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다니엘서 연구 다니엘 8장 하나님과 그분의 성소 III.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
 하나님에 의해 지시된 성전의 의식들은 대단히 인상적이며, 다채로왔다. 이 의식(儀式)들은 양이나 염소 및 그 밖의 가축들을 치며 사는 농경민들 즉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주민들을 위해 고안된 제도였다. 성전의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또 정결한 동물들의 죽음 및 헌신적인 제사장들의 봉사를 빌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하늘의 봉사를 상징하였다. (163.3)
 기본이 되는 의식은 아침과 저녁으로 양을 제사하는 것이었다. 레위기 9장 24절에 의하면, 성막을 처음으로 봉헌하고 제사장들에게 불을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엄격한 지시를 주실 때 하나님이 친히 제단의 불을 붙이셨다.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다. 번제물은 제단 위의 석쇠 위에 밤이 새어 아침이 될 때까지 둘 것이며, 제단의 불은 그 위에 항상 피워∙∙∙결코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레 6:8~13). (163.4)
 후에 나온 전설에 의하면, 이렇게 하여 모세의 때로부터 타기 시작한 이 불은 기원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성전이 파멸될 때까지 장장 팔백 년 이상이나 꺼지지 않았다 한다. (163.5)
 이렇게 계속적으로 불타는 희생 제사는 광야에 유숙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많았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러 마음에 가책을 느낄 때, 한 순간 성막을 쳐다보거나 또는 밤에 번제단에 흘러나오는 냄새를 한번 맡기만 해도 자신을 위해 계속적으로 희생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희생 제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제사장 직책의 다른 기능들도 역시 자신을 위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등잔의 불은 밤과 낮으로 계속해서 탄다. 그리고, 그 불빛은 성막의 금박 벽들에 의해 반사되었다. 떡들은 금박의 떡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이름을 기록한 흉패를 착용하고 성소를 출입한다. 이는 사막에서 유숙하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이름을 제사장의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163.6)
 나중에 그들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흩어지고 난 다음에는, 더우기 그로부터 훨씬 후에 그들이 로마 제국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된 뒤로는, 죄를 지을 때마다 성전을 찾아간다는 것이, 심지어는 일년에 한 번씩 찾아가는 일조차 어려운 일이 되었다. (163.7)
 어렵게 기회를 만들어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는 경우라도, 저들이 예배를 마치고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 죄를 지을 것이고, 그렇다고 제단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을 위해 성전의 속죄 봉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하며 위안을 얻을 것이다. (164.1)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성소에서는 양을 하루에 두 번씩 제물로 바쳤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부른 곳이 많다(요 1:29 ; 벧전 1:19).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이 29 번이나 어린 양으로 호칭되었다. 구약의 이사야 53장“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을 말하고 있으며, 신약의 사도행전 8장 32~35절은 위의 기사를 예수님에게 적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어린 양의 희생을 유월절의 희생 양으로 말하고 있다. 즉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하였다. (164.2)
 하나님은 희생 제물을 양에 국한하시지 않았다. 수양과 황소와 송아지와 새끼 염소와 비둘기들도 희생에 포함되었다. “곡물 제물(화제)”도 자주 바치는 제물의 하나이다(레 2:1~11). 그러나, 죄의 용서를 위해 자기 짐승을 희생으로 바칠 때는 항상 그 당자가 자기 짐승을 성막으로 끌고 가서 성막 입구든지 번제단 옆에 서서 손을 짐승의 머리 위에 얹고 친히 칼을 빼어 짐승을 죽였다. 죄인 자신이 짐승을 죽였으며 짐승이 그를 대신하여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되었다(레 1: 3, 4, 10, 11). (164.3)
 죄인은 짐승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흠없는 제물에게 상징적으로 옮기었다. 이로써, 짐승은 상징적으로 그 사람의 대속물이 되는 것이다. 「유태 백과사전」(Jewish Encyclopedia)에 기술된 바와 같이 “희생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죄를 옮겨 대속케 하는 통상적인 의식이다.” “어떤 희생 제물이든지 거기에는 대속(代蹟)의 개념이 들어 있으며, 희생 제물이 인간 죄인의 책임을 대신 담당하는 것이다.”10 (164.4)
 


희생 제물인 어린 양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희생 제물되시는 어린 양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전가시키는 것을 예표한다.
(164.5)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고 소리쳤다(요 1:29), 수년 후,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편지에서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였다”고 하였다(벧전 2:24). (165.1)
 죄인 자신이 속죄 짐승을 죽여야 한다는 규정은 우리가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들 각 사람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여 나의 대속물로 죽었다면, 결국 그는 나 때문에 죽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죽였구나”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165.2)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 때,
내 죄로 인해 그 못 깊이 박혔네11
(165.3)
 물론 희생 제물은 죽었다. 매일같이 속죄 의식 때마다 죽어가는 모든 동물들은 우리들에게 “죄의 값은 사망”(롬 6:23)이라는 엄숙한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그 생명을 바친 것이다. 죄는 죽음을 초래한다. 죄는 취소할 수 없이, 불가피하게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것을 간단히 간과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무엇인가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롬 8:3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요 3:16) (165.4)
 구약에 나타난 십자가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 제사장들에게 여러 가지 종교 의식들을 거행하도록 명하셨다. 왜냐하면, 아무리 용의 주도하게 제정된 의식이라도 그 한 가지 의식으로서는 복음의 모든 내용을 적절히 나타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예수님은 우리의 어린 양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희생으로 바쳐진 그 어떤 양이나 소나 염소가 부활을 증명해 보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동물과 인간 제사장이 요구되며, 동물들은 각기 다른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165.5)
 이것도 역시 그 다양성의 하나인데, 때에 따라 희생 제물은 성소의 제단에서 태우지 않고 영문(營門) 밖에서 태우기도 하였다. 히브리서 13장 12, 13절은 우리에게,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갈바라 언덕은 예루살렘 성 밖이다. 그 곳은 정해진 처형지로서 능욕의 장소였다. 이 곳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이 때때로 당해야 하는 능욕을 상징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그리스도인 청년은 능욕이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보다 더욱 가까이 주님과 동행키로 결심한 남편들, 아내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도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히브리서 13장 13절“그러므로 우리는 그 능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우리를 격려한다. (165.6)
 피는 꼭 사용되어야 했다
 이것도 의식의 다양성에 포함되는 문제인데, 속죄를 위해 바쳐진 모든 희생 동물의 피는 그 일부를 두 제단 중 하나의 위든지 가까이에 뿌려졌다. “피가 죄를 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레 17:11). 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희생을 드릴 때는 그 동물의 피를 조금 취하여 성소 안에 있는 금제단 위에 뿌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앞 바닥에 뿌렸다. 제사장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은 기록을 성소 안에 표시하였던 것이다(레 4:2~6). (1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