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6 장  양식을 제물로 먹고 사는 안식일의 나라
 아벨 그는 최초의 제사장이다. 사냥꾼 아벨의 손에 잡힌 산 양이 단순한 먹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과 그 현장에서 사냥꾼 아벨은 제사장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인간은 이제 제물로써만 먹이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공양 음식으로써만 씨 맺는 채소와 씨 맺는 과실과 짐승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먹이들은 약하고 미련해서 인간의 먹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사람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제물로서 먹이이다. 내가 5리를 가자 하는데 그가 10리를 가 준 것은, 내가 속옷을 달라 했는데 그가 겉옷까지 내주었던 것은, 내가 그의 한 쪽 뺨도 부족해서 다른 쪽 뺨까지 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미련하고 약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그를 거칠 것 없이 욕되게 할 수가 있었던 것과 내가 그를 교묘히 나의 목적에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어리석고 약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한 것은 그가 어리석고 연약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려 한 것이다”(사 53:7, 11). (334.2)
 먹이가 제물로 죽어 100배의 열매로 부활하는 새 질서
 짐승이 먹이에서 희생으로 바뀌어 인식되는 이 인식의 전환에서 인류는 깬 영혼이 되었다. 이로써 먹이의 사슬은 희생의 사슬이 되었다. 채소가 짐승의 먹이가 되고 짐승이 사람의 먹이가 되고 사람이 하나님의 먹이가 되는 사슬은 이제 억압과 능멸과 파멸의 순환이 아니다 (335.1)
 먹이가 희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삶에서 먹이는 당하는 자가 아니라 제물로 자기를 헌신하는 자로 다시 태어났다. 먹이의 주체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먹이가 희생으로 높아지는 생명의 차원에서 모든 먹이는 먹힘으로 패배하고 멸망당하는 생명이 아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10 배, 100 배의 열매로 불어나듯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증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죽고자 함으로 오히려 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증식은 수평적 차원에서의 증식과 강화와 확대가 아니라 더 높아지는 생명으로의 자기증식이 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제물이 되는 차원에서 먹이는 이제 더 이상 수동적인 삶에 머물지 않는다. 자기를 능동적으로 내 놓는다. 자신의 결단한 의지로 자기를 제물로 내놓는 것이다. 자기가 희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사는 방식이다. 10 배, 100 배로 사는 방식이다. 10 배, 100 배 많아지고, 10 배, 100 배로 높아지는 삶의 방식이다. 생명의 고양을 지향하는 제사의 사슬, 낮은 생명이 더 높은 생명으로 올라가는 생명의 사닥다리가 나타난 것이었다. 먹이의 사슬은 생명이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희생의 질서가 되었다. 곧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되는 것이다. 채소가 짐승에게 먹이가 되는 방식은 이제 더 이상 채소의 생명이 짐승에게 진멸되는 방식이 아니다. 이제는 채소와 과일이 짐승이 제물이 되어 짐승의 몸으로 부활하는 방식이 되었다. 낮은 차원에서 자기를 묻고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살아나는 방식이 되었다. (335.2)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채소와 과일이 짐승의 먹이가 되어 죽고 그 저주로 짐승의 생명을 해하는 방식. 즉 먹이가 독극물이 되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먹이가 되어 고등한 짐승의 삶에 기여하고 축복하는 삶의 방식이 되었다. 채소가 고등한 짐승의 삶으로 나아가는 방식, 채소가 자신의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식이 되었다. 자기가 동물에게 먹힘으로써 동물의 한 부분이 되고 산 동물의 한 생명이 되어 동물의 생명으로써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 이제 나타난 것이다. 채소가 짐승의 공양이 되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336.1)
 그리고 짐승이 짐승의 한계를 넘어 사람의 차원에서 그 생명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방식 곧 짐승이 사람에게 자신을 공양으로 바치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동물이 사람의 생존과 사람의 창조적 삶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사람의 창조적 삶에서 부활하여 자신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나무가 불이 될 수 있는 길은 나무가 땔감이 되는 길인 것 같이, 사람은 신의 나라와 그의 의에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 될 때 사람은 사람의 차원과 사람 나라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삶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영생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희생의 삶이 값진 것이 되는 이치가 이와 같다. (336.2)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면 희생과 공양으로 사는 삶은 채소를 심고 동물로 다시 살며, 동물로 심고 사람으로 다시 살며, 육체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며, 흙에 속한 자를 심어 하늘에 속한 자로 다시 사는 삶이다(고전 15:35-50). 여기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천명(天命)을 생각하게 된다. 여러 개의 모양으로 각기 다른 차원에 속한 생명체들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께로 위임받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 사명은 바로 자기 보다 높은 생명의 차원으로 나아가고 올라가는 사명이다. 그리고 높은 차원의 생명으로 나아가고 올라가는 방식이 희생이고 공양이다. 따라서 모든 차원의 생명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생명의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희생과 공양의 사명인 것이다. (336.3)
 먹히는 삶에도 사명이 있고, 먹는 삶에도 사명이 있다. 먹는 삶은 먹힌 삶을 책임지는 삶이어야 한다. 사람은 이같은 먹이 사슬의 맨 끝에 있다.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맨 끝에 있다. 여기서 잘못되면 사람에 이르는 모든 먹이의 희생이 공염불이 된다. 사람에게 심판이 있다면 바로 이 책임의 심판일 것이다. 사람은 살아있음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나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하여 책임을 느껴야 한다. 내가 왜 더 살아야 하는가? 내 생존이 저 먹이들의 희생 위에 있는데 나는 왜 더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건강과 생존이 미안할 때가 있다. 자신의 평안이 송구할 때가 있다. 성인 같은 사람의 질병과 불운과 단명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송구해진다. 북한 동포의 굶주림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때때로 고통 당하는 어진 이웃을 생각하면서 나의 배부름과 나의 안정이 불공평하다는 가책을 느낀다. 배부르게 사는 생존에게 책임이 있다. 안정을 누리고 사는 생존에게 책임이 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생존에게 책임이 있다. 장수하는 목숨에 책임이 있다. 죽은 자의 몫, 굶주린 자의 몫, 기회를 빼앗긴 자의 몫, 곧 먹이된 자의 몫을 치러야 할 책임이다. (337.1)
 삶의 방식의 이러한 변화, 즉 먹이는 희생이다 하고 깨닫는 인식의 변화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자기를 식물로 취하는 자들에게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독극물이 아니다.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생명이 아니다. 한을 품고 복수를 결심하고 복수를 결행하는 선악과 같은 먹이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취하는 자를 살게 하고 더 풍성히 살게 하는 양식으로 거듭난다. 세상의 참 양식으로 거듭난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 취하는 자를 썩어 없어지게 하는 양식이 아니라 취하는 자를 영원히 살게 하고 없어지지 않게 할뿐 아니라 먹히는 자를 영원히 살게 하고 없어지지 않게 하는 양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요 6:27). (337.2)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한 양식이 바로 이 양식이었고 사람의 아들이 되고자 했던 양식이 바로 이 양식이었다.”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양식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안식일이 말하는 사람이 사는 방식이 이러한 방식이다. 내가 양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방식이다. 내가 죽어주는 방식이다. 죽어서 사는 방식이다. (3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