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2 장  안식일, 하나님의 인인가? 짐승의 표인가?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 가장 심하게 반영된 경우의 하나가 안식일 쉼에 대한 오해일 것이다. 일부 열성적인 유대인들과 이교적 전통에 살았던 사람들은 인간이 신(神)의 안식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관념에 충실했다. 하나님이 제칠일에 사람들에게 노동을 금지시키고, 종교 의식에 전념케 한 까닭은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방해받지 않으려 했거나, 인간의 종교적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안식을 증대하고자 함이었다 라는 태도이다. (26.1)
 이같은 안식일 신앙의 전통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깨를 펴고 하나님의 쉼에 참여하여 그 하늘의 호흡을 만끽하게 하는 날이 아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그러한 삶을 경험할 수 없다. 오히려 신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또는 신에게 안식을 공양하기 위하여 숨죽이고 엎드려 보내는 날로 경험될 뿐이다. (26.2)
 재림교회는 전통적으로 참 안식일과 거짓 안식일을 각각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로 규정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요한계시록 14장 9-11절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문맥인가.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의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9-11)는 문맥이다. 그러면 이 문맥에서 참 안식일의 기능은 무엇이고, 거짓 안식일의 기능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인과 같은 참 안식일의 기능이 무엇이고 짐승의 인과 같은 거짓 안식일의 기능이 무엇인가. (26.3)
 앞의 성경절에 의하면 짐승과 그 표를 받는 자의 생존에 나타나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누구를 막론하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과, 다른 생명체들의 쉼을 유린하고 있는 그들의 생존 방식이다. 즉 쉼 없음과 쉼의 유린이 짐승의 표이다. 쉼 없음과 쉼의 유린이 거짓 안식일의 짐승과 같은 기능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반대편의 특징 곧 참 안식, 진정한 쉼, 풍성한 생명의 숨을 자신의 고유한 능력과 품성의 표시로 삼고 있다. 진정한 숨과 쉼을 자신의 도장(印)으로 삼고 있다. 즉 참 안식일의 기능, 참 안식일의 “하나님의 인”과 같은 기능은 진정한 숨, 벅찬 숨, 풍성한 숨의 기능에 있는 것이다. (27.1)
 그렇다. 쉼의 문제, 숨의 문제가 참 신과 거짓 신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하늘로 가고 지옥으로 가는 분기점이다. 쉼의 문제, 숨의 문제가 참 안식일과 거짓 안식일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신(神) 자신이 쉼과 숨의 주체인가. 신 자신의 쉼과 숨이야말로 진정한 쉼이요 숨인가. 그 신은 인간을 자신의 쉼에 초청하여 자신의 쉼에 동참시키며, 자신의 쉼을 나누어주는가. 숨과 쉼이 있는 안식일인가. 숨과 쉼을 주는 안식일인가. 아니면 그 신은 자신 안에 쉼을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어느 누구에게도 쉼을 나누어주지 못하며 자신의 쉼을 위해 인간의 쉼을 유린할 수밖에 없는가. 그러면서도 그 가짜 쉼을 가지고 쉼의 주체로 행세하고 쉼의 제공자처럼 세상을 기만하는 신인가. 쉼과 숨이 없고, 쉼과 숨을 유린하는 안식일인가. 바로 이 차이가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의 차이이고, 참 하나님과 거짓 신의 차이이고, 참 안식일과 거짓 안식일을 구별하는 시금석이다. (27.2)
 그런데 이 구별이 늘 간단히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이 구별이 어려운가. 사람이 마음의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로 마음밖에 객관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 안에서는 그 실재에 대한 왜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리고 마음 밖의 진실도 언제나 투명한 진실이기보다는 가면에 가려져 있고 굴절된 진실인 경우가 허다하다. 참과 거짓의 판단이 어려워지는 또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단순히 양과 이리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이리와 이리의 탈이 강요된 양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악마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 악마와 악마적 왜곡에 뒤덮인 하나님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28.1)
