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6 장  양식을 제물로 먹고 사는 안식일의 나라
 탐욕과 방탕이 먹이의 동기가 되고 먹이가 독극물로 변하는 먹음의 질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살라”하시는 창세기의 날이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먹고 살라” 하시는 창조와 재창조의 날이다. 그러나 안식일은 동시에 살기 위해서 먹을 뿐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먹는 삶의 날이다. 내가 살기 위하여 그리고 강건하게 살기 위하여 먹을 뿐만 아니라 먹이의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먹는 날이다. 먹이의 생명을 10 배, 100 배로 열매 맺게 하기 위하여 먹는 삶의 날이다. 이같이 살고 살리는 식생활이 태초의 식생활이다. 안식일은 이러한 식생활의 날이다. (326.1)
 그러나 살고 살리는 먹음의 이 질서는 계속되지 못했다. 살고 살리는 먹음의 질서가 파괴되었다. 먹는 것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되는 질서로 타락했다. 선악과가 유린되는 이야기는 “지킴”의 파괴만을 말하지 않는다. 선악과의 이야기는 “지킴”의 과일을 먹이로 먹었다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먹는 것이 죽이는 것이 되는 차원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하와와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죽인 것이다. 우리들의 식생활에는 살기 위해서 먹는 측면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살생을 무릅쓰는 측면이 엄연히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먹음직해서” 먹고 죽이고 “보암직해서” 먹고 죽이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해서 먹고 죽이는 측면이 엄연히 있다는 것이다. (326.2)
 먹음이 살생이 되고 있는 이 참혹한 삶의 실상을 깨우쳐 주고 먹음이 탐욕이 되고 음욕이 되고 허욕이 되고 있는 추악한 삶의 실상을 깨우쳐주고 있는 이야기가 창세기 9장 3-5절의 이야기이다. 산 동물이 인간의 먹이가 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살아있는 것이 먹이로 살생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불가피한 살생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허욕으로써의 살생이 빚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살기 위해서 먹고 살생하는 것이 아니라 유희와 탐욕으로써 먹고 유희와 탐욕으로써 죽이는 삶을 경계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비로소 산 동물이 인간의 먹이로 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래부터 육식 같은 채식이 있었고 고기를 피채로 먹는 육식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고기를 피채로 먹는 것과 같은 식생활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바로 피채 산 동물을 먹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존의 방식과 그런 먹음의 방식으로는 사람이 계속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낙원에서 살 수 없었다는 것이다. (327.1)
 인간의 타락은 이 살고 살리는 먹음의 구조를 파괴하면서 왔다. 살고 살리는 삶의 구조를 파괴하면서 왔다. 살고 살리는 구조가 파괴되면서 구원받지 못한 삶이 왔다. 상생과 공생의 구조가 파괴되면서 죽음의 세상이 왔다. 이 파괴가 최초의 악이다. (327.2)
 다시 말해보자. 악이란 무엇인가. 다른 생명을 해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악이다. 선악과의 생명을 유린하는 것이 악이다. 선악과는 본래부터 지킴의 대상으로써 우리에게 존재하는 실과인데 우리가 그 지킴이를 유린한 것이 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주어진 과일도 우리의 사악한 먹음의 의지 앞에서 선악과로 되기도 한다. 우리가 임으로 먹을 수 있었던 실과도 우리가 먹으면 반드시 그 실과가 죽고 우리도 죽는 실과가 되기도 한다. 피를 토하여 죽어갈 뿐 아니라 먹는자, 생명을 유린한 자, 살을 피채 먹는 자에게 생명을 요구하는 실과가 되기도 한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목자가 오는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다”(요 10:10). 먹이로 오는 마음이 먹이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목자의 마음일 때 에덴은 낙원이었다. 그러나 먹이로 오는 마음이 도둑의 마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음이 되었을 때 낙원은 계속되지 못한다. 에덴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이상 낙원에 살수가 없었다. 동산의 각종 실과는 우리가 임의로 먹을 수 있는 먹이가 되지 못했다. (327.3)
 에덴의 먹이는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는 대상이다. 먹이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10 배, 100 배로 그 생명을 풍성히 하게 위하여 먹는 대상이다. 도둑의 마음으로 먹는 대상이 아니다.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대상이 아니다. 보암직해서,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해서 먹고 죽이고 멸망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먹음의 동기가 “살림”이 아니고 “살림살이”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과 방탕이 먹음의 동기가 되면서 낙원의 먹음의 구조가 파괴되었다. 안식일의 먹음의 구조는 파괴되었다. 선한 세상, 좋은 세상이 나쁜 세상 악한 세상이 되었다. 진실로 “각양 탐심이 죄를 낳는 것이고 이 죄가 사망을 낳는 것이다”(약 1:15). (328.1)
