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7 장  낮은 자의 제물이 되는 안식일 나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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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이와 희생의 사닥다리는 채소가 짐승의 제물이 되고 짐승이 사람의 제물이 되며 사람이 신에게 자신을 공양으로 바치는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먹이와 희생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 남아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먹이가 되는 단계가 남아있다. (339.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서 이제까지의 희생의 사슬은 또 한차례 한없는 높이의 차원에서 방향이 뒤바뀌어졌다. 채소→동물→사람→신으로 올라가는 희생의 사닥다리(hierarchy)는 뒤엎어지고 말았다. 하나님→사람→동물→채소로 내려가는 사닥다리가 형성되었다. 가장 위대한 하나님은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까지 내려갈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새 인식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갈 수 있어서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가장 강한 자를 그 먹이로 삼지 못하는 신이 무력한 신이 아니라 가장 낮고 천한 생물의 먹이가 되지 못하는 신이 무력한 신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고 예수가 우리를 향하여 “내 몸이다 먹으라” 하실 때 우리 눈앞에는 하나님이 만물의 먹이가 되는 삶과 먹이의 구조가 펼쳐진 것이다. 낮은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는 삶의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자기보다 높은 생명의 먹이가 되어 높은 생명으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높은 생명이 낮은 생명의 보시로 제 생명을 내주어 낮은 생명을 자기 높이의 새 생명으로 들어올리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339.2)
 아직까지는 낮은 목숨이 높은 생명의 밥이 되는 방식이었다. 낮은 목숨이 높은 목숨의 제단에 뿌려지는 관제(빌 2:17)가 되는 방식이었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지극히 비싼 향유를 붓듯 낮은 목숨이 그 피를 높은 존재의 발등에 붓고 자기 목숨으로 높은 존재의 발을 씻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높은 생명이 낮은 생명의 밥이 되는 방식이 나타났다. 높은 목숨이 자기 목숨을 낮은 목숨의 구원을 위해 관제로 뿌려지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사람의 아들들의 속죄와 생존을 위해 피를 붓고 목숨을 붓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피로 죄인의 발을 씻어 내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죄 많은 사람들의 발을 씻는 삶이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의로운 사람이 죄인의 삶에 헌신하는 삶이 나타나게 되었다. 낮은 생명들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내놓는 하나님의 방식을 본받아 모든 생명이 제 생명을 낮은 생명의 먹이로 내주는 방식이 나타났다. 만물이 낮은 데로 내려가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감으로 낮은 생명들이 하나님의 삶과 생명에 참여하는 방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태복음 26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을 마시라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 하셨다. (340.1)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먹이로 내놓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우리의 먹이가 되어 우리를 통해 영생하시려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살이 우리의 모든 떡이 되었고 하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잔이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의 먹이이시다. 이것이 우리들이 안식일에 고백하는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먹이가 되심으로써 우리는 원죄적 멍에를 벗게 되었다. 사는 것이 먹는 것이고 먹는 것은 곧 살육의 죄를 쌓는 일이 되는 죽음의 멍에를 벗게 되었다. 안식일은 이러한 날이다. 이러한 세상을 이끄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는 안식일의 질서 안에 서면서 낮고 약한 자가 높고 강한 자의 먹이가 되어 강하고 높은 자에 참여하는 질서에 서는 것이 아니라 높고 강한 자가 낮고 약한 자의 자리에 내려와 낮고 약한 자의 밥이 되어 낮고 약한 목숨을 고양하는 생명의 질서에 우리가 서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들의 먹이들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먹이로부터 용서를 받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는 기꺼이 먹이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만물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 영혼에서 쉼을 경험하게 되었다.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의 하나님이 되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의 백성이 되었다. (340.2)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밥으로 먹는 삶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먹고 마시며 산다. 하나님도 우리의 양식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우리의 확실한 영생의 양식이시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 “썩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주려던 양식이 바로 이 양식이다”라 하셨다. “받아 먹으라, 이것을 마시라” 하신다.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양식이니 곧 내 몸이요 내 피다”(요 32:33) 하신다. (341.1)
 “광야에서 내린 만나도” 그리고 안식일 교인들이 대단히 즐기는 당근과 케일도 “모세가 네게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주신 것이다”(요 6:32)고 하셨다. 하나님의 몸 따로 있고 당근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먹는 밥과 내가 먹은 인삼도 모두 하나님의 몸이고 하나님의 피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꽃 같은 피였다. 꽃같이 피어난 하나님의 피였다. 무엇을 먹고 내 건강을 되찾았다 말하지 말자. 하나님을 먹고 하나님을 마신 내 삶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다시 산다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내가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내게 내일이 있을 것이라 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 밥이니 오늘과 내일의 나에게 생명이 있고, 건강이 있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생명도 만물의 밥으로 내놓은 생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에 내가 고백해야 할 신앙이다. (341.2)
 하나님을 내 밥으로 삼았을 때 이미 내 목숨도 만물의 밥으로 내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이 영생의 양식으로 있는 한 나는 하나님과 그 나라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내가 만물의 밥이 되어도 나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과 같이, 자기를 비워 오히려 확실히 계시는 하나님처럼 우리에게도 없이 있는 삶, 자기를 비워 오히려 충만히 되는 삶이 열린 것이다. (342.1)
 이제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영원히 살게 하는 참 양식, 하늘의 양식이다. 나를 먹고 마시라. 하나님이 내 밥이 되어 이어지는 목숨일진대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몸과 피가 내 몸 되었듯이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 되게 하소서” 기도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우리의 기도하는 것일 것이다. 이 안식일에도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 또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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