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보잘것없고 누추해도 맘 편히 쉴 곳은 내 집밖에 없다는 단순한 주제로 만인의 공감(供感)을 족히 불러 일으켜 온 작사자 페인(John Howard Payne)은 불행하게도 그러한 “즐거운 나의 집”을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외로운 방랑자였다.

 — 시편 127, 128편(315.1)
 내 집뿐이리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고요한 밤 달빛도 창 앞에 흐르고

 내 푸른 꿈 길도 내 잊지 못하리

 저 맑은 바람아 가을이 어디뇨

 벌레 우는 곳에 아기별 눈뜨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뿐이리. (315.2)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가곡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라는 제목으로 나라와 민족의 구분 없이 애창되고 있는 이 노래는, 1823년 런던에서 발표된 오페라, “클라리:밀란의 하녀”(Clari:or, The Maid of Milan)에 포함되어 불리운 뒤 일약 세계적인 노래가 되었다. (316.1)
 아무리 보잘것없고 누추해도 맘 편히 쉴 곳은 내 집밖에 없다는 단순한 주제로 만인의 공감(共感)을 족히 불러 일으켜 온 작사자 페인(John Howard Payne)은 불행하게도 그러한 “즐거운 나의 집”을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외로운 방랑자였다. 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 밤, 뉴욕의 어느 아늑한 집에서 자신이 작사한 “즐거운 나의 집”의 포근한 노래가 흘러나와 꽁꽁 언 그의 귓전을 스쳐갈 때, 그는 그 집 창가를 집 없는 방랑자의 피곤한 발길을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1843년 51세의 나이로 머나먼 아프리카의 튜니스에서 그의 일생을 끝마칠 때까지 그는 자신의 “즐거운 집”을 한번도 누려 보지 못한 외로운 나그네 였다. (316.2)
 “즐거운 나의 집”의 작사자가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 “즐거운 나의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는 그것을 그가 태어난 뉴욕에서 찾지 못했고, 그의 가곡이 발표된 런던에서도 그리고 끝내는 그가 죽은 튜니스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 72편과 함께 솔로몬에게 돌려지는 또 다른 시편인 127편에서 그 까닭을 찾게 되고, 같은 주제를 함께 다루고 있는 128편에서 마침내 그 집의 주소를 찾게 된다. 잠시뿐만 아니라 영원히 “즐거운 나의 집”을 ∙∙∙ . (316.3)
 허사, 허사, 허사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 ”

   (127편 1, 2절). (317.1)
바쁜 일손을 놀리며 밭일하던 부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경건히 머리 숙여 기도드리는 모습에서 ∙∙∙ 우리는 행복한 부부의 핵심을 보게 되고 즐거운 가정의 기초를 알게 된다.
(317.2)
 참으로 우리가 사는 집들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러나 살기에 편리하고 보기에 화려해진 집(家屋)들이 더 행복해진 “즐거운 나의 집”(家庭)을 의미하지 않음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요즈음이 아닌가? 우리네 수입도 엄청나게 늘어나 자식들을 전보다 더 잘 먹이고 입혀도 우리의 청소년들이 결코 더 잘되어 가고 있지 못한 까닭은 또 무엇인가? (317.3)
 “생명의 근원은 마음에 있고(잠언 4장 23절), 공동체와 사회, 교회와 국가의 중심은 가정에 있다. 사회의 안녕, 교회의 성공, 국가의 번영이 가정의 감화력에 달려 있다”(엘렌 G. 화잇, 그늘없는 가정, 13). (317.4)
 바로 인간 세상의 기초요 사회 생활의 중심이 되는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회와 국가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왜 무너지고 있는가? 결혼과 가정 제도를 창시(創始)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기초와 중심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가정에서부터 배제(排除)되거나 배척(非序)되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318.1)
 거의 3천년 전에 공개된 가정 백서(伯書)에서 시인은 분명히 선언한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가정을 세워 보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사(虛事)요. 하나님이 배제된 가정들로 구성된 성(城), 곧 인간 사회가 아무리 안정과 안녕을 지켜보려 해도 그것 또한 허사(虛事)요, 이런 판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킨다 해도 그것마저 허사(虛事)일 뿐이라는 삼중(三重) 허사(虛事)를 선언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318.2)
 자식 — 내일을 겨냥한 화살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壯士)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 ”

   (127편 3~5절). (318.3)
 세상의 안전과 사회의 복리는 가정에서 생산(生産)되는 자녀들의 품질에 달려 있다. 자식들이 잘 되면 세상이 잘 되고 자식들이 못 되면 세상은 망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자식들은 참으로 하나님이 세상에 주실 수 있는 최선의 유산이요. 최고의 보상인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목적(目的)하는 모든 목표(目標)를 관철시킬 수 있는, 전통에 가득한 가장 확실한 화살들인 것이다. 이처럼 내일을 겨냥한 화살들인 중요한 자식들, 이러한 자식들을 생산해내는 가장 중요한 가정, 그러한 가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127편에 이어 128편에 계속되는 “즐거운 나의 집”의 속편인 것이다. (319.1)
 적나라한 행복의 왕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道)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8편 1, 2절). (319.2)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던 19세기 전원(田園) 화가 밀레(Jean F. Millet)의 피곤한 눈에 비쳤던 어느 농촌의 조촐한 저녁 풍경「만종」(晩鐘)에서 우리는 “즐거운 나의 집”의 초장(初章)을 보게 된다.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때, 바쁜 일손을 놀리며 밭일하던 부부가 하던 일을 멈추고 경건히 머리 숙여 기도드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행복한 부부의 핵심(核心)을 보게 되고 즐거운 가정의 기초를 알게 된다. (319.3)
 하나님을 경외(敬長)하는 신앙의 터전 위에 굳게 선 부부가 만든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다. 그들은 창조 질서에 일치한 행복의 왕도(王道)에 이미 들어섰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땀 흘려 수고한 대가에 만족하며 감사에 넘친 삶을 살 줄 아는 부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공허하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단잠을 발을 뻗고 잘 수 있으며(127편 2절), 언제나 입맛이 당기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땀 흘리고 난 뒤 단잠을 깊이 자고, 입맛이 단 밥을 먹는 사람은 건강할 수밖에 없다. (3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