수를 따라 올바른 안식일관으로 옮기었다. (347.1)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자비의 봉사
 그리고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다”(16).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마 12:18; 사 42:1-3) 곧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다”(마 12:21). 예수의 안식일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다.” 자비의 안식일은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지 않는 안식일의 봉사로 이어진다. (347.2)
 하나님의 종교도 그의 안식일도, 그의 아들의 봉사도 모두 자비의 봉사이며 “성령의 봉사”이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되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심판을 이방에게 알게 할 것이라” 하셨다. 성령의 마음으로 봉사하는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큰 소리를 내지도 아니하니 아무도 길에서 그소리를 듣지 못하리라”하셨다(마 12:19; 사 42:1).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자비와 쉼의 초청자이다. 자비의 봉사자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이러한 정신의 주체이며 화신이다.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봉사의 공로를 알리거나 인정받으려고 “다투지 아니한다.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오히려 쉼 없는 “저희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신다”(16). 나의 봉사를 “너희 앞에 나팔 불지 말라”고 경계하셨다(마 6:2).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마 6:1). 선을 행하는 안식일의 종교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에게 배우는 종교이다. 쉽고 가벼운 멍에요 짐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신앙하는 종교이다. 상급을 받으려는 봉사가 아니라 사랑이 강권하여 이루어지는 봉사이다. 그래서 쉽고 가벼운 멍에이다. 오직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려는”(사 41:3) 하나님의 마음으로 메는 멍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 배우고 예수의 심령으로 메는 멍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섬기는 봉사이기 때문이다. 제사와 정죄의 멍에는 언제나 힘들고 무거운 멍에이지만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의 멍에는 쉽고 가벼운 멍에이다. (348.1)
 안식일의 종교: 심판을 이기는 자비의 종교
 안식일 신앙은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신앙이지만 정죄의 종교는 아니다. 오히려 심판을 이기는 자비와 긍휼의 종교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는”(사 42:3; 마 12:20) 종교이며, 더 나아가서 야고보의 주장대로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긍휼”(약 2:13)의 종교이다. 제사와 정죄의 신앙은 심판을 이기지 못한다. “긍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기”(약 2:13) 때문이다. (349.1)
 안식일을 지키는 아들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아들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아들들이다. 주인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고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 같이 나도 이웃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다”(마 18:34)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부께서도 우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18:35)고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하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마음이 안식일 신앙인의 마음이 아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고 기도하는 세리의 마음이 안식일을 지키는 아들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불쌍히 여기옵소서”하는 자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하면서 “저를 불쌍히 여기는 자가”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바로 이 안식일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다. (349.2)
 안식일의 주인: 죄인의 처지로 오신 성육신의 아들
 안식일 계명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나타난 계명이다. 이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 사람의 아들은 “말씀이 육신이 된” 아들이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된”(빌 2:6) 아들이다. “죄인과 같이 된” 아들이다. 자기의 자리를 두 강도의 사이에 정한 아들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 아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안식일의 정신이다. 사람과 같이 된 하나님의 마음. 죄인과 같이 된 아들의 마음이 안식일의 마음이다. 곧 자비의 마음이다. (350.1)
 자비가 무엇인가?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의 입장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처지에 자기가 서는 것이 아닌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이 아닌가. 그리고 성육신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죄 많고 고통스러운 사람의 처지로 내려오셨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안식일이 무엇인가?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는 날이며, 죄인의 형상을 취하신 하나님이 죄인에게 오시는 날이 아닌가. 안식일 자체가 시간의 모습을 취한 영원히 사람에게 오는 날이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일에 찾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것”(마 9:13; 막 2:17)이기 때문이다. (3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