 도둑질로 살아서는 안 된다. 살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강탈로 살아서는 안 된다. 간음으로 씨를 퍼트리려 해서는 안 된다. 자기가 농사해서 살고, 제 돈 주고 사서 먹어야 한다. 자기가 연구해서 쓰고 배워서 써야 한다. 아무 것도 훔쳐서는 안 된다. 남의 돈도 훔치지 말고 남의 공로도 훔치지 말고 남의 여자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 남의 명예도 훔치지 말고 남의 지식과 사상도 훔치지 말아야 한다. (328.2)
 학문과 사상에도 제자가 있고 도둑이 있다. 도에도 제자가 있고 도둑이 있다. 배우는 지식으로 자기를 깨우치고 배우는 지식과 깨달음으로 스승을 영광되게 하려는 자는 제자이고 단순히 그 지식과 깨우침을 훔쳐 제것인양 자기가 쓰고 팔아먹으려는 자는 도둑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구원하고 그 생명의 가르침을 선생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고 가르쳤다. 어느 한 제자도 자기의 학파를 따로 세우지 않았다. 어느 한 제자도 예수교 말고 다른 종교를 창교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제자라 한다. (329.1)
 먹이는 순한 실과이다. 피 없는 과실이다. 피 없는 곡식이다. 물 같고 공기 같은 음식이다. 먹히면서 피를 쏟지 않는 과일이다. 먹히어도 죽지 않는 과일이다. 먹히어도 한을 품을 필요가 없는 과일이다. 먹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되고 구원이 되게 하는 하늘의 떡과 같은 과실이다. 그러나 도둑의 마음으로 오는 자 앞에서, 도둑의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행위로 말미암아서 먹히어도 죽지 않던 먹이가 먹힘으로 죽게 되었다. 먹힐 뿐이지 죽지는 않았던 순한 먹이가 죽게 되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독극물이 되면서 죽어간다. 목자의 손에서 10 배, 100 배로 생명이 풍성해지던 곡식과 실과들이 도둑의 손에서 그 생명이 파괴되고 멸망되고 죽게 되면서 순한 과일이 독과가 되었다. 한을 품으면서 죽어갔다. 복수를 맹세하면서 죽어갔다. 죽으면서 복수하였다. 먹는 자, 훔치는 자, 살인하는 자, 강간하는 자에게 기어이 그 생명을 찾아내면서 죽어갔다. “네가 먹으면 반드시 죽게되는” 먹이가 되고 말았다. (329.2)
 이제 에덴의 이쪽 땅에는 더 이상 먹이가 없다. 순한 먹이가 없다. 먹이가 되고도 죽지 않는 먹이가 없다. 살생이 되지 않는 먹음이 없다. 먹는 것은 곧 살생이 되었다. 살고 죽는 것이 먹느냐 굶느냐의 문제였는데 이제는 살고 죽는 것이 죽이느냐 안 죽이느냐에 달려 있게 되었다. 반드시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이제 모든 먹이는 죽는 먹이다. 이제 죽지 않는 먹이는 없다. 먹히면서 피를 토하지 않는 먹이는 없다. 피채 먹지 않을 수 없는 먹이는 없다. 한 맺힌 먹이 아닌 먹이가 없다. 먹히면 반드시 먹은 자를 죽이고 마는 먹이뿐이다. 선악과 같은 먹이 뿐이다. 인생에게 사는 것은 먹는 것인데 그리고 본래 창조와 안식일의 질서에서는 먹고 먹히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살리는 것인데 곧 살림이고 살림살이였는데 쫓겨난 자들의 세상에서는 사는 것은 먹는 것, 먹는 것은 죽이고 멸망하게 하는 것이 되는 방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먹이를 죽이고 멸망시킨 결과는 먹는 자가 반드시 죽는 방식이 되고 말았다. (329.3)
 반드시 살고자 하고 또 살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하는 삶의 끝에는 반드시 죽음 밖에 없다. 먹고 살고자 했으나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죽이고서라도 살자 했으나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낙원에서는 먹음의 생활이 살림과 살림살이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 이제는“먹음직해서”먹고 “보암직해서” 먹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해서 먹는 차원으로 내려왔다. 생존을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다. 탐욕과 방탕의 차원에서 먹고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먹음의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인생은 이제 먹기 위해서는 죽여야하고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목숨을 포기해야하는 질서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먹는 자가 도적이 되는 구조, 먹는 자가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가 되는 구조 그리고 그 살생은 자신의 죽임이 되는 이 구조가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혹시 원죄 같은 것이 인간에 있다면 이같은 구조를 초래하고 이같은 구조에 속하는 죄 말고 무슨 죄가 원죄인가. (330.1)
 먹이가 제물이 되고 먹는 자가 제사장이 되는 안식일의 질서
 안식일은 이렇게 타락한 인류를 고치는 원리이다. 삶과 먹이의 이 지옥 같은 구조를 고치는 원리이고 능력이다. 사람의 원죄를 치유하는 원리와 능력이다. 태초의 안식일이 지향했던 삶의 방식으로, 창조 시대의 태초적인 사람의 방식과 그 원리와 그 능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안식일의 호소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호소이고 사명이다. 먹는 자와 먹이에게 살림이 되고 살림살이가 되는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먹이에 대하여 도둑이 아니라 목자가 되는 마음으로 돌아가자, 먹는 자에게 독극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한 먹이가 되는 마음으로 되돌아가자, 복수하는 마음이 아니라 용서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자, 죽임을 당하는 마음이 아니라 10 배, 100 배로 되살아나는 마음으로 돌아가자,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의 신앙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안식일의 호소이며 사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호소이고 사명이다. (331.1)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은 살기 위해서 죽이는 것이고 살기 위해서 죽였지만 살생의 죄값으로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 되는 이 지옥 같은 생존의 구조에 최초로 심각히 반응한 사람이 가인과 아벨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로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창 4:3-8). (331.2)