 이런 점에서는 참 안식일과 거짓 안식일을 단순히 토요일과 일요일로만 구분한다는 것도 세상사와 인간 마음의 복잡한 현상을 너무 가볍게 고려하는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제칠일 안식일에도 왜곡된 안식일 신학이 얼마든지 출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제칠일을 안식일로 신봉하면서도 안식일의 하나님을 쉼이 공양되어야 하는 쉼의 결여자, 쉼의 비(非)주체로 오해 할 수가 있다. 똑같이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면서도 안식일 하나님의 풍성한 쉼과 숨에 초청되어 그 진정한 생명의 숨을 만끽하는 대신에 쉼 없는 신(神)을 위한 쉼의 노역에 종사하느라고 철저히 자신의 쉼을 유린당할 수도 있다. (28.2)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는 성품을 다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신 10:12). 마음은 지성 곧 이해력을 뜻한다. 바른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바른 이해를 가지고 안식일 신앙을 해야한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바르게 이해한 한 서기관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막 12:34)라고 칭찬하셨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던 예수님의 일행에게 “죄 없이 죄를 정하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처럼 제칠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안식일에 원하는 것이 “제사가 아니라 자비”라 하신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쉼, 그 생명의 숨을 경험치 못했던 것이다. 짐승의 표라 할 수 있는 쉼 없음과 쉼 유린의 삶으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생명의 안식일, 숨과 쉼의 안식일에 이웃에게 쉼과 숨을 나누고 바른 생명의 삶을 끼치는 참 “안식일 교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안식일을 빙자하여 이웃의 쉼과 숨을 피폐시키는 거짓되고 악한 “안식일 교인”이 되었던 것이다. (28.3)
 하나님의 쉼과 하나님의 인
 우리 하나님은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쉼에 자신의 고유 이미지를 부여한 하나님이시다.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도장이 안식일 계명에 찍힌 것이다. 안식일에 우리가 초청된 그 하나님의 쉼, 곧 제칠일 안식일의 쉼이야말로 하나님의 생명과 품성의 도장인 것이다. 그런데도 자칫 안식일 계명을 계율적으로 읽으면 안식일 쉼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품성의 반영이 아니라 무정하고 잔인한 짐승의 표로 곡해될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안식일을 “크게 오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막 12:24-27). (29.1)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우리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율법을 말씀하십니까?”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제칠일을 쉬라. . . .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는 율법을 말하노라. 그렇다.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어떻게 읽는가.” 이 계명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서명 말고 누구의 사인을 찾을 수 있는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도장 말고 누구의 도장을 찾을 수 있는가. (30.1)
 예수님의 안식일 메시지를 좀더 확인해 보자: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했다(막 2:27). 안식일을 위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막 2:28; 마 12:8). 숨 넘어가는 너희의 숨을 돌리게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차라리 안식일에라도 일을 하리라(요 5:17). 아니다.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안식일에 기필코 하셨고 또 하려는 일이다. 안식일에 너희에게 하나님이 주려는 것은 ‘너희를 향해 온전히 불붙는 듯한 나의 긍휼’(호 11:8)과 ‘무궁한 자비’(애 3:22)이다. 안식일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너희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고 너희의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렘 29:11)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안식일을 핑계삼아 형제나 이웃을 괴롭히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회피하지 말라. 너희가 몰인정하고 변덕스러운 신이나 사나운 나라나 억센 사람들의 밥이 되는 것을 나는 절대로 용납치 않겠다. 너희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백성이다’(시 96:7). 하나님은 안식일뿐만 아니라 ‘날마다 너희의 짐을 대신 지고 계신다’(시 68:19). 하나님이 안식일에 너희를 초청하시는 것은 너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자”(시 23:2)하심이다. (30.2)