 여기에서 처음으로 제물이 등장한다. 제물로 호칭되는 먹이가 최초로 등장한다. 최초로 먹이가 제물로 바뀌고 있다. 사람에게 최초로 성만찬으로써의 식사가 나타났다. 인간에게 최초로 채식과 육식이외에 제사 음식이 나타나고 있다. 제물로서의 음식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최초로 제사장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제사장이다”(벧전 2:9). 제사장은 거룩한 사람이다. 성화된 사람의 모델이 제사장이다. 여기에서 최초로 먹는 사람, 입의 사람, 인구로서의 사람이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이 되고 있다. 농부가 제물을 든 제사장이 되고 있다. 사냥꾼, 목축업자가 제사장이 되고 있다. 먹이 밖에 모르던 그들이 제물을 알게 되었다. 제 마음으로 제 손의 단순한 먹이를 제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정신의 사람,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로써 여기에 “거룩한 나라”가 등장하게 되었다. 먹이가 제물로 되고 먹이를 축내는 인간이 제사장이 되는 차원에서 이 세상은 “거룩한 나라”로 변한다. (332.1)
 어떻든 창세기 4장에서 처음으로 가인과 아벨의 세대에 와서 처음으로 살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죽이고 살기 위해서 죽였지만 결국 자기가 살지 못하고 죽게되는 삶의 구조와 먹음의 구조를 철저히 반성하고 아직까지의 먹음의 구조와 삶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332.2)
 먹음이 살육이고 살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등장한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서 살생과 살육을 권리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가 나타난 것이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살생과 살육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잘나고 힘세면 못나고 약한 것을 먹이로 삼아도 좋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니 과일과 채소와 동물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상전이니 종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익충이기 때문에 해충인 너를 먹어도 되고 죽여도 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으로는 사람이 마음을 청결히 가질 수가 없다. 그런 삶의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얼굴을 날마다 뵐 수 없다”(마 5:8). 사람이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청결한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과 씨를 구분 없이 먹을 수 있어서는 안 된다. 동물의 고기를 피채 먹을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채소와 과일을 육식처럼 먹어서는 안 된다. 생명을 말살하는 먹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먹음이 살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니다. 먹이를 나의 생존을 위해 나의 의도에 굴복한 단순한 먹이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먹이들은 나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자원해 내놓은 제물이요 희생이다. 아마 가인과 아벨의 반성은 여기에 닿았을 것이다. (332.3)
 아벨은 최초로 사는 것은 먹는 것이고 먹는 것은 죽이는 것이 되어있는 삶의 구조에 전율한 사람이다. 생명을 채소같이 먹어야 하는 약육강식의 삶에 몸서리 친 사람이다. 날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삶에 자지러졌던 사람이다. 진실로 이같은 먹이와 삶의 구조에 허무를 느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허무인 사람이다. 그는 최초로 자신의 먹이가 된 양을 사람에 바쳐진 제물로 깨달은 사람이다. 사람이 먹는 양식을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준비한 제물로 인식한 사람이다. 혹시 사냥꾼이었을 그는 자기 손에 잡힌 육축을 자신의 당연한 식물로 간주 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자신의 용맹과 자신의 뛰어난 사냥술이 저 짐승을 잡고 죽일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없었던 사람이다. 아! 저 짐승은 희생제물이구나! 나에게 바치어진 제물이고 나로 하여금 내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게 하는 제물이구나! 저 짐승을 하나님께 바칠 때 나도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구나! 하나님께서 저 짐승을 나에게 희생으로 바쳐지게 하고 그 다음으로 내가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바쳐지게 하는 것이구나! (333.1)
 아벨은 이런 것을 깨달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먹는 자가 먹이된 것들에 대한 책임, 이긴 자가 패배한 것들의 삶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사람이다. 먹이가 희생이고 패배한 자들이 희생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다. 이것이 아벨이 양을 제물로 바친 이야기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신 까닭의 핵심이다. 반면 가인의 제사에는 피흘림이 없다. 가인의 제사에는 먹이에 포함된 인간의 피 맺힌 고통과 고뇌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가인은 영적 감성이 부족한 사람이다. (3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