 이 초청을 우리는 “어떻게 읽었”으며 이 초청에서 누구의 마음을 읽었는가? 사르밧 과부는 숨이 끊어진 자기 아들 위에 엘리야가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 .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내가 이제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을 알겠노라고 고백하였다(왕상 17:17-24). (31.1)
 이 비천한 죄인도 안식일의 쉼에서, 나를 다시 숨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서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다시 살리시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을 체험했노라고 고백하겠다. 안식일에서 하나님의 신표(神標), 곧 그 신성의 도장을 체험했노라고 고백하겠다. 나의 하나님은 쉼의 주체이시다. 나의 하나님은 제칠일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만이 쉼의 주체이며 쉼의 제공자이시다. 숨의 주체이며 숨의 제공자이시다. 그리고 그의 쉼만이 참 쉼이요 그의 숨만이 진정한 숨이다. 벅찬 숨이다. 참 쉼과 참 숨의 하나님, 벅찬 숨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참 쉼과 참 숨의 안식일만이 진정한 안식일이다. (31.2)
 짐승의 표: 쉼 없음과 자비 없음
 안식일을 계율적으로 읽고 억압적으로 읽으려는 우리의 성향은 우리의 오래된 이교적 전통과 습관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이교는 확실히 쉼 없음과 쉼 유린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이다. 쉼 없음과 쉼 유린이 ‘짐승’의 표이다. 그런데 이 거짓 신들과 거짓 종교들은 쉼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쉼을 가지고 있는 듯이 인생을 기만하였다. 오히려 그들이 인간에게 쉼을 의존하면서 마치 그들이 인간에게 쉼을 주는 듯이 기만하였다. 그들이 인간에게 준 것은 쉼 없음의 가중일 뿐인데, 오히려 쉼 없음의 황폐와 쉼 없음의 노역을 참다운 쉼이라고 기만하였다. 자기 안에 쉼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신들은 자신의 쉼을 위해 밖의 쉼 곧, 인간의 봉사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밤낮 쉼 없는” 이 신들의 고통은 곧바로 인간의 고통으로 귀결되었다. 인간은 제 쉼 없는 삶 위에 악령들의 쉼 없는 생존을 떠맡은 삶으로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과 유황 같은 삶이다. 지옥의 삶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묘사하는 바 짐승과 그 표 받은 자들의 삶이다. (31.3)
 우리들이 몸소 체험해 온 한국의 이교적 전통에서도 유사한 설명이 있다. 즉 구천은 쉼 없는 악령들의 공간이다. 악령들은 쉼을 찾아 구천을 헤맨다. 그런데 이 귀신들의 쉼 없음을 그대로 방치하면 인생들의 삶이 남아나지 않는다. 우리들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이 편안하려면 귀신이 먼저 편안해야 되고, 자손이 편안하려면 죽은 조상이 먼저 편안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들의 시중과 공양에 숨돌릴 날이 없었다. 묏자리 편치 못한 조상들을 위해 전답을 팔았고, 인당수 용왕의 심기를 달래느라고 심청이를 공양했다. 므낫세와 아하스처럼 사람들이 일월성신에게 제 자식을 받쳤다. (32.1)
 우리들이 안식일의 하나님을 이렇게 섬겼던 때는 없었는가? 쉼 없는 신에게 먼저 쉼을 마련해 주어야 우리들에게 쉼이 있고 신에게 쉼을 제시하는 방법은 희생과 고행뿐이라는 이 거짓된 안식일 신학은 그 비인간성과 비인도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비인간성이야말로 쉼 없음과 함께 거짓 신과 거짓 종교의 특성 곧 그 표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짐승이라는 낱말로 상징하고자 하는 본성의 전부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짐승과 그 우상으로 표시된 신이야말로 자신 안에 쉼을 갖지 못하여 자신의 쉼을 위하여 억압과 기만으로 사람의 삶을 유린하여 그들의 삶을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불과 유황의 삶으로 황폐시킨 추악하고 짐승같이 잔학한 신의 전형일 것이다. 그리고 그 쉼 없음과 쉼의 유린이야말로 그 신의 고유한 이미지일 것이다. (32.2)
 그런데 초대 교회시대로부터 안식일 신앙의 비판자들은 유대교 안식일 신앙의 비인간성과 비인도성을 중점적으로 거론해 왔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 신앙에서 짐승의 이미지를 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과연 안식일의 고유한 이미지인가. 아니면 일부 안식일 준수자들의 몰이해로 인한 안식일의 왜곡된 이미지인가. 그것도 아니면 안식일의 원수들이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중상인가. (33.